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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대구대교구
대표전화 054-751-6488
팩스 054-613-5688
이메일 jmjeong6488@gmail.com
  담당 김용범 그레고리오 신부
홈페이지 http://jinmokjeong.or.kr/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산내면 수의길 192
   경상북도 경주시 산내면 내일리 388
   192 Suui-gil, Sannae-myeon, Gyeongju-si, Gyeongsangbuk-do
  • 상품 정보

    상세설명

    진목정 성지는 한국교회초기부터 박해를 피해 형성된 교우촌(참나무뎡이)과 병인박해(1866) 때에는 세분 복자(이양등-베드로, 김종륜-루카, 허인백-야고보)와 그 가족들이 피신해 살았던 범굴 그리고 순교하신(1868) 세분의 유해를 합장했던 순교자 묘소가 있는 곳이다.
    진목정성지는 기해박해(1839년) 이 후 어의현(於義峴) 일대에 형성된 여러 교우촌 가운데 하나이며, 특히 1862년 10월에 성 앙투안 다블뤼(안돈이) 주교님이 스무날 정도 머무르면서 사목을 하셨다고 추정되는 참나무뎡이(진목) 공소가 있는 곳이다.
    또한 병인박해 시기에 울산 장대벌(울산 병영순교성지)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아 순교하신 세 분 복자 이양등 베드로, 김종륜 루카, 허인백 야고보(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로 선언되심)께서 신앙을 지키며 박해를 피해 숨어 사셨던 범굴이 있는 곳이며, 순교하신 후에는 세 분의 유해가 합장되어 있었던 순교자묘소(가묘)가 있는 곳이다.

    부주임 : 황인욱 마티아 신부
    성지의 근무시간(하늘원에 대한 문의 시간도 동일)
    월요일 : 휴관
    화~주일 : 09:00 ~ 18:00 (점심시간 : 12:00 ~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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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목정
    진목정의 원래 지명은 ‘참나무뎡이’라고 하였다. 뎡이는 골짜기를 나타내는 ‘단이’의 방언이며 참나무는 ‘眞木’의 옛글이니, 이곳은 참나무가 많은 골짜기라는 것을 표현하는 지명이 된다.
    참나무 뎡이라고 하는 정겨운 이 지명은 1894년의 갑오개혁 당시에 지명을 한자로 표기하는 개혁정책이 시행되면서, 진목정이라고 하는 지명으로 정리되었으며 지금까지 이렇게 진목정으로 부르게 되었다.
    진목정은 경북 경주시 산내면 내일2리에 속해있는 작은 마을인데, 이 지역은 1906년 이전까지는 산내면이 아닌 경주부 남면로서(南面 路西)에 속한 곳이었다.
    남면로서는 단석산에서 백운산, 고헌산, 문복산을 모두 아우르는 산간지대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1871년에 작성한 경주읍지를 살펴보면 비을지(빌기), 시다화(대현), 소야(소호), 차동(차리), 잉포(인보), 삼정동(전읍) 등의 마을이 나타난다.
    경주읍지에 기록된 시다화는 동창천과 범곡천이 합류하는 지역으로 현재의 행정구역은 경주시 산내면 대현리가 되며, 참나무뎡이는 시다화의 산중 곳곳에 흩어져 있는 작은 마을들 중 하나로 참나무 골짜기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이었다.

