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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봉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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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강남구 봉은사로 531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73 봉은사

531, Bongeunsa-ro, Gangnam-gu, Seoul

전통사찰

bongeunsa@templest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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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 중흥을 위한 정진도량 봉은사. 봉은사는 서울의 중심지인 강남구 삼성동에 자리 잡은 1,200여 년 역사의 천 년 고찰입니다.
신라 원성왕 10년(794년) 연회국사가 창건한 봉은사는 숭유억불로 불교를 탄압하던 조선시대에서 불교의 명맥을 잇기 위해 애쓰신 보우스님의 원력으로 불교 중흥의 주춧돌이 되었습니다.

현재 코엑스 자리인 승과평에서 스님을 선발하는 승과고시를 실시해 한국불교의 선맥을 이은 서산대사, 사명대사 등의 걸출한 스승들을 배출하였으며 조선 후기에는 영기스님께서 판전을 세우고 화엄경 81권을 판각해 판전에 봉안하였습니다. 현재 판전의 현판 글씨는, 말년에 봉은사에 머물며 추사체를 완성시킨 김정희의 절필(絶筆)입니다.

오늘날 봉은사는 수행 중심의 사찰 운영으로 새로운 한국불교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고 있습니다.
또한 템플스테이를 비롯한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국내외적으로 양질의 한국불교 문화를 널리 알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복지를 실현하는 도심 대찰의 위상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신라시대

봉은사(奉恩寺)는 신라시대의 고승 연회국사(緣會國師)가 794년(원성왕 10)에 견성사(見性寺)란 이름으로 창건(創建)하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연회국사는 영축산에 은거하면서 법화경을 외우며 보현행을 닦았던 신라 원성왕대의 고승이다. 또한 삼국사기 권38 <잡지(雜誌)> 제7에는 봉은사에 관한 또 다른 기록이 실려 있다. 이른바 성전사원에 해당하는 일곱 사찰 가운데 하나로 봉은사가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그 일곱 사찰은 사천왕사ㆍ봉선사ㆍ감은사ㆍ봉덕사ㆍ영모사ㆍ영흥사 그리고 봉은사다.

성전은 왕실에서 건립하는 사찰의 조성과 운영을 위해 설치한 일종의 관부였다. 또한 일반 행정관청과는 다른 특수 관청으로서 그 관원 조직도 일반적인 관직 이름과 다른 호칭의 관원들이 왕실 사원의 행정과 업무를 도맡고 있었다. 당시에 성전이 설치될 정도의 사찰은 신라 사회에서 대단히 큰 비중을 차지하던 곳이다. 실제 봉은사의 경우만 보더라도 신라 진지왕의 추복을 위해 건립되었다는 점, 그리고 이를 위해 이미 혜공왕대로부터 사찰 조성을 시작하여 선덕왕을 거쳐 원성왕대에 이르러 완성되었다는 점 등이 각종 자료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고려시대

우리 역사상에 등장하는 봉은사라는 이름을 가진 명찰은 세 곳이 있다. 각각 신라, 고려, 조선시대에 불교사적으로, 국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사찰들이다. 먼저 신라 시대의 봉은사는 앞서 말했듯이 혜공왕대에 시작하여 원성왕대에 완성한 성전사원이다. 그리고 고려시대의 봉은사는 수도 개성에 위치했던 사찰로 태조 이래 역대 왕실에서 매우 중시하였던 곳이다. 이곳은 선종 계통 사찰로 유명하였고, 대대로 국사ㆍ 왕사의 책봉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조선 시대의 봉은사는 바로 문정왕후의 발원과 보우대사의 정신이 살아 숨쉬는 서울의 봉은사이다.

