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도사 금강계단 > 경상남도 Gyeongsangnam-do, 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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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계단]  통도사 금강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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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X : 055-382-7196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통도사로 108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산 83-1

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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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계단(金剛戒壇)

영축총림 통도사는 646년(신라 선덕여왕 15)에 자장율사(慈藏律師)에 의해 창건되었다. 통도사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의 정골(頂骨)과 지절(指節), 치아사리(齒牙舍利), 금란가사(金襴袈裟)가 봉안되어 있어 불지종가(佛之宗家)이자 국내에서 가장 큰 가람으로서 국지대찰(國之大刹)의 사격(寺格)을 지닌 사찰이라 할 수 있다.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通度寺舍利袈裟事蹟略錄)』에 보면 원래 통도사가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아름다운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을 메운 후 그곳에 금강계단을 쌓고 통도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또한 창건주인 자장율사에 대한 기록인 『삼국유사(三國遺事)』 「자장정률(慈藏定律)」의 기록에 의하면 스님이 643년(선덕여왕 12)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지고 온 불사리(佛舍利), 금란가사, 대장경 400여 함을 봉안하고 창건하였다고 한다. 창건 당시의 가람은 자장율사가 쌓은 금강계단을 중심으로 몇 동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 뒤 고려시대인 1085년(고려 선종 2) 통도사의 경내임을 나타낸 사지석표(四至石標), 즉 국장생석표(國長生石標)를 세울 만큼 사세가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1235년(고종 22)에 상장군(上將軍) 김리생(金利生)과 시랑(侍郞) 유석(庾碩)이 고종의 명을 받아 낙동강 동쪽을 지휘하던 차에 절에 와서 계단의 석종을 들어내고 석함 속의 사리를 예경했다고 한다. 이때 돌함 속에 있는 유리통 하나가 금이 가서 유석이 마침 가지고 있던 수정통을 기부하여 거기에 사리를 보관했다고 하는데, 이 기록은 문헌상으로 볼 때 사리에 손을 댄 최초의 예로 보인다.

계단(戒壇)이란 계(戒)를 수여하는 의식이 행해지는 장소로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 누지보살(樓至菩薩)이 비구들의 수계의식을 집행할 것을 청하자 석가모니 부처님이 허락하여 기원 정사의 동남쪽에 단(壇)을 세우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 통도사 창건의 근본정신은 바로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금강계단에 있다. 통도사가 신라의 계율근본도량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금강계단에서 계를 받는 것이 곧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계를 받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었다.

본래 통도사의 절터는 큰 연못이 있었고, 그 연못에는 아홉 마리 용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자장율사는 이들 용을 교화하여 여덟 마리를 승천(昇天)하게 하고 그 연못을 메워 금강계단을 쌓아 통도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창건 이후 금강계단은 그 안에 안치된 사리를 친견하고자 열망하는 많은 사람들의 참배가 이어졌다. 이러한 사실은 사리의 영험담과 함께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특히 고려시대에 이르러 왕실과 사신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사리를 친견하였을 뿐만 아니라, 몽고의 황실에서도 금강계단을 참배하는 등 참배객이 끊이지 않는 성(聖) 스러운 장소로 여겨져 왔다.

고려 말에서 조신시대에 걸쳐 왜구들에 의한 사리 약탈기도가 여러 차례 자행되었는데 이때는 개성 송림사 · 서울 흥천사 · 금강산 등지로 옮겨 다니며 난을 피하는 등 사리를 보호하기 위한 스님들의 목숨을 건 노력이 이어졌다.