    진목공소
    참나무뎡이에 교우촌이 자리 잡은 것이 언제부터였다고 확언할 수는 없다.
    다만 경신박해 이전부터 간월 공소를 중심으로 하여 언양현과 경주부 남면 로서의 산악지대(당시 "울산의 죽영리"라 불리던 지역)에는 신자들이 흩어져 살고 있었다.
    이들은 1860년의 경신박해를 당하여 순교하신 분도 계시고, 재산도 수탈당하는 핍박을 받았다.
    최양업 신부님도 경신박해 당시 이 지역에 사목방문을 하였다가 박해를 만나 죽림굴로 피신하여 경신박해의 참혹한 사정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하였다.
    최양업 신부님의 뒤를 이어 이 지역에 대한 사목 책임을 맡은 분은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님이였다(성 다블뤼 안토니오).
    다블뤼주교님이 1862년 10월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에 보면 참나무뎡이로 추정되는 지역에서 스무날 정도 머무르면서 경주, 언양, 밀양의 산간지방에서 찾아오는 교우들에게 성사를 주고 교리 공부를 시킨 내용이 나온다.
    다블뤼주교님은 참나무뎡이로 추정되는 지역에 대하여 새로 세운 교우촌, 다섯채의 가옥이 있는 마을, 지형적 위치의 장점을 가진곳, 간월공소로 추정되는 곳에서 4리외(약 16km) 떨어진 곳, 등의 표현을 하였다.
    이 기록에 근거한다면 참나무뎡이 공소와 교우촌은 경신박해 직후에 세워졌다고 볼 수 있고, 박해가 일어났을 때에는 피난처의 역할과 경상도 남부 산악지대 신자들에 대한 연락처의 중심 구실을 맡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다블뤼 주교님은 1864년 봄까지 매년 이곳으로 사목방문을 하였으며, 그 해 가을부터는 이 지역의 사목활동을 리델(Felix Clair Ridel) 신부님에게 인계하였다. 후에 6대 주교가 되는 리델 신부님은 1865년에 이 지역으로 사목방문을 오게 되었다.
    그러나 1866년에 병인박해가 발생하면서 사제의 사목방문은 더 이상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1883년에 김보록(Achille Paul Robert) 신부님이 방문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김보록(Robert Achille Paul) 신부의 사목방문은 1883년부터 부산본당이 설립되는 1890년까지 매년 이루어졌다.
    그 이후에는 대구본당과 부산 본당의 신부님들이 협의에 의해 사목방문이 진행되어 오다가 1897년과 1898년에는 명례성당을 담당한 강성삼 라우렌시오 신부가 이곳 사목을 전담하기도 했지만 곧 건강이 나빠져 더 이상의 사목방문이 어려워지게 되었다.
    이에 1899년 10월에 김보록, 김성학, 안세화(플로리앙 드망즈), 에밀타케 이렇게 네 분의 신부가 사목분할을 논의하여 경상도 남동부에 있는 17개의 공소를 부산본당소속으로 할 것을 결정함으로써 강성삼 신부가 맡았던 진목정공소도 부산본당의 드망즈 신부(후에 대구대목구 초대 주교가 됨)가 담당하게 되었고 진목정공소는 부산본당에 소속된 공소가 되었다.
    진목정공소는 1926년에 경주성당이 세워지자 경주성당 소속의 공소가 되었다.
    진목정에 거주한 주민들은 박씨 가문의 사람들이 선주민으로 나타나는데 그들이 언제부터 정착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1894년 뮈텔 주교가 사목방문을 하였을 당시에 뮈텔주교를 맞이한 박요한 회장이 그 선주민 집안이다.
    그리고 김종륜 루카 복자의 방계인 김종운이 병인박해를 피하여 오다가 충청도에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서 순교를 하였다. 그의 부인이 남은 가족을 이끌고 진목정에 정착하였는데 그 집안에서 김승연 아오스딩 신부를 배출하였다.
    김문학 (알로시오) 가정은 병인박해가 발생하자 경주 양북에서 우중골로 피신하였으며 우중골에서 다시 소태동으로 이주하여 살다가 1898년 경에 진목정으로 옮겨와서 그 후손들이 현재까지 살고 있다.
    그 후 1930년 초에 구룡공소에 살던 이상우 가정도 이주하여 왔으며 이 집안에서 이임춘 신부를 배출하였다.
    진목정공소는 경주성당(현 성동성당) 소속에서 성건성당 소속으로 변경되었으며, 이후에 건천성당을 거쳐서 현재는 산내성당 소속 공소가 되었다.

