-
상품 정보
상세설명
120년 역사를 지닌 능교공소(칠보성당 관할, 주임=김기곤 신부)에는 초대교회의 믿음살이가 면면히 흐르고 있다. 능교공동체는 지금도 신앙선조들이 해왔던 천렵(川獵;고대부터 내려오는 여가를 즐기는 풍속으로 물가에서 고기를 잡으며 즐기는 놀이) 행사를 해마다 열고 있다. “조상들께서는 ‘주일은 거룩히 지내야 한다’며 일을 안 했어요. 무릎 꿇고 봉헌하는 공소예절이 끝나면 교우들은 냇가에서 천렵을 하며 음식을 나누었지요.” 능교공소 22대 윤기남 (現)공소회장의 말이다.
물고기를 잡아 어죽을 끓이면 부근에 있는 이웃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이 천주교인들은 주일에 일을 안 하는데 추수 때 우리랑 똑같이 수확한다며 자못 부러워했어요. 하! 하!” 금년 7월, 능교공소의 천렵 행사에는 30여 명의 교우들이 함께하였다.
요즈음은 냇가에서 고기가 안 잡히기에 대신 닭백숙과 죽으로 푸짐한 잔칫상이 벌어졌다. 자매들은 큰 가마솥에 죽을 끓이느라 비지땀을 흘리면서도 입가에는 미소가 번진다. 공소회장의 아들인 윤도밍고 형제와 몇몇 젊은이들이 봉사하는데 그들의 활발한 몸짓이 공소의 희망으로 다가온다. 그 옛날, 냇가에서 어죽을 나눠먹는 교우들을 보고 외국인 선교사들이 ‘초대교회의 삶을 살아가는 조선 공동체’라고 칭송했단다. 신태인 성당의 모체인 능교공소는 정읍시 산내면 해발 250m의 고지대에 자리하고 있다. 병인박해 때 산간오지로 피신한 교우들이 박해가 끝나고 생계를 위해 이주한 곳이다. 1929년 김창현 신부가 초대신부로 부임하였고, 일제 치하의 어려운 시기에 신자들과 함께 성당 건물을 지었다. 경당 입구에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찍은 초가지붕의 옛 성당 사진이 걸려있다.
김 신부는 첫 사업으로 야학(夜學)을 설립해 교우들과 외교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선교사를 태인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암울한 시대에 피난처가 되었던 능교본당은 1935년 2대 허일록 신부 재임시 태인면 거산리에 새로운 성당을 짓고 이사함으로써 본당의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능교공소에서 16대 공소회장을 지낸 김진복 형제는 “학교 구경도 못한 이들이 여기서 한글을 깨우쳤지요. 6.25 전쟁 전에는 100여 명이 모이는 공소였습니다.”라고 회고한다. 판공성사를 위해 사제가 공소에 방문하는 날은 교우들이 한데 모여 잔칫날 분위기였다.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자부심을 가졌으며, 상스러운 말과 행동은 하지 않았지요. 아기이름을 ‘마태’, ‘토마’라 지었고 호적에도 그대로 올렸습니다. 혼사 때에도 교우끼리만 선을 보고 혼인을 했어요.” 또한 태인으로 본당이 이전되자 반나절 산길을 걸어서 성당에 갈 정도로 지극한 믿음을 보였다. 능교공소는 1982년 건립된 기존 공소 건물이 낡아져 새 건물을 짓고, 2008년 능교리 신기마을 현지에서 이병호 주교 주례로 신축 경당 축복식을 가졌다. 경당에는 성체가 모셔져 있어 지금도 매일 오후 2시부터 3시 사이에 교우들의 성체조배와 기도가 이어지고 있다.
얼마 전 이곳 고향으로 귀농한 최아가다 자매는 “옛날엔 새벽미사와 삼종기도 때 성당에서 종을 쳤어요. 종소리가 울리면 얼추 시간을 짐작했지요. 그리고 짚으로 앞을 가린 재래식 화장실을 사용했는데 이제는 옛이야기가 되었네요.”라며 웃는다. 남편 강병근 형제도 성당에서 열심히 활동하며 흙을 일구는 농사꾼이 되었다.
초대교회의 섬김과 나눔이 배어있는 능교공소. 지금은 40여 명의 교우가 아담한 경당에서 미사와 성체조배로 신앙의 불씨를 보존하고 있다. 능교공소는 현재의 공소건물을 리모델링해서 피정·교육센터로 활용하고, 공소와 공소를 연결했던 공소 길을 복원해 ‘공소 순례길’을 만들고 있다. 하느님의 계명 따라 살았던 이들의 현주소인 공소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지만, 그분들의 신앙을 다음 세대에 계승시켜 근본을 잊지 않는 신앙인이 되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몫으로 남아 있다.
글 : 신현숙 기자(교구 기자단) 사진 : 손영익, 이혜령(교구 가톨릭사진가회)
-
새소식
-
변경/수정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