고려의 흔적은 사료적으로 찾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많이 잔존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대표적 유물인 1344년(충혜왕 5)에 조성된 은입사향로에 관련한 내용은 봉은사의 고려의 숨결을 알 수 있는 자료로 남아 있다. 현재 보물 제321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향로는 최근까지 봉은사에 있다가 지금은 대한불교조계종 불교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중기 - 조선시대 보우스님의 활동과 선종 수사찰

조선시대에 불교 사원을 대폭 축소하려는 정책에 따라 1406년(태종 6)에는 국가 인정 사찰이 242개사로 줄었고, 1424년(세종 6)에는 다시 전국의 사찰 중에서 선교 양종(禪敎兩宗)의 각 18개 사찰씩 36사만을 선정하여 3천 7백여 명의 승려만 인정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조선의 선교 양종 제도 시행 시에 서울의 중심 사찰은 선종사원 흥천사와 교종사원 흥덕사였다. 이밖에 인근에 승가사와 장의사가 36사에 들어 인정받았지만 봉은사나 그 전신인 견성사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연산군 대에 흥천사와 흥덕사가 폐지되고 선교 양종 제도도 무너졌다.

봉은사가 전국 수사찰의 위상으로 떠오른 것은 명종대 문정왕후와 보우스님의 활동에서부터이다. 이미 중종 때부터 봉은사는 중심 사찰로서 인식되고 있었다. 도성에서 선교 양종 도회소 역할을 하던 흥천사와 흥덕사가 폐지되었으니 도성 인근에서 규모와 위상이 큰 사찰로는 봉은사가 대신 부상하였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중종 때인 1539년(중종 34)에 대대적으로 사찰을 모두 철거하려는 정책을 추진하며 그 중심에 봉은사가 있으니, 이들을 그냥 두고서 다른 사찰을 철거하는 것으로는 승려를 근절시킬 수 없어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 상소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중종에 이어 명종이 즉위하고 어린 명종을 대신해서 섭정을 편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정책으로 조선 불교계는 일시 부활의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봉은사도 이 때 보우스님의 활동에 힘입어 수사찰의 지위를 확고히 하게 한다.

문정황후는 1550년(명종 5)에 선교 양종을 부활하여 봉은사를 그 본산으로 하도록 하고, 연산군대 이후 실시하지 않다가 1507년(중종 2)에 완전히 폐지했던 승려들의 과거인 승과(僧科)를 「경국대전」에 의거하여 다시 시행하도록 하였다.

선교 양종의 부활에 따라 양종 체제가 다시 기능을 되찾으면서 봉은사는 선종 수사찰(禪宗首寺刹)이 되어 교종의 수사찰인 봉선사와 함께 불교계를 이끌게 되었다. 이때부터 봉은사의 사격이 전국 으뜸을 자랑하게 된 것이다. 1551년(명종 6)에 특명으로 보우스님을 판선종사 도대선사(判禪宗事都大禪師) 봉은사 주지(奉恩寺住持)로 삼아 판교종사 도대사(判敎宗事都大師) 봉선사 주지(奉先寺住持)에 임명된 수진(守眞)스님과 더불어 명실 공히 선교 양종을 주도하도록 하였다. 정식 직함에 따라 보우스님의 활동을 제도적으로 보장해 준 것이다.

이듬해인 1552년에는 승과가 실시되어 선종에서 400인의 예비합격자를 낸 끝에 최종적으로 33명의 급제자를 선발하여 도첩제가 다시 시행되었다. 선종 수사찰 봉은사에서는 보우스님이 주도하는 선종 승과가 시행되어 봉은사 앞 들판은 승과평(僧科坪)이 되었다. 비록 규정대로 양종 각 30인의 급제자를 선발하지는 못했으나 휴정을 비롯한 승과 합격자를 배출함으로써 조선 사회에서 명분을 얻어 활발하게 역량을 펼칠 인재들을 배출해낸 것이었다. 이는 보우스님의 활동 터전이었던 봉은사가 당시 불교계 운영의 중심에 있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1555년(명종 10)에 개최된 두 번째 승과를 주관하고 나서 보우스님은 봉은사 주지직과 선종판사를 그만두고 청평사에 머물렀다. 보우스님은 이와 관련하여 자신의 심회를 시로 풀어냈는데, 수많은 시비 가운데 팔년 동안 한강변에 선교를 일으켰다는, 곧 봉은사에 선교 양종 체제를 재건하고 중흥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자부하며 때가 되면 오고 때가 되면 가는 것이 자신의 선의 이치이니 공연히 다른 생각 말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신료들의 빗발치는 반대 속에서 과감하게 추진했던 불교 재건의 의지를 느낄 수 있다.

