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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이춘근 라우렌시오 순교자 기념 순례지이곳은 오래된 교우촌으로, 하느님의 종 이춘근 라우렌시오 신부(베네딕도회) 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이춘근 신부는 서울교구 사제로 서품 받은 뒤에 수도회에 입회하였고, 1950년 10월 5일 평양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해진다.
신암리(新岩理)는 조선 말기 박해를 피해 형성된 교우촌으로, 1907년 송도(개성)성당 관할 공소로 설립되었다. 그 뒤 1925년에 본당으로 승격되었다가, 1931년 다시 행주성당 관할 공소가 되었고, 1935년 덕정리성당 소속이 되었다가, 1946년 덕정리성당이 의정부동으로 옮기며 의정부성당 소속이 되었다.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초토화되었으나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신자들의 노력과 영국 군인들의 도움으로 공소를 재건하였다. 이렇게 신앙을 간직해 온 신암리 공소는 1959년 동두천성당 공소로 바뀌었고, 2004년 의정부교구 설정 이후에 2008년 9월 본당 신부가 부임하면서 다시 신암리 성당으로 승격되었다.
2008년에 ‘공소설립 100주년 기념성전’을 신축 봉헌 하였다.신암리는 조선 말기에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들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1900년대 초 서울 종현(현 명동) 본당 관할이었던 의정부 지역은 구한말 박해를 피해 도자기를 굽던 교우촌이 신앙의 뿌리가 되었다.
구한말 우고리(양주시 광적면 우고리)와 신암리(양주시 남면 신암리) 일대에 박해를 피해 집단으로 공동체를 이루며 교우촌이 형성된 것이다.
신암리에 개성 본당 관할 공소가 설립된 것은 1909년이다. 이때 개성 본당의 주임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르 장드르(Le Gendre, 崔昌根)였고, 1년에 두 차례 봄과 가을에 신암리로 와서 판공성사를 베풀고 미사를 집전하였다.
그런데 개성과 신암리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신앙을 유지하는 데에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당시 신암리 공소에는 300여 명의 신자가 거주하고 있었고, 박성로 프란치스코가 공소회장을 맡고 있었다.
1924년 10월 27일 개성 본당 서병익(徐丙翼) 바오로 신부가 신암리 공소와 우고리 공소를 방문하였다.
그 후 1925년 3월 박원문 마르코 회장 시절에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2년 후인 1927년 5월이 돼서야 최문식(崔文植) 베드로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연천· 양주 · 파주 · 포천 · 가평 · 고양군 일대를 관할하게 되었다.
그러나 본당이 경제적으로 너무나 열악하여 도저히 사제의 생활을 뒷받침할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3년 뒤인 1930년 4월에 최문식 신부는 미리내로 전임되고 본당은 폐지되어 다시 행주 본당의 관할 공소가 되었다.
이때 당시 신암리 공소의 회장은 이재현 베네딕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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