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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5교구 통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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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Tongdosa-ro, Habuk-myeon, Yangsan-si, Gyeongsangnam-do

전통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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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창건의 기본정신은 부처님 사리(舍利)를 봉안한 금강계단(金剛戒壇)에 있다. 이 계단은 통도사의 정신적인 근거가 되기도 하며 창사후 가장 중요한 기록을 마련하고 있다. 그래서 통도사 역사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자료들은 어느 것이나 통도사의 변화에 대해 기술하기보다는 바로 금강계단의 변천과 그역사를 강조하기 때문에 통도사 창건은 금강계단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다고 하겠다.








































 


646년(선덕여왕 15)에 자장율사가 창건하였다. 산 이름을 영축산이라 한 것은 산의 모양이 인도의 영축산과 모양이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하나, 그 옛 이름은 축서산이라 하였다. 절 이름을 통도사라 한 까닭은 ① 전국의 승려는 모두 이곳의 금강계단에서 득도한다는 뜻. ② 만법을 통달하여 일체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 ③ 산형이 인도의 영축산과 통한다는 뜻이 있다. 창건주 자장율사가 당나라로부터 643년에 귀국할 때 가지고 온 불사리와가사, 그리고 대장경 400여 함을 봉안하고 창건함으로써 초창 당시부터 매우 중요한 사찰로 부각되었다. 특히 불사리와 가사뿐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대장경을 봉안한 사찰이 되기 때문이다. 이같은 역사 기록은 통도사의 사격을 단적으로 설명하여주는 매우 중요한 기록임에 틀림 없다. 그리고 이 절을 창건한 자장율사는 계단을 쌓고 사방에서 오는 사람들을 받아 득도시켰다. 이에 통도사는 신라 불교의 계율 근본도량이 되었 으나, 창건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대찰이 아니고 후에 금강계단이라고 불려진 계단을 중심으로 몇몇 법당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그 뒤 고려초에는 사세가 더욱 확장되어 절을 중심으로 사지석표, 즉 국장생석표를 둘 만큼 대규모로 증축되었다. 특히 현존하는 중요 석조물이 고려 초기, 선종대에 조성되었으므로, 가람의 정비는 이때 중점적으로 이룩되 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 당시의 중요한 석조 조형으로는 금강계단 상부의 석종형부도를 비롯하여 극락전 앞의 삼층석탑, 배례석, 봉발대, 그리고 국장생석표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고려시대에 속하는 유물이고 그밖 에 현존하는 목조건물들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에 건립되었다. 물론 조형상으로 가장 앞서는 석조물로는 영산전에서 마주 보이는 남산 위의 폐탑재를 들 수 있으나, 이는 이미 파괴된 채 기단부의 사리공만이 주목되고 있다. 이 석탑이 어떻게 하여 파괴되었는지 또는 최초에 건립된 사원과 어떤 연관을 가지는 것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통도사의 가람배치는 신라 이래의 전통법식에서 벗어나 냇물을 따라 동서로 길게 향하였는데, 서쪽에서부 터 가람의 중심이 되는 상로전과 중로전ㆍ하로전으로 이어진다. 또, 그 서쪽 끝에 보광선원이 위치하고 있다.

본래 이 절터에는 큰 못이 있었고 이 못에는 아홉마리 용이 살고 있었으나 창건주 자장율사가 이들을 제도하고, 한마리 용을 이곳에 남겨 사찰을 수호하게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현재도 금강계단 옆에는 구룡신지의 자그만 한 상징적 못을 두고 있다. 먼저 동쪽에서부터 일주문ㆍ천왕문ㆍ불이문의 세 문을 통과하면 금강계단에 이르게 된다. 금강계단 앞의 목조건물인 대웅전(보물 제144호)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45년(인조 23) 우운이 중 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 상부의 기본 형태는 J자형의 특이한 구조를 나타내고 있으며, 그 정면격인 남쪽에는 금강계단, 동쪽은 대웅전, 서쪽은 대방광전, 북쪽은 적멸보궁의 편액이 걸려 있다. 그러므로 이 건물을 현 칭 대웅전이라고 하지만 남쪽 정면의 금강계단이 그 정전이라 할 수 있다. 즉, 이 건물의 바로 뒤쪽에는 통도사의 중심이 되는 금강계단 불사리탑이 위치한다. 이는 자장율사가 당으로부터 가지고 온 불사리를 세 곳에 나누어 황룡사탑ㆍ태와사탑, 그리고 통도사 계단에 봉안하였다고 하는 바로 불사리 계단이다.

