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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이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한 것은 1606년(선조39년)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오대산 사고가 설립되면서부터이다. 조선은 왕조실록을 편찬하고 영원히 보존하기 위해 전국의 명산 네 곳에 외사고(外史庫)를 두었다. 즉 오대산과 태백산, 마니산 그리고 묘향산이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그전에 있었던 네 군데의 사고 가운데 전주사고만 남았다. 이후 1603년 7월에서 1606년 3월까지 2년 9개월동안 태조실록부터 명종실록까지 804권의 실록을 다시 출판하였다. 이때 출판한 3부와 교정본, 전주사고에 있던 실록 원본을 합친 5부의 실록을 오대산 사고등에 각 1부씩 나누어 봉안한 것이다. 오대산 사고에는 교정본을 봉안했다. 오대산의 사고가 바로 영감사 가까이에 있었다.
1605년 10월 실록이 초고본을 봉안할 장소로 상원사를 선정하였다가, 장소가 협소하다는 이유로 취소하고 1606년 영감사 옆에 사각(史閣)을 건립하였다. 당시 사각은 2층의 누각식 건물로 2동을 지어 한 곳은 실록을 보관하는 사각이고, 다른 한 곳은 왕실의 계보를 기록한 선원보(璿源譜)등을 보관하는 선원각이었다. 조선 후기인 1788년(정조 12년)에 단원 김홍도가 그린 사고라는 그림을 통해 당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사고의 입구에는 오살문이 있고 그 왼쪽에는 작은 푯말 같은 구조물이 보인다. 사각과 선원각 전체를 둘러쌓은 회랑이 있고, 다시 그 안에 사각과 선원각을 별도로 둘러쌓은 내부의 회랑을 두었다.
1910년 국권 상실 후, 오대산 사고의 서책은 이왕직도서관(李王職圖書館)에서 관리하였다. 이듬해인 1911년 3월, 조선총독부 최조국에서 오대산 사고의 서책을 강제로 압수하였고, 1913년 10월 강릉을 통해 선박으로 반출하여 동경제국대학 도서관에 보관하였다. 그러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모두 소실되었고 대출되었던 47책만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불타다 남은 파본 27책은 1932년 5월 경성제국대학으로 돌아왔고 현재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후 6.25전쟁의 와중에서 절을 비롯하여 사각과 선원각이 모두 전소되었다. 주춧돌만이 남아 1963년 사적 제37호로 지정되었고 1992년에 사각과 선원각을 복원하였다. 한편 2006년 7월에는 동경대학 소장본 47책 전부를 환수해 왔다.
그동안 월정사 주지 퇴우 정념 스님과 봉선사 철안, 혜문스님등이 일제가 약탈해간 실록의 환수를 위한 환수위원회를 결성하여 대대적인 반환운동을 펼친 결과였다. 현재 47책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으나 사각 등을 복원해 놓은 상태이므로 보관시설을 잘 갖추어 원래 있던 자리로 돌려놓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의 환수에 이어 2010년 현재 일본정부의 조선왕실의궤 반환결정발표가 있어 조만간 왕실의궤도 반환될 예정이다. 따라서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왕실의궤의 문화재 제자리 찾기를 위한 다양한 노력이 환수위원회와 지역사회 공동으로 진행되고 있는 바 조속한 시일에 오대산에서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왕실의궤를 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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