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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무골 명칭의 유래
‘신나무골’ 명칭은 골짜기 입구에 ‘신나무’가 있다고 해서 붙여졌다. 하지만 1984년 순교자 이선이 엘리사벳 묘를 조성할 때 언덕 위의 초가집 2채를 없애고 남아있는 신나무 2~3그루를 베어냈다. 신나무골 3차 개발을 하면서 2019년 다시 신나무를 심었다.
신나무골 교우촌 생성과 성직자 방문
신나무골은 대구 근교에서 외진 곳이면서도 교통이 편리한 곳으로 대구 읍내에서 하루거리로 갈 수 있는 곳이어서 일찍부터 사람들이 신나무골에 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나무골에 언제부터 신자가 살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서울에 살던 김현상 요아킴(金顯祥=金厚祥) 가정이 1837년 신나무골을 잠시 거쳐 갔다는 증언이 있어, 1837년 이전부터 신자들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지만 몇 명의 신자들이 살았는지 알 수가 없다.
앵베르 주교님의 1838년 12월 1일 편지를 보면 샤스탕 신부님의 대구 방문을 추정할 수 있다. “감옥에 갇힌 신앙의 증거자들이 자기 죄를 편지로 신부에게 밝히고 같은 날이나 다음날 감옥 문 앞으로 지나가는 그 신부에게 그가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신부의 신호로 통회하는 마음을 발한다면, 사죄를 받을 수 있는지요? 실제로 남부 지역에서 그해에 (1827년부터) 12년간 감옥에 갇혀 있던 증거자 일곱 명이 큰 기쁨으로 사죄를 받았습니다.” 샤스탕 신부님이 대구에 왔을 때, 신나무골에 왔을 가능성이 높다.
1846년 다블뤼 신부님이 신나무골을 방문했을 가능성이 있다. 1849년부터 1861년 6월까지 12년 동안은 최양업 신부님이 경상도 지방을 순회했는데, 이때 신나무골에 와서 성사를 주었을 가능성이 많다. 최양업 신부님이 1861년 7월 22일(음 6월 15일) 과로로 사망하자, 경상도 지방을 다블뤼 주교님(1857년 주교 서품)이 맡아 1865년 초까지 순회 전교를 했다. 1865년부터 1866년 병인박해 직전까지 리텔 신부님(1870년 주교 서품)이 경상도 남쪽 지방을 맡아 순회 전교를 했고, 신나무골에 와서 성사를 주었다.
병인박해 전후의 신나무골 교우촌
1862년 달성군 다사면 부곡리에서 신앙을 받아들인 이이전 안드레아(李以全) 가정이 마을 사람들의 박해를 칠곡군 지천면 웃갓[上枝]에 잠시 머물다가 신나무골로 이사를 왔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신나무골 신자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1873년 병인박해가 끝나자 흩어졌던 신자들과 새로 입교한 신자들이 신나무골에 모여 교우촌을 이루었다. 1885년경 신나무골에 8~9가구에 36~40명 정도의 신자들이 살았다.
이선이 엘리사벳의 순교
이선이 엘리사벳(李先伊)은 배손이(裵孫伊, 裵正模)와 결혼해 칠곡 골버실[국우동]에 살면서 딸 하나와 아들 도령, 용철, 용덕을 낳았으며, 이 시기에 세례를 받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신나무골을 거쳐 팔공산 중턱으로 피난했다. 1868년 2월 8일(양 3월 1일) 한티 옹기굴에 피신했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됐다. 포졸들이 심문을 하자 배손이는 배교해 풀려났고, 이선이와 아들 배도령 스테파노는 “죽어도 천주교[聖敎]를 믿겠다.”며 신앙을 고백했다. 포졸들의 심한 매질에도 신앙을 지켰고, 결국 작두날에 목이 잘려 순교했다. 딸은 출가했고, 용철과 용덕은 나이가 어려 심문을 당하지 않았다.
숨어서 순교 상황을 지켜보던 배손이가 이선이와 배도령의 시신을 임시로 한티 뒷산에 묻었다. 얼마 후 이선이의 시신은 칠곡읍 아양동 선산[칠곡IC 뒷산]으로 이장했으나, 미혼인 배도령의 시신은 이장하지 않았다.
초대 로베르 신부의 신나무골 정착
1882년부터 로베르 아킬레오(Achille Paul Robert, 金保祿, 1853~1922) 신부님이 경상도 지방의 선교책임을 맡아서 경상도 전역과 충청도, 경기도, 강원도 일부, 전라도 일부 지방을 순회 전교했다. 로베르 신부님은 이이전 안드레아 집을 매입한 뒤 수리해 사제관으로 만들고, 1885년 12월 대구본당을 설립했다. 서상돈 아우구스티노(徐相燉, 1851~1913)와 사촌 동생 동정녀 서 마리아(1859~1917), 복사 이호연 베드로(李浩然)가 로베르 신부님을 도와 신나무골에 상주했다.