본래 이 절터에는 큰 못이 있었고 이 못에는 아홉마리 용이 살고 있었으나 창건주 자장율사가 이들을 제도하고, 한마리 용을 이곳에 남겨 사찰을 수호하게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현재도 금강계단 옆에는 구룡신지의 자그만 한 상징적 못을 두고 있다. 먼저 동쪽에서부터 일주문ㆍ천왕문ㆍ불이문의 세 문을 통과하면 금강계단에 이르게 된다. 금강계단 앞의 목조건물인 대웅전(보물 제144호)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45년(인조 23) 우운이 중 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 상부의 기본 형태는 J자형의 특이한 구조를 나타내고 있으며, 그 정면격인 남쪽에는 금강계단, 동쪽은 대웅전, 서쪽은 대방광전, 북쪽은 적멸보궁의 편액이 걸려 있다. 그러므로 이 건물을 현 칭 대웅전이라고 하지만 남쪽 정면의 금강계단이 그 정전이라 할 수 있다. 즉, 이 건물의 바로 뒤쪽에는 통도사의 중심이 되는 금강계단 불사리탑이 위치한다. 이는 자장율사가 당으로부터 가지고 온 불사리를 세 곳에 나누어 황룡사탑ㆍ태와사탑, 그리고 통도사 계단에 봉안하였다고 하는 바로 불사리 계단이다.

그리고 1757년에 건립한 응향각, 도서실인 명월료와 금당을 위시하여 종무소 건물들이 즐비하다. 또, 절의 세 문 가운데 일주문은 1305년(충렬왕 31)에 창건되었으며, 현존하는 현판은 대원군의 필적이며, 기둥 좌우의 ‘佛之宗家 國之大刹’은 김규진의 글씨이다. 천왕문은 사천왕을 봉안한 문으로서 사찰수호 기능을 담당하는 곳으로 목조 사천왕이 각기 특징적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불이문은 1305년의 초창이며, 편액 ‘不二門’은 송나라 미불의 필적이다. 건물은 매우 단조로우며, 중앙에는 대들보 대신 코끼리와 호랑이가 서로 머리를 받쳐 지붕의 하중을 유지하는 건물이다. 사찰 경내의 현존하는 석조물로서는 역시 금강계단이 가장 중요하다. 통도사 창건의 이유가 바로 이 계단에 있기 때문이다. 신라 선덕여왕 12년에 불사리 계단이 축조된 이래 특히 고려시대에 와서는 이 계단에 얽힌 수많은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즉,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계단의 석종을 들어보려는 일이 잦 았으므로 이를 막기 위하여 석함 속에는 긴 구렁이 또는 큰 두꺼비가 있었다고 하는 기록 등이 남아 있다. 그러나 1235년(고종 22) 상장군 김이생과 시랑 유석에 의하여 계단의 석종이 들려졌다. “큰 일에 상장군 김공 이생과 유시랑 석이 고종의 명을 받아 강동을 지휘할 때 부절을 가지고 절에 와서 돌뚜껑을 들어 예하고자 하니, 승이 그전의 일을 들면서 어렵다고 하였다. 김이생과 유석이 군사를 시켜 굳이 돌뚜껑을 들게 하였다.