그 대신 1552년에 승과에 급제했던 서산대사 휴정이 1555년 여름에 교종판사가 되었다가 가을에 선종판사가 되어 봉은사 주지를 맡았다. 그러나 1557년에 휴정은 봉은사 주지를 사직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수행에 전념하였다.

보우스님은 1560년(명종 15)에 5년 동안의 청평사 은거를 마치고 다시 봉은사 주지직을 맡았다. 그리고 1562년에 주선하여 시행한 승과에서는 사명대사 유정이 합격하였다. 그런데 이해 1562년 7월 보우스님은 도대선사 직위를 박탈당했다가 12월에 다시 직첩을 받는다.

1562년(명종 17) 9월에 선릉의 동쪽 기슭에 있던 옛 봉은사 터에 중종의 정릉(靖陵)이 천장되었다. 중종은 처음에 왕 장경왕후(章敬王后)가 묻힌 희릉(禧陵)에 나란히 묻혔었다. 그런데 문정대비는 자신이 나중에 돌아가면 중종의 곁에 함께 묻히고 싶은 생각에서 중종의 능을 봉은사 터로 옮기도록 하여 정릉이 이곳에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이 천릉에 따라 봉은사는 수도산의 지금의 위치에 대규모로 확장 이건 되었다. 왕릉 관련기록에서는 조정에서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당우와 요사를 창건하였기 때문에 이전보다 훨씬 웅장해져 경산제찰(京山諸刹)의 으뜸이 되었다고 한다. 이때 가람의 전모는 삼존을 봉안한 대웅보전, 관음도량의 중심인 관음전, 진여문, 식당, 12 위패를 봉안하던 어선루(御宣樓, 위패가 궁으로 옮겨간 다음에는 금속루金粟樓로 바꿔 부름), 천왕문, 해탈문, 명부전, 응향각(향로전), 나한전, 뒤에 1618년에 조성한 유초관(鍮哨罐)이 있던 심검당(승당), 운하당(선당), 강선전, 서산이 매화를 심었다는 매화당, 청심당, 수륙재 공양소인 향적전, 동별당 서행랑, 대남루, 병이 든 승려들의 입적소였던 열반당 등으로 이루어졌다.

1565년(명종 20)에 문정왕후가 갑자기 승하하였다. 그동안 회암사를 중창하고 무차대회를 진행하는 등 성대한 행사를 치르던 보우스님은 문정황후의 승하에 이어 탄핵을 받아 승직을 박탈당하고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곧바로 제주목사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이후 선교 양종과 승과가 차례로 폐지되었다. 보우스님과 문정황후의 노력으로 부활했던 조선 불교가 다시 조락의 시절로 접어든 것이다. 보우스님의 활동과 함께 조선불교의 중심으로 부상하여 성세를 보였던 봉은사의 형세와 위상 또한 침체의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비록 20년에 지나지 않는 기간이었지만 보우스님은 왕성한 활동을 바탕으로 장차 조선 후기 불교계를 이끌어나갈 인재를 배출하여 그 기반을 다진 중요한 역할을 해냈던 것이다.