“저의 구역은 전라도와 경상도 전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 저는 갖가지 난관을 이겨내고 마침내 경상도 신자들 사이에 정착했습니다. 주교님도 아시다시피 선교사가 경상도에 사제관을 두는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1886년 4월 21일 칠곡에서 보낸 로베르 신부 사목보고)
1886년 한불수호조약으로 전교가 가능했으나 지방민들의 탄압이 여전히 심했다. 그래서 로베르 신부님은 외출을 할 때는 언제나 가마를 타거나 상주 복장에 방갓을 쓰고 다니면서 조심을 했다.
연화학당(蓮花學堂)
로베르 신부님은 교육 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여 ‘연화학당’(1886~1894)을 설립했다. 1890년 충주 출신 박상언 요한(朴相彦) 선생이 신나무골로 왔고, 양자(養子) 바실리오와 함께 천자문과 한글을 가르쳤다. 박상언은 생활 형편이 어려워 신나무골을 떠났고, 1894년 로베르 신부님은 28명 학생이 있는 계산동 학교만 남겨 놓고 나머지 학교들을 폐쇄했다.
십자가형 한옥성당
로베르 신부님의 대구본당은 1887년 새방골로, 1891년 계산동으로 이전했다. 로베르 신부는 1893년부터 계산동 성당이 비좁아지자 큰 성당을 지을 결심을 했다. 1894년 초부터 성당을 짓기 위해 목재를 구입했다. 1895년 9월 성당 부지의 평탄 작업을 하고, 담장을 쌓았다. 로베르 신부는 계산동에 유럽식 성당을 지으려 했지만 여러 가지 문제로 1895년 10월 포기했다. 1895년 12월 대어벌에 임시 ‘성 요셉’성당과 사제관을 마련해 계산동에 조선식 성당을 짓기로 계획했다.
성당을 짓기 시작한 1896년 5월 31일부터 1898년 9월까지 로베르 신부는 대어벌에 거주했다. 십자가형 한옥 성당은 1898년 9월 1일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했고, 12월 25일 비에모 신부와 함께 성당을 축성했다. 하지만 1901년 2월 4일 화재로 소실됐다. 대구성당은 고딕 양식으로 건립해 1903년 11월 1일 축성했고, 대구 대목구가 설립된 후 드망즈 주교님이 증축해 1919년 5월 11일 축성했다.
2대 보두네 신부
로베르 신부님이 1887년 11월 새방골로 떠나자 보두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ois Xavier Baudounet, 尹沙勿, 1859~1915) 신부님이 후임으로 와서 조선말과 풍습을 배우면서 18개월 동안 사목을 했다. 보두네 신부님은 1889년 3월 전주 부근 대성동으로 떠났다. 보두네 신부님은 1891년 전동성당을 설립했다.
3대 죠조 신부
보두네 신부님이 떠나자 죠조 모세(Moyse Jozeau, 趙得夏, 1866~1894) 신부님이 와서 조선말과 풍습을 배우면서 1년 동안 신나무골에 상주하면서 성사를 주었다. 죠조 신부님이 1890년 처음으로 부산 지역 영도 조내기(청학동 본당)로 떠나자 신나무골에는 당분간 신부님이 없었다. 죠조 신부님이 설립한 부산성당은 1890년 청학동, 1900년 초량동을 거쳐 1916년 범일동으로 옮겼다.
뮈텔 주교의 신나무골 공소 방문
사람이 살지 않은 신나무골 초가 사제관이 허물어지기 시작하자, 1893년부터 4칸짜리 20평 초가집을 마련해 공소예절을 드렸다.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님이 경상도 지방을 사목 방문을 한 1893년 11월 신나무골과 장자동에서 견진성사를 주었다. “공소의 방(3칸짜리, 그리고 마루 하나)과 그 이웃집은 학교 선생의 수입원이 되고 있는 논과 함께 교회 소유이다. 학교의 학생 수는 작년에는 4명이었는데 이제는 단 한 명뿐이다. 로베르 신부가 새방골로 가기 전에 2년간 살았던 곳이 여기이다. 로베르 신부의 뒤를 이어 보두네 신부가 18개월을, 그리고 죠조 신부가 1년을 살았다.”(뮈텔주교일기1권 1893년 11월 18일)
4대 파이야스 신부와 가실성당
1894년 파이야스 가밀로(Camillus Cyprien Pailhasse, 河敬朝, 1868~1903) 신부님이 조선에 입국하여 신나무골에 왔으며, 1894년 가을에 왜관 가실에 집과 전답을 구입해 수리했고, 1895년 2월 왜관 가실로 떠났고 9월 가실 본당을 설립했다.
신나무골공소
1895년 신나무골은 가실 본당의 공소가 됐고, 신자들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김천에서 대구로 기차를 타고 올 때] “신나무골 앞에 있는 철도 옆 비탈길 위 기차가 지나가는 길에 이 마을의 교우들이 강복을 받기 위해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드망즈 주교 일기 1912년 1월 24일) 1926년 왜관 본당이 설립되자 신나무골은 왜관 본당 공소가 됐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공소 집은 불타 버렸고, 1952년 봄 연화동 24번지[로베르 신부 머물던 곳, 이상우 부지]에 흙벽돌과 기와로 된 20평 한옥 강당을 지었다. 1959년 12월 6일 신동 공소 강당이 마련되자, 허물어진 신나무골 공소 재목을 팔아 수도원에 바치고 신동 공소로 가서 예절을 바쳤다.