서로 돌려보면 예경하였는데 통이 조금 상해서 금간 곳이 있었다. 이에 유공이 수정함 하나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마침 기부하여 함께 간수하여두게 하고 그 사실을 기록하였으니 그때는 강화로 서울을 옮긴 지 4년째인 을미 년(1235)이었다.” 이와같은 기록이 문헌상으로는 계단에 손을 댄 최초의 기록이다. 그러다가 1379년(우왕 5) 고려말의 국세가 약해진 틈을 타서 빈번히 왜구들이 침입하여 이 계단은 일대 수난을 겪는다. 즉, 이색의 <양주통도사석가여래사리기>에 의하면 통도사의 주지 월송이 왜구들의 침입을 피하여 1379년 8월 24일 석가여래의 사리ㆍ가사 등을 가지고 서울의 평리 이득분을 만난 일이 있었다. 임진왜란의 발발과 함께 영남지방이 왜구의 수중에 들자 의승장 유정은 통도사의 사리를 대소 2함에 나누어 금강산에 있던 휴정에게 보냈다. 이에 휴정은 “영남이 침해를 당하고 있으니 이곳 역시 안전한 장소는 못된다. 영축산은 뛰어난 장소이고 문수보살이 명한 곳이다. 계를 지키지 않는 자라면 그에게는 오직 금과 보배만이 관심의 대상일 것이고 신보가 목적이 아닐 것이니, 옛날 계단을 수리하여 안치하라.”고 하였다. 이에 1함은 돌려보내고 나머지 1함은 태백산 갈반지에 안 치하였다. 그뒤 1603년(선조 36) 계단을 다시 복구하였으며, 1652년(효종 3) 정인이, 1705년에는 성능이 중수하였으며, 그 뒤에도 영조ㆍ순조ㆍ헌종ㆍ고종대에 이르는 누차의 중수와 1919년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계단의 크기는 초층 너비 약 990cm, 총높이 약 300cm이며, 형태는 2중의 넓은 방단 위에 석종의 부도를 안치한 지극히 간단한 구조이다. 석단 네 귀퉁이에는 사천왕입상을 배치하였고, 기단 상하 면석에는 비천상과 불보살 상을 배치하였다. 석단외곽에는 석조 난간을 돌렸고, 계단 정면에는 석문을 두었으나 모두 후기의 작이다. 계단의 초층 면석에는 총 32구의 불보살상을 나타냈으나 모두 도상적 경직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상층 기단 면석의 불보살 및 비천상의 양식은 유연한 수법이 하층보다는 월등하다. 계단의 상층 중심부에 위치한 석종부도는 복련과 앙련의 상하 연화대 위에 위치하며, 그 조각수법이 다른 조각과는 달리 매우 우수하다. 동서좌우에는 유연한 비천상을 부조로 나타냈고 정면인 남쪽에는 구름 속에 보합의 향로를 조각하였다.

대체로 통도사의 석조물은 고려 선종대를 전후하여 집중적을 조성되었다. 그 대표적 조형으로는 극락전 앞의 배례석ㆍ삼층석탑, 그리고 사지경계인 국장생석표 등이다. 먼저 배례석이란 국왕배례지석이라는 상징적 조형물 로서 신라 사찰에서도 자주 볼 수 있으나 이곳 배례석은 1085년(선종 2)에 조성되었다. 길이 175cm, 너비 87cm의 판석으로 3절되었으며, 상면에는 아름다운 연화문과 운문으로 조각되었다. 현재의 명문은 ‘太康王一年乙 丑二月日造’라고 되어 있으나 이는 ‘太康十一年乙丑二月日造’의 위각이고 또 중간의 판석(길이 35cm, 너비 87cm)도 후에 보충된 것임이 최근 판명되었다. 이와함께 배례석 바로 옆에 있는 삼층석탑 역시 신라 말기적 양 식을 지니고 있으나 이 시대 선종대의 조성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2중기단 위에 3층의 석탑으로서 전체적인 수법은 간략하게 조성되었으나 기단에 나타난 안상 등 장식화된 수법은 고려의 석탑으로 볼 수 있는 유 력한 근거가 된다. 그리고 통도사에서 약 2km 거리의 양산군 하북면 백록리의 국장생석표(보물 제74호) 역시 고려 선종대의 사찰 경계로 알려져 있다. 이와 동일한 명문을 지닌 장생석표가 울산군 삼남면 상천리에서 근래 발견되었으나 상부가 단절되었다.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에 의하면 이와같은 표지는 절을 중심으로 사방에 12장생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이들의 형태는 목방ㆍ석비ㆍ석적장생 등으로 분류된다. 현재까지 확인된 것은 석비장생뿐이며, 이들은 고려시대 이두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주는 금석문이다.