조선후기 - 조선후기 전국의 중심도량

전국토가 유린되었던 1592년의 임란을 거치며 봉은사도 피해를 입었으나 절의 대체적인 모습은 유지되었다. 1612년(광해 4)에 광해군은 벽암각성(碧巖覺性, 1575-1660)을 봉은사 주지로 머물게 하고 판선교도총섭(判禪敎都摠攝)의 직위를 주었다. 벽암대사는 화엄사, 송광사를 비롯한 전국의 유수 사찰을 중창하고 승군을 이끌었던 당시 중심인물이었으므로 봉은사도 이때 피해 입은 당우의 중건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 시기에 벽암대사는 신익성을 비롯한 사대부들과 많이 사귀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봉은사가 도성에 가장 인접한 제일 대찰이었으므로 사대부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았고, 그런 만큼 봉은사의 형세는 유지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봉은사의 더 큰 피해는 병자호란 때 일어났다. 1636년의 병자호란으로 봉은사는 전소되어 몇 칸의 당우만을 남기고 퇴락한 것이다. 오랜 전란으로 전국토가 큰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피폐된 일반민들의 생업 경제가 되살아나기까지는 많은 시일이 필요하였다. 그렇지만 전란을 통해 사람들의 신앙은 더욱 깊어진 듯 전란이 끝나자마자 사원의 복구는 예상보다 빠르게 이루어졌다. 봉은사도 마찬가지였다.

봉은사에서는 이에 경림(敬林)을 중심으로 중창에 나서, 먼저 법당을 세우고 요사를 차례로 중건하여 이내 옛 형세를 다시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는 능침 사찰로서의 위상이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이후 도성에서 가깝고 한강변에 자리 잡아 풍광도 뛰어난 봉은사에는 여러 문사들이 찾아 많은 시를 남길 만큼 다시 성황을 보였다.

그러나 가람은 1665년(현종 6)에 다시 재앙을 만났고, 이를 보완하기 위한 중창불사도 이어졌다. 그래서 1692년(숙종 18)에 선릉과 정릉에 배알하러 왔던 숙종은 절 앞에서 가마를 멈추고 절의 중창 역사를 보고는 특별히 재물을 내려 역사를 마치도록 하였다. 이때는 명종 때의 웅장한 규모에 비해 다소 축소되어 나한전, 청심당 등 4개 당우는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이후에도 봉은사의 중창 중수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월저(月渚)대사 도안(道安, 1638-1715)은 법당 불상 조성 불사의 권선문을 썼다. 이는 불교계가 크게 휘말려들었던 숙종 기사년(1689)의 변고를 치르면서 훼손된 불상을 새롭게 모시려는 것으로서, 역대 인도와 중국의 왕공거사들의 보시행을 열거하며 단월들의 참여를 불러 모으고 있으니 1700년을 전후한 숙종 후반의 시기였다. 이 기사변란에 함께 피해를 입었던 범종을 새로 조성하기 위해 옛 종의 철근 1백 근과 화주해 모은 철 1백 근 그리고 사중의 깨진 그릇을 모은 1백 근에 장흥사(長興寺)의 기물을 깨서 얻은 철 1백5십 근을 합쳐 1720년에 450근짜리 범종을 주조하기도 하였다. 불사는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 어려움이 상당하였음을 말해주는 기록이다.

1765년(영조 41)에 봉은사 판사선생안(判事先生案)을 새로 정리한 영파성규(影波聖奎, 1728-1812)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기사란을 3대 재난으로 꼽고 그 난리 통에 잃어버린 명부를 고로와 제방 인사들의 전승을 모아 판사, 창건주, 승과 대덕 등의 명단을 다시 엮었음을 기록하였다. 이때 삼세여래의 개금불사도 이루어져 영파대사는 이에 증명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1777년(정조 원년)에는 삼장탱과 시왕탱 사자상 들을 조성하고 여래삼존 중의 석가와 미타를 개금하였다.