근대 순교자와 신나무골공소
신나무골공소에 와서 사목을 한 왜관본당 신부님들이 순교자 ‘하느님의 종’이 됐다. 왜관성당 1대부터 5대까지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님들이 본당을 사목했는데, 2대 카다르(Joseph Cadars, 姜達淳, 1878~1950, 재임 1929~1931), 3대 리샤르(Robert Richard, 李東憲, 1900~1950, 재임 1931~1939), 4대 를뢰(Pierre Leleu, 盧, 1909~1950, 재임 1939~1943) 주임신부님이 순교했다. 코르데스(Marius Cordesse, 孔, 1909~1950) 신부님은 리샤르 신부님이 요양 간 동안 왜관본당에서 잠시 사목을 했는데 역시 순교했다.
1948년 5월 8일 대전교구가 설립됐고, 대구교구에서 사목을 하던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님들은 거의 다 대전교구로 옮겼다. 새로 생긴 더 어려운 교구를 위해 대구를 떠났다. 1950년 여름 전쟁이 일어나자 북한 공산군은 13명의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님들을 체포했다. 6명은 대전에서 학살당했고, 죽음의 행진에서 5명이 희생됐으며, 1명만 살아남았다. 리샤르・를뢰・코르데스 신부님은 대전 목동성당에서 총살당했고, 카다르 신부님은 죽음의 행진에서 선종 했다.
신나무골성지 제1차 개발
신나무골이 신앙의 요람지임을 알게 된 레지날도(Reginaldus Egner, 王默道, 1973~1975) 신부님은 1974년 성지 개발을 시작했다. 왜관수도원 신부들의 봉헌금과 신자들의 부지 봉헌과 협조로 제1차 성지개발을 완수했다. 1977년 7월 11일 신동성당을 주축으로 김구정 선생이 작성한 영남지역 ‘선교 요람지 기념비’를 세웠다.
신나무골성지 제2차 개발
1982년 신동성당에서 축대 쌓기, 나무 심기, 광장 넓히기 등 성지 확장 공사를 했다. 1983년경 로베르 신부의 흉상 제작을 최홍록 스테파노에게 맡겼고, 1984년 대구의 첫 본당 터를 복원하면서 옛 사제관과 학당, 명상의 집 개축 공사를 했다. 1984년 7월 8일 이선이 엘리사벳의 유해를 칠곡 안양동 산[칠곡IC 뒷산]에서 신나무골로 이장했다.
신나무골성지 제3차 개발
2015년 왜관수도원에서 대구대교구로 이관되자, 대구대교구는 신나무골 성지 개발에 착수했다. 서준홍 마티아 신부를 중심으로 자료 수집을 마친 후 2016년 9월 6일 서홍기술건축사사무소[건축사 이상동 베다]에 설계를 맡기고, 필요한 땅을 일부 매입했다. 2016년 9월 13일 신나무골성지개발위원회를 신설했고, 2017년 11월 28일 현창건설[대표 박승화]을 대표 건축업체로 선정했고, 한옥 건설은 ㈜강인[이사 조용철]이 맡았다. 2018년 1월 8일 교구 건축 인가를 받고, 기존 건물을 해체한 다음 2018년 2월 28일 기공식을 가졌으며, 2018년 8월 9일 성당 상량식을 가졌다. 강남조경[대표 김은숙 엔리카]에서 조경을 했다. 2019년 4월 10일 준공 검사를 마쳤다.
십자가형 한옥 성당, 한옥 기와 사제관, 로베르 신부 초가 사제관 복원, 초가 신나무골 카페, 기와 쉼터 등이 조성된 성지를 2019년 5월 2일(목) 천주교 대구대교구장 조환길 타대오 대주교가 축성했다.
신나무골 독립 성지
2018년 8월 24일 서준홍 마티아 신부님을 성지 전담으로 임명하면서 신나무골 성지는 본당 소속이 아닌 교구 소속 독립 성지가 됐다. 2019년 5월 일 축복식을 갖고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신나무골성지에 9,821㎡(2,971평) 부지가 있다. 성지 개발부지 2,145㎡(649평), 묘지부지 2,579㎡(780평), 주차장 부지 2,165㎡(655평), 성지 위쪽 골짜기 부지 2,932㎡(887평)가 있다. 성당 145.80㎡(44평), 구 사제관 32.90㎡(10평), 카페 60.75㎡(18평), 사제관 76.70㎡(23평), 쉼터 32㎡(9.5평), 성모보호각 3.78㎡(1평), 대문 5.20㎡(1.5평)의 면적에 건물이 들어서 있다. 건물의 총 면적은 351,98㎡(107평)로 성지개발부지의 25%를 차지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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