계단의 크기는 초층 너비 약 990cm, 총높이 약 300cm이며, 형태는 2중의 넓은 방단 위에 석종의 부도를 안치한 지극히 간단한 구조이다. 석단 네 귀퉁이에는 사천왕입상을 배치하였고, 기단 상하 면석에는 비천상과 불보살 상을 배치하였다. 석단외곽에는 석조 난간을 돌렸고, 계단 정면에는 석문을 두었으나 모두 후기의 작이다. 계단의 초층 면석에는 총 32구의 불보살상을 나타냈으나 모두 도상적 경직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상층 기단 면석의 불보살 및 비천상의 양식은 유연한 수법이 하층보다는 월등하다. 계단의 상층 중심부에 위치한 석종부도는 복련과 앙련의 상하 연화대 위에 위치하며, 그 조각수법이 다른 조각과는 달리 매우 우수하다. 동서좌우에는 유연한 비천상을 부조로 나타냈고 정면인 남쪽에는 구름 속에 보합의 향로를 조각하였다. 대체로 통도사의 석조물은 고려 선종대를 전후하여 집중적을 조성되었다. 그 대표적 조형으로는 극락전 앞의 배례석ㆍ삼층석탑, 그리고 사지경계인 국장생석표 등이다.

먼저 배례석이란 국왕배례지석이라는 상징적 조형물로서 신라 사찰에서도 자주 볼 수 있으나 이곳 배례석은 1085년(선종 2)에 조성되었다. 길이 175cm, 너비 87cm의 판석으로 3절되었으며, 상면에는 아름다운 연화문과 운문으로 조각되었다. 현재의 명문은 ‘太康王一年乙丑二月日造’라고 되어 있으나 이는 ‘太康十一年乙丑二月日造’의 위각이고 또 중간의 판석(길이 35cm, 너비 87cm)도 후에 보충된 것임이 최근 판명되었다. 이와함께 배례석 바로 옆에 있는 삼층석탑 역시 신라 말기적 양식을 지니고 있으나 이 시대 선종대의 조성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2중기단 위에 3층의 석탑으로서 전체적인 수법은 간략하게 조성되었으나 기단에 나타난 안 상 등 장식화된 수법은 고려의 석탑으로 볼 수 있는 유력한 근거가 된다. 그리고 통도사에서 약 2km 거리의 양산군 하북면 백록리의 국장생석표(보물 제74호) 역시 고려 선종대의 사찰 경계로 알려져 있다. 이와 동일한 명문 을 지닌 장생석표가 울산군 삼남면 상천리에서 근래 발견되었으나 상부가 단절되었다.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에 의하면 이와같은 표지는 절을 중심으로 사방에 12장생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이들의 형태는 목방ㆍ석비 ㆍ석적장생 등으로 분류된다. 현재까지 확인된 것은 석비장생뿐이며, 이들은 고려시대 이두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주는 금석문이다.

그밖에 이 절에 현존하는 중요 유물로는 보물 제334호인 통도사은입사동제향로, 보물 제471호인 통도사봉발탑을 비롯하여, 전석가여래가사ㆍ전자장율사가사ㆍ고려감지금니화엄경ㆍ고려은입사동제향로ㆍ동판천문도ㆍ 청개와ㆍ감로병ㆍ육환철장ㆍ동자상ㆍ동탑ㆍ화엄만다라ㆍ육각요령ㆍ금자법화경ㆍ금자병풍ㆍ구룡병풍ㆍ삼장서행노정기 등이 있다. 산내 암자로는 극락암ㆍ비로암ㆍ자장암ㆍ백운암ㆍ축서암ㆍ취운암ㆍ수도암ㆍ사명 암ㆍ옥련암ㆍ보타암ㆍ백련암ㆍ안양암ㆍ서운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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