1790년(정조 14)에 봉은사는 전국의 불교를 관장하는 5 규정소(糾正所)의 하나로 꼽혔다. 봉은사와 함께 봉선사, 남한산성의 개운사, 북한산성의 중흥사 그리고 정조가 특별히 중창에 힘쓴 융릉 원찰 용주사가 그것이었다. 봉은 봉선 양사는 선교 양종의 도회소였고 남북한산성과 용주사의 중요성이 부가되어 생긴 제도였다. 이때 봉은사는 강원도 사찰을 관할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규정은 용주의 위상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고려할 때, 봉은사의 선종 수사찰로서의 역할은 18세기에도 지속적으로 유지되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이 시기 봉은사의 운영은 그다지 원활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 말년인 1799년(정조 23)에 작성된 문서는 선릉과 정릉의 능침 원당인 봉은사의 경제적 배경이 왕실에서 내려준 80결의 토지와 2백인의 노비였는데, 그 운영이 어려워 관리에서 누락되었던 토지 등을 제대로 찾아주도록 하는 지경에 이르렀던 한 실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조선 말기 봉은사의 역량 있는 위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가 1856년의 화엄경 80권 판각 불사의 회향이다. 당대의 화엄 강백이었던 남호영기(南湖永奇, 1820-1872)대사는 조선 교학의 중추이던 화엄경판을 판각하기 위해 인허성유(印虛性維), 제월보성(霽月寶性), 쌍월성활(雙月性闊) 등과 뜻을 모아 1855년(철종 6)에 봉은사에 간경소를 차리고 왕실의 내탕금과 중신들의 시주를 모았다. 이를 바탕으로 1년 동안에 걸쳐 화엄경 양본을 대조하고 후학들을 위해 그 교감기를 붙인 화엄경(華嚴經) 80권 등의 불서를 1856년(철종 7)에 간행하고 이들 3,479판에 이르는 경판을 보관할 판전(板殿)을 지었다. 이때 봉은사에서 화엄경 80권 이외에도 별행록 1권과 준제천수 및 천태삼은시집도 함께 간행하였고, 지금 판전에 남아 있는 경판이 금강경, 유마경, 언해아미타경, 초발심자경문, 승가일용, 고왕경, 석가여래유적도, 금강경탑다라니 등 다양한 분야에 이르는 것을 볼 때 선종수사찰 봉은사의 교학적 관심과 역량이 매우 폭넓고 수준 높은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봉은사가 조선 말기 교학의 중심이었음을 확인해 주는 이 화엄경 판각 불사는 영허선영(暎虛善影, 1792-1880)과 혼허지조(混虛智照) 등을 증명으로 삼고 영기대사를 도화주로 주선자들을 비롯한 수십 명이 화주가 되어 왕과 왕비 및 3 대비 그리고 부원군 홍재능, 훈련대장 김병익, 경기감사 이원명, 경상감사 신석우를 비롯한 수많은 신남신녀와 비구 비구니들의 정성을 모아 이룩된 것이었다. 여기에 당시 봉은사에서 수행하던 당대 명필 김정희가 판전 현판을 써 걸었다. 이 화엄경 간행 불사에 초의의순(草衣意恂, 1786-1866)이 증명으로 참여하였다.

남호대사는 일찍이 삼각산 내원암에서 아미타경을 간행한 이래 흥국사에서는 연종보감 등을 간행하고, 봉은사에 이어서 철원 석대암에서는 지장경 등을 간행하고 해인사 대장경을 인경하여 오대산 보궁과 오세암에 봉안하는 등 경전 간행과 보급에 진력한 인물이었다.

북학을 마무리 지은 대학자이자 첫손꼽는 명필이었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만년에 불문에 귀의하여 이곳 봉은사에서 보내면서 매일 연비를 하는 자화참회(刺火懺悔) 등을 실천 수행하였다. 이는 마침 1856년에 추사를 만나기 위해 봉은사를 찾은 문사들을 따라갔던 상유현(尙有鉉)이 「추사방현기(秋史訪見記)」에서 자신이 직접 본 이런 사실을 기록으로 남김으로서 알려졌다.

성리학 중심의 사상 전통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대사조를 수용하고 경학과 금석학에 정통하여 북학의 정수를 대성한 김정희는 집안 대대로 불교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이는 조선 후기 사대부 집안의 불교 인식과 신앙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실이다. 김정희는 금강경을 소중히 여겨 가지고 다니기도 하였고 염주를 매우 애용하기도 하였다. 인도 여러 지역의 고증을 위주로 한 「천축고」를 비롯한 불교에 관한 글을 남겼는데 제불전을 섭렵한 김정희의 불교 인식은 정확한 것이었다. 특히 당대의 대종사 백파긍선(白坡亘璇, 1767-1852)대사와 치열한 변론을 전개할 만큼 깊은 이해를 보여주었다. 당대 제일의 선장(禪匠) 백파는 전통선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사대부의 불교 이해를 비판하였고, 김정희는 당시 선가의 병폐가 간화선에 대한 집착에 있음을 역설하며 기본 출발에서부터 새로이 시작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김정희는 초의(草衣)선사와 오랫동안 친교를 맺기도 하였다. 초의는 김정희 뿐만 아니라 정약용, 홍현주, 신위, 김유근 등 당대의 명사들과 폭넓은 교유를 가지며 차(茶)를 비롯한 일상생활의 다방면에 두루 능통한 면모를 보였다.