    범굴
    “또 피신하여 세 집 식구가 ...... 단수골 범굴에 이르러 성모호칭기도를 외워 기도하고 범굴 앞에서 발을 굴러 이 굴에 사는 임자가 있거든 우리 난처한 사람들을 생각하여 조금 비켜주기 바란다 하고 기다리고 서 있는데 큰 호랑이가 나서더니 기지개를 하면서 사람들을 둘러보고 나간 후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굴에서 거의 2년간 근방 동네에 밥을 얻어먹고 혹은 신발도 삼아 팔고 살다가 발각되어 경주 포졸에게 잡혀......”
    (허야고보의 딸 콜롬바의 증언)
    1932년 세분의 유해를 대구교구 공동묘지(감천리)로 옮겨간 뒤로는 세 분의 복자들이 체포된 범굴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1950년 민족의 아픔인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이 지역에서는 운문산을 중심으로 하여 무장공비들의 활동이 매우 활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공비와 주민들 간의 접촉을 차단하고 공비들의 은신처가 될만한 곳을 제거하기 위해 독가촌 철거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범굴도 폭파의 대상이 되었다. 국군의 동굴 폭파로 인하여 범굴은 입구에서부터 상당부분이 함몰이 되었으며 동굴의 뒷부분 일부만 남아있게 되었다.
    1974년 서정길 대주교님은 경주성당(현 경주 성동성당)을 방문하신 자리에서 범굴과 진목정에 대하여 관심을 나타내신 적이 있다. 당시 경주성당의 이성우 아길로 신부님은 순교자 성월에 경주, 포항, 안강 세 개 성당 합동으로 빌기에서 시작하여 도보로 빌기고개를 넘어 진목정 순교자 묘까지 가는 성지순례를 3년 간 진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범굴을 찾으려는 노력도 하였으나 범굴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였다.
    이성우 신부님이 타 본당으로 인사발령이 나고 진목정 공소에 대한 관할권도 경주 성건 성당으로 이전되면서 세 분 순교자에 대한 현양 활동은 잠시 정체기를 나타내게 되었다.
    채영희 요셉 신부님 대에 이르러서 다시 활기를 찾게 되었고 오랜 노력 끝에 (단석산 일대에서는 유명한 포수였던 엄포수를 따라 다니며 단석산의 모든 골짜기를 누비고 다녔던 소태 사람 김제규 옹의 도움으로) 소태동 단석골 범굴의 위치를 찾아내게 되었다. 채영희 신부님이 범굴의 개발에 대하여 고민 하던 중 1989년 사순시기(3월 10일)에 진목정 공소에 성지순례를 온 포철가톨릭교우회원들을 만나게 되고, 포철가톨릭교우회는 신부님의 요청에 순명하여 범굴개발에 나서게 되었다.
    포철가톨릭교우회에서는 진목정 성지 동굴 개발팀을 구성하여 4월 16일에 동굴내부로 진입하는데 성공함으로서 범굴개발의 첫 활동이 시작되었다. 1989년 4월 16일부터 1990년 3월 18일까지 주말을 이용하여 연 인원 700여명이 총 14차에 걸친 개발활동을 펼쳤는데 1차적으로 동굴 내부를 측량, 촬영, 스케치를 하였다.
    그리고 동굴까지의 산길 조성을 하기 위해서는 토지소유주를 확인하여 사용승인을 받아야 하는 문제를 풀어야 했다.
    채영희 신부님과 포철가톨릭교우회장 최휘철 네레오 형제의 노력으로 토지소유주인 서울에 거주하는 반경희 오틸리아 자매님과 연락이 되었으며, 반경희 오틸리아 자매는 자신이 소유한 토지가 성지 개발이라고 하는 영광된 일에 쓰여 진다면 그보다 더 큰 은총은 없다며 흔쾌히 토지를 기증하여 주었다.
    토지사용문제가 해결이 되면서 포철가톨릭교우회의 교우들은 발전기와 체인블록, 암설파괴용 약제 들을 동원하여서 십자가의 길을 조성하고 우물터를 발견하여 수질 검사를 하였으며, 동굴 앞에서 기도와 묵상을 할 수 있도록 평지를 조성하였다.
    1990년 4월에 당시 교구장 이문희 대주교께 개발보고 상황을 브리핑하였고, 그해 7월 포철가톨릭교우회는 범굴에 대한 작업을 마무리하였다.
    2011년 3월 ‘진목정 성지개발위원회’가 발족하고 성지개발이 본격화되면서 범굴에 오르는 길을 새로 조성하였고, 과거 개발을 도왔던 포철가톨릭교우회 팀과 만나 범굴개발을 위한 계획을 논의하였다. 경주지진과 태풍의 영향으로 더욱 심하게 유실된 범굴복원을 위해 작업을 하게 된다면 산사태의 우려가 있으므로 범굴복원은 하지 않기로 하였고, 대신 진목정순교자기념성당 근처에 개발될 순례자의 집에 범굴모형의 동굴을 마련하여 세분 순교자 가족이 살았던 당시의 상황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2020년 순례자의 집을 설계하면서 이러한 의견은 반영되었고, 2021년 범굴모형의 동굴과 묵상소를 갖춘 순례자의 집'(진목 Albergue)' 건축을 시작하였다.
    가파른 산 중턱, 물을 얻고 동네를 다니기 위해서 오르내려야 했던 동굴을 직접 체험할 수 없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순례자의 집에 조성될 범굴모형의 동굴과 묵상소를 통해 순례자들은 순교자들의 삶을 체험하고 묵상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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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교자기념성당
    진목정성지 성당은 병인박해 150주년을 기념하고 동시에 세분 복자의 순교 150주년을 기념하여 세분의 순교정신을 기리고 본받기 위하여 “순교자기념성당”이란 이름으로 건축하여 봉헌하였다 (2017. 05.20).
    이 성전의 외관은 신앙인들이 추구해야할 여덟가지 행복(진복팔단)을 되새기고자 팔각모양으로 디자인하였고, 성전의 내부는 그 가르침대로 따라 삶을 봉헌하며 산 이는 천국의 영광을 누리게 됨을 생각하도록 전면을 성전, 후면을 하늘원(봉안당)으로 조성되어 있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살릴 것이다(요한 6,40)”라고 머릿돌에 새겨진 것처럼 여기에 봉안되는 모든 이들의 영혼이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행복에 들기를 기도하는 우리의 소망을 담고 있다.
    신자들이 이 성전을 방문할 때 각자의 죽음을 되새기며 신앙의 자세를 새로이 할 수 있도록, 또한 죽은 이들을 위해 미사와 기도를 봉헌할 수 있도록 건축되었다.
    성전 앞마당 우측 끝부분의 계단으로 내려가면 순교자 묘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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