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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 정보
상세설명
신앙을 증거한 80년간의 순교터
홍주순교성지
홍주성지는 충청도의 첫 순교터이며, 전국에서 두 번째로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성지이다.
홍주는 1784년 한국천주교 창설초기부터 충청도의 첫 신자인 이존창의 영향으로 복음이 활발히 전파된 곳이다. 천주교 신자가 제일 많았던 홍주지역(내포지역)은 행정, 군사의 요충지인 홍주목과 진영이 있던 관계로 많은 순교자가 탄생하였다. 기록상으로만 초기 박해(신해~정사)동안 8명, 이어 중기 박해(신유~기해)동안 4명, 병인박해에 200명이나 된다(총212명). 박해기간(1791~1869) 동안 무명 순교자까지 1,000명이 넘는 순교자를 탄생시킨 거룩한 성지이다.
특히 원시장 베드로는 신해박해 때 홍주 옥에서 세례를 받고 추운 날 동사형으로 순교하여 충청도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원시장 베드로, 방 프란치스코, 박취득 라우센시오, 황일광 시몬이 복자품에 올랐다.
많은 순교자가 있던 관계로 홍주성지에는 6곳의 순교터가 있다. 고문과 재판으로 피로 얼룩진 목사의 동헌과 진영장의 동헌, 그리고 감옥터, 조리돌림을 당한 저잣거리, 참수터, 생매장터(14처)가 있다. 심문과 고문, 죽음의 형장까지 1.5km 거리의 십자가의 길과 순교의 길을 깊이 묵상할 수 있다. 특별히 성지는 열차 순례지로 이름이 알려져 있으며, 내포 순례길이 잘 조성되어 있다.
성지 미사
주일: 오전 11시
평일: 오전 11시(월요일은 예약 시 가능)
피정·식사 가능(사전 예약 필요)
성지 순례 코스
① 근민당 → ② 홍주 옥->③ 경사당 → ④ 저자거리 → ⑤ 참수 터->⑥ 생매장 터 → ⑦ 홍성 본당(미사 요청 시)
순교자들이 목숨을 바친 순교 터 3곳
- 홍주 옥(1871년 홍주목지도, 구 검찰지청 및 법원지원자리) : 113명(교수형 100명+ 옥사 13명) 이 순교한 최대의 순교 터이다.
- 생매장 터: 홍주성 밖 월계천과 홍성천이 만나는 합수머리 근처에 생매장터가 있다.
- 참수 터: 홍주성 북문 밖 월계천과 소향천이 만나는 북문교 아래 100m지점
순교자들이 신앙을 증거 한 장소 3곳
- 경사당 자리: 순교자들이 문초와 형벌을 당하던 홍주진영의 동헌(현. 한국통신 자리)
- 근민당 자리 : 홍주 목사의 동헌(현. 군청 뒤뜰)
- 저자거리 : 순교자들이 조리돌림을 당하던 장소(구. 예비군중대 터)
성지순례 홍주6곳 순교터
순교 1터 <증거터 목사동헌>
이곳 동헌은 천주교 신자가 제일 많은 내포지역을 관장했던 홍주목사가 머물던 곳이다.
홍주의 순교자들이 잡혀와 처음으로 신앙을 증거하던 장소로서 갖은 고문과 배교를 강요 당하지만 우리의 순교자들은 끝까지 신앙을 지켜 형을 받고 옥에 갇히게 된다.
순교 2터 <순교터 홍주옥>
충청도의 첫 순교터이며 113명의 순교자가 탄생한 곳이다.
첫 순교자 원시장 베드로는 이곳에서 동사(凍死)로 순교하였다.
굶주림과 목마름, 교수형, 장살형, 질병 등 다양한 형태로 죽어간 곳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첫 선교사인 성 모방신부, 성 샤스텡신부가 홍주관아에 자수하여 잠시 갇혀있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성 다블뤼 주교와 성 오메트로 신부, 성 위앵 신부, 성 황석두 루가 6분의 성인들이 잠시 머물렀던 거룩한 곳이기도 하다.
순교 3터 <증거터 홍주 진영>
홍주읍성을 지키던 군인이며 죄인들까지 다스렸던 진영장이 머물던곳으로 4대문 중 가장 중심인 조양문(東門) 바로 앞쪽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서 가장 많은 고문과 박해가 있었으며 가장 많은 피를 흘린 순교터이다.
순교 4터 <증거터 저잣거리>
저잣거리는 장이 서던 곳으로 지금의 시장을 말하며,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이유로 조리돌림을 했던 곳이다.
순교자들도 관아로 끌려갈때나 처형되기전에 이곳에서 조리돌림, 침 뱉음, 돌팔매질 등 조롱을 당하였다.
순교 5터 <순교터 참수터>
신유박해때 황일관(시몬)과 병인박해때 유(마르타)가 참수형을 받은 자리다.
일반적인 형장의 조건인 개천과 백사장,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장소 등을 갖추고 있었던 곳으로 북문교 건너(오른쪽 방향) 월계천변에 있다.
순교 6터 <순교 생매장터>
천주교 4대 박해 중 최대 박해인 병인박해때 너무 많은 내포의 천주교인들을 수용할 감옥이 부족하자 그 대응책으로 일부 천주교신자들을 생매장한 곳이다. (해미생매장터와 같은 시대)이곳은 월계천과 홍성천이 만나는 가장 넓은 모래사장이 있어서 죄인들을 생매장하거나 시신을 이곳에 버리기 적합한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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