김정희가 북청에 귀양 갔다가 돌아온 이후에 관계에 눈을 돌리지 않고 주로 과천의 향저인 과지초당에서 서화와 심성 연마로 지내며 그 시절에 봉은사에 자주 왕래하였고, 여기에는 초의를 매개로 한 연계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김정희 자신은 해붕전령(海鵬展翎, ?-1826)이나 아암혜장(兒庵惠藏, 1772-1811) 등 여러 승려들과 교유를 갖기도 하였다.

지금도 판전에 그대로 걸려 있는 현판 글씨는 추사가 돌아가기 한 달 전에 쓴 것이다. 이 ‘판전’ 글씨는 추사의 절필(絶筆)로서 대학자이자 서예가 만년의 불교적 심성이 명필의 붓 끝에서 약동하는 걸작으로서 조선 말기 불교와 유학의 원융한 만남을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하다.

근현대 - 선종갑찰대본산과 자비행의 포교도량

전통 불교의 명맥을 되살려 새로운 지향을 시도하면서 조선 불교계는 일제의 침략 기도를 뿌리쳐야 하는 과제도 안게 되었다. 1895년 승려의 도성 출입금지 조치가 해제되고 지방 사원의 포교당이 서울에 늘어나면서 도심 포교도 새롭게 모습을 보였다. 도심에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던 봉은사는 여러 차례의 불사를 통해 짜임새 있는 사원 형세를 정비해 나갔다. 1886년에 대형 괘불을 비롯하여 판전의 후불탱과 북극보전의 칠성탱 불사가 이루어졌고, 1892년에는 대웅전 삼불회도와 감로탱이 이루어졌으며 1895년에는 영산전의 후불탱과 신중탱, 16나한을 4폭에 나누어 그린 나한탱 등 일련의 영산전 불사가 이루어졌다.

이 불사를 맡았던 화사들은 경선응석(慶船應釋)을 비롯하여 영명천기(影明天機), 보운긍엽(寶雲亘葉), 한봉창엽(漢峰曄), 혜산축연(蕙山竺衍), 예운상규(禮云尙奎) 등 명가들이었는데, 단월로 상궁들이 많이 보이는 것이 특색이다.

일제에 의해 국권을 침탈당한 이후 일제는 1911년에 사찰령을 반포하여 30 본산제에 따라 조선불교를 일제의 장악 하에 두고자 했다. 이에 따라 봉은사는 경기도 선종 대본산이 되어 서울을 비롯한 광주, 고양, 양주, 시흥, 수원, 여주, 이천, 양평, 파주 등 8군 78개 말사를 관할하게 되었다.

봉은사는 30 본산에서 첫 번째로 꼽힌 사찰이 되어 이름을 선종갑찰대본산봉은사(禪宗甲刹大本山奉恩寺)라고 내세우고 서산대사의 법손이 주지하도록 하는 봉은사본말사법을 인가받아 시행하였다. 이 인가 사승(寺乘)에서 봉은사는 실질적인 창건을 명종 대 보우의 활동에서 시작하여 서산-사명-벽암으로 계승되는 법맥을 강조하였다. 이때 봉은사의 당우는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대향각, 판전, 선원, 영산전, 심검당, 명부전, 운하당, 산신각, 관응당, 천왕전, 강선전, 독성각으로 이루어졌다.