현존하는 금강계단은 창건 이후 수차례 걸쳐 중수되었기 때문에 창건 당시의 정확한 구조는 알 수 없다. 다만『삼국유사(三國遺事)』의 ‘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에 2층으로 위층가운데는 마치 가마솥을 엎어 놓은 것과 같다’는 기록을 통해 그 형태가 현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계단의 모습은 2중 사각기단 위에 종 모양의 부도(浮屠)가 놓인 석조계단의 일반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계단의 사방에는 불좌상(佛座像)을 비롯하여 천인상(天人像), 신장상(神將像) 등 다양한 조각이 새겨져 있는데 이들은 고려와 조선시대의 중수 과정에서 새롭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금강계단 주변에 는 층계의 소맷돌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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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계단 참배안내
금강계단에는 부처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기에 통도사 대웅전에는 불상이 모셔져 있지 않으니 대웅전 참배 시에는 이 점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금강계단에서는 합장한 상태에서 묵언하며 느린 걸음으로 오른쪽(시계방향)으로 탑돌이를 3번 합니다.
금강계단 입장가능시간은 아래와 같이 제한되어 있사오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입장가능일자 안내    매월 음력 초하루 ~ 초삼일 (음 1일 ~ 3일)
매월 음력 보름(음 15일)
매월 지장재일(음 18일)
매월 관음재일(음 24일)
참배가능시간 : 오전 11시 ~ 오후 2시까지(우천 시에는 개방하지 않습니다.

가람의 형태

통도사는 해발 1,050m의 영축산 상봉으로부터 흘러내린 봉우리들이 남쪽으로 이어져 오다가 금강계단에 이르러 멈추어서 명당을 만들어 주고 동으로 내려가면서 다시 한번 크게 몸을 일으켜서 문필봉(文筆峰)을 세워 놓고 산문입구 여의주봉에서 그 기운을 갈무리 하고 있다. 또하나의 지맥은 정상에서 흘러내리며 금강계단을 에워싸며 멀리 휘감아 돌아 나가면서 산문 여의주봉에서 두 지맥이 서로 만나고 있다. 풍수지리상으로 쌍룡농주형(雙龍弄珠形)이라한다. 이곳에서부터 산문을 들어서면 계곡을 따라 겹겹이 우거진 소나무 숲을 지나, 숲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조금 걷다보면 두 갈래 길이 나온다. 직진을 하면 주차장과 산내암자로 들어가는 길이고, 산모퉁이를 따라 오른쪽으로 돌면 경내로 들어가는 길이다. 산모퉁이를 돌아서면 오른쪽에 부도전이 자리하고 있다. 부도전에는 역대 통도사에 머물렀던 큰스님들의 부도와 탑비가 봉안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개산대재일(음, 9월 9일)에 이곳 부도전에 모셔진 스님들께 부도헌다를 올리고 있다. 부도전을 지나면 바로 정면 3칸 규모의 새로 세운 해탈문을 만나게 된다. 이곳 현판에는 ‘靈鷲叢林(영축총림)’이란 적혀있다. 보통 총림문이라 불리운다. 이 총림문을 지나 조금 더 가면 오른쪽으로 웅장한 청기와 건물이 위용을 드러내는데, 이곳은 통도사에 전래되는 유물들을 전시하고 연구하는 성보박물관이다. 곧이어 ‘영축산통도사’라는 편액이 걸려있는 일주문을 만나게 되는데,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통도사 경내가 시작된다. 동쪽에서 진입하는 형식인 통도사는 큰 사찰답게 건물이 많은데, 전체적으로 남향을 했으면서도 지형 때문인 듯 가람배치가 동서로 길게 이루어져 있다. 또한 가람의 배치는 법당을 중심으로 세 지역으로 나누어 상로전ㆍ중로전ㆍ하로전이라 부르고 있는데, 노전이 3개라는 것은 통도사가 3개의 가람이 합해진 복합사찰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상로전 구역에는 금강계단을 중심으로 응진전ㆍ명부전ㆍ삼성각ㆍ산령각을 배치하고, 중로전 구역에는 대광명전을 위시하여 자장스님의 진영을 모신 해장보각. 용화전ㆍ관음전이 자리 잡고 있다. 하로전 구역은 영산전을 중심으로 극락보전ㆍ약사전ㆍ가람각ㆍ범종루 등이 있는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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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액 : 적멸보궁(寂滅寶宮)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시고 있는 사리탑(舍利塔)쪽에 걸려있는 편액에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고 쓰여 있다. 이 편액에는 용이 두 마리가 장식되어 있고, ‘해동사문 천보(天輔)서’라는 관지(款識)와 나뭇잎 모양의 두인(頭印)과 ‘축산(鷲山)’ ‘김구하인(金九河印)’이라는 도서(圖署) 2과가 있는 것으로 보아 통도사에 주석하셨던 천보구하(天輔九河)스님의 선필(禪筆)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아래 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의 글씨는 구한말의 서화가인 백운거사(白雲居士)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1863~1933)의 글씨이다. 해강 김규진은 구한말의 뛰어난 서예가로, 통도사에 그의 글씨가 많이 있는데, 그 중 일주문의 기둥에 ‘국지대찰(國之大刹) 불지종가(佛之宗家)’라는 글씨도 해강의 글씨이다.