제도가 바뀐 이후 1912년에 첫 주지로 취임한 나청호학밀(羅晴湖學密, 1875-1934) 강백은 사원의 토지를 확보하고 포교와 사회봉사 활동에 앞장서 새로운 흐름을 이끌고자 하였다. 본래 오대산에서 강학에 열중하던 청호화상은 일제 불교의 침투에 대응하여 전통 불교를 수호하려는 원종 종무원에 감사부장으로 참여하며 각황사에서 포교에 나서기도 하였다. 1912년에 봉은사 주지로 초빙된 청호화상은 세간에 나서는 실천행을 제창하여 절 부근의 황무지를 개간, 20만평에 이르는 막대한 토지를 확보하고 사원을 중창하여 30 본산 갑찰의 형세를 가꾸었다.

특히 을축년(1925) 7월 한강을 덮친 대홍수 때 청호화상의 활동은 빛났다.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대홍수로 한강이 넘쳐 집과 논밭이 떠내려가고 셀 수 없는 사람들이 강물에 떠내려갔다. 청호화상은 사중을 불러 모아 배를 띄우고 물에 뛰어들어 사람을 하나씩 건져냈다. 이렇게 구한 인명이 무려 708인이었다. 그리고는 사중의 재물을 모두 풀어 이재민을 구호하였다. 당시 봉은사의 조실로는 뛰어난 선사 한암중원(漢巖重遠, 1876-1951)이었다. 출세간의 경지를 걸었던 조실의 상황에 적절하게 구사된 법력과 주지의 세간에 다가간 손길이 잘 조화를 이루어 만들어낸 쾌거였다. 경향의 칭송을 한 몸에 모은 주지 청호화상을 기려 도움을 받았던 광주와 고양의 선리, 부리, 잠실리, 신장리 주민들의 주선으로 수해구제공덕비가 세워지고, 당시의 지도층 인사들이 이를 기리는 시화를 모아 불괴비첩(不壞碑帖)을 만들어 이 장한 뜻을 기렸다. 가장 필요한 도움을 어려울 때 행동으로 보여준 진정한 보살행의 실천이었다.

서울 갑찰의 본산이었던 봉은사는 도심 포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1922년의 마포 포교당을 시작으로 1924년에 안변, 1926년에 인천, 1932년에 서울 관동, 1933년에 서울 현저동, 1934년에 서울 옥천동 등 모두 6개의 포교당을 개설하여 적극적인 포교 활동에 나섰다. 도심에 가장 인접한 봉은사가 나가야 할 마땅한 방향이었다. 본사와 포교당 간의 원활한 교류를 통해 보다 가까이 다가가는 포교의 마당에 봉은사의 역량이 미친 것이다.

사원 운영에도 남달랐던 청호화상은 퇴락한 전각들을 차례로 중수하여 절의 형세를 정비하였으나 1939년에 화재를 만나 판전을 제외한 건물들은 모두 전소되고 말았다. 그래서 현재 남은 당우는 1941년에 태욱(泰旭)이 중창한 것이다.

광복 후 봉은사는 조계종 총무원 직할사찰이 되었다. 그러나 1950년의 전란으로 당우 대부분이 소실되고 말았다. 그래서 전란이 끝나고 부분적인 중창불사가 이루어져 지속적인 발전을 보였다. 그리고 1960년대 정화를 겪으면서 통합종단 조계종이 출범하고 봉은사도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다.

1964년에는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의 수련도량으로 대학생 수도원이 봉은사에 건립되어 영명한 젊은이들이 이곳에 모여 정진을 거듭하였고, 이들은 다수가 현재 한국 불교계 또는 사회 지도층 인사가 되어 이 시대를 이끌어 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1972년에는 동국역경원이 설치되어 대장경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전당이 되었다.

현재 대웅전을 비롯하여 선불당, 명부전, 영산전, 북극보전, 판전, 충령각, 운하당, 선원, 심검당, 법왕루, 보우당, 진여문 등의 당우가 미륵대불과 함께 경역을 이루며 대중적 포교활동과 사회복지를 실현하는 도심 대찰의 위상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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