‘적멸보궁(寂滅寶宮)’이란 말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는 사찰을 말하는데, 먼저 적멸(寂滅)이라는 말은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경계(境界)를 표현한 말로서, 범어(梵語) 열반(涅槃 nirvana)을 번역한 말이다. 그리고 보궁(寶宮)이란 불상을 모시고 있는 집을 전(殿)이나 각(閣)이라 표현하는데 대하여 좀 더 상위개념으로 ‘궁(宮)’이라 사용한 것이고, 한층 더 높여 보배로운 궁전이라고 한 것이다. 보궁(寶宮)이란 말의 기원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후 최초로 화엄경을 설하셨던 장소를 적멸도량(寂滅道場)이라 하는데서 기인하는데, 중인도 마갈타국의 가야성 남쪽 니련선하 근처의 보리수아래 금강좌(金剛座)를 지칭한다. 화엄경에 따르면,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이 처음 7일 동안 시방세계(十方世界) 불보살들에게 화엄경을 설법하기 위하여 해인삼매(海印三昧)에 드셨는데, 이때 많은 보살들이 모여 부처님의 덕을 칭송하였고, 이에 부처님은 법신(法身)인 비로자나불과 한 몸이 되셨다고 한다. 따라서 적멸보궁(寂滅寶宮)은 본래 두둑한 언덕모양의 계단을 쌓고 불사리를 봉안함으로써 부처님께서 항상 그곳에서 적멸의 법(法)을 법계(法界)에 설하고 있음을 상징하던 곳이었다.
진신사리(眞身舍利)는 곧 부처님과 동일체로서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 불상(佛像)이 조성될 때까지 가장 경건한 숭배의 대상이 되었으며, 불상이 만들어진 후에도 불상을 따로 만들지 않고 부처님과 동일하게 여겨지는 진신사리를 모시게 된 것이다.

주련의 내용을 살펴보면, 통도사의 창건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후 교화(敎化)를 마치고, 사라쌍수 아래서 열반(涅槃)에 드신 후, 그로부터 1,100여년 후에 자장율사가 중국의 당나라에 구법(求法)유학을 떠나, 오대산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의 화현을 만나 석가모니 부처님의 친착가사 한 벌과 발우, 그리고 사리 백과를 받아 643년에 귀국한 후 여기에 계단(戒壇)을 조성하고,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여 많은 세월동안 환난을 겪으면서도 사리를 잘 지켜, 많은 사람들이 사리탑에 참배하고 있는 주련을 작성할 당시의 통도사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고 하겠다.

보살계 법회나 우란분절법회, 화엄산림(華嚴山林) 등 통도사의 여러 법회(法會) 때마다 삼천 명을 수용할 수 있다는 설법전(說法殿)을 발디딜 틈도 없이 가득 메우고, 심지어 법당 밖의 마당에 자리를 마련하여 법회(法會)에 지극정성으로 참여하는 신심 깊은 많은 불자님들을 보면서, 부처님의 진신사리의 위대함과 오늘날 통도사의 상황을 이렇게도 미리 잘 알아 주련의 글을 쓰신 앞선 스님들의 선지(先知)에 대하여 경외와 공경의 마음으로 귀의(歸依) 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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