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품 정보
상세설명
고령산 풍주사(古靈山 豊宙寺)는 창건연대가 미확인 된 사찰 안영암(安靈庵)이 있던 자리에 1966년 새롭게 주변에 전설적 고증과 산세주령을 토대로 풍주사(豊宙寺)를 창건하였다.
안영암(安靈菴)의 창건년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령산 주령을 따라 상당산성(上黨山城)이 있으며 임진홰란 당시 청주성 탈환을 위해 순국한 영규대사(英圭大師)의 열반(涅槃)을 추모하고 의병들의 영혼을 편안하게 왕생극락을 발원한다하여 안영암(安靈菴)이라 하였다한다.
이에 범추(範鄒)스님은 근동(近洞) 노옹(老翁)들의 전언(傳言)으로 확인(確認)되고 무인년(戊寅年 1938년)에 세워졌던 안영암(安靈菴)을 입증하고 있다.
여기에 범추 스님은 하늘을 휘어잡고 구비치는 비룡(飛龍)과 같은 힘찬 모습으로 주춤거리며 내려 온 산줄기 끝이 마치 용의 입과 같이 오목히 벌려진 옛 절터 안영암(安靈菴) 자리에 병오년(丙午年 1966년) 7월에 풍주사(豊宙寺)로 이름하고 착공불사가 시작되어 경신년(庚申年 1980년) 12월에 대법당 무량수전(大法堂 無量壽殿)을 중건(重建)하고 병인년(丙寅年 1986년) 10월에 풍주선원(豊宙禪院)을 개원(開院)하였으며 갑술년(甲戌年 1994년) 4월에 그동안 숙원이었던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 진신사리(眞身舍利) 15과를 버마 미얀마와 티베트에서 위차나 난타 스님이 이운(移運)하여 용주관음전 보탑에 봉안(奉安)함으로써 호법도장(護法道場)으로 일신하고 을유년(乙酉年 2005년) 10월에 풍주사(豊宙寺) 종각 타종식과 육층석탑을 조성하여 부처님 진신사리 육과를 이운하고 육파나밀(六波羅密)을 상징하는 육층석탑 사면에 남쪽은 비로자나불, 서쪽은 아미타불, 북쪽은 석가모니불, 동쪽은 미륵존불, 이렇게 조성되어 여러 선남선녀 신도님들의 공덕을 기리며 세세생생에 성불도를 이르시길 발원합니다. -
소개·새소식
소개글
-
- 풍주사 범추당 정수 큰스님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4-27
불명 定修 법명 範鄒
박서해(朴瑞海) 大船師
법恩師 觀應 船師
혜암당 玄門 大船師
恩師스님 최진암(崔眞庵) 大和尙
第子 範鄒 大和尙
第子 眞空 大和尙
第子 寂光 大和尙
孫상좌 金德一 증손상좌 金圓明
孫상좌 林德修
충북 청주시 상당구 명암로98번길 116 財團法人古靈山 豊宙禪院
佛紀 2557년 계사년 5월8일
조계종 총림 1기 수련생 해인사
범추 큰스님께서는 1941년2월21일
충남 부여군 양화면 오향리399번지
금영김씨(金寧金氏) 가문에서
외아들로 태어나 1949년 홀연히 발심하여 합천 가야산 해인사로 입산하여 채발한 후 행자생활을 시작으로 1954년 가을에 수만(修萬)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지하였는데 스승이 내린 법명은 정수(定修)였고 이 때 나이 13살로 순수하고 눈이 맑았던 동진(童眞)이었다. 1955년 충남지역의 고찰 무량사, 마곡사, 갑사에서 당대 선지식 서해 노스님을 모시고 수선안거(修禪安居)를 원만히 회향하였고 1958년 17세가 되던 해 해인사 강원에 입교하여 불조어록(佛祖語錄)을 열람하고 경안(經眼)을 얻었으며 1960년 3월에는 화계사 근원(謹院)에서 대교(大敎)과를 수료하였다.
1961년 大謹伯이었던 관응 큰스님께 비구계를 수지하고 그 문하에서 경학을 배웠고 이때 관응스님으로부터 받은 법호(法號)가 범추(範鄒)였다.
1967년에 화계사 총무 소임을 맡아 포교의 중요성을 깨달아 포교사로서 자질과 능력을 이곳 명암동 고령산(古靈山) 풍주선원(豊宙禪院)을 중창하였다.
1975년에 재단법인 선학원에 분원장을 임명받고 본격적으로 대중 포교와 사회활동으로 헌신하며 지역 불자들은 물론이고 부처님 법을 따르는 모든 사부대중들의 기도와 신행의 중심사찰이 되었다.
1980년부터 사회활동과 사회운동에 헌신을 다하셨으며 이러한 인연으로 청주경찰서 경승실장, 청주교도소 및 소년원 교화위원, 청주 지방검찰청 선도위원, 법무부 갱생 보호회 위원, BBS 청소년 선도위원바르게살기운동 연합회 이사,
1994년에는 제12회 교정대상 자비상 수상을 계기로 공로가 인정되면서
1996년에는 국무총리 표창장 수상 하였고물레의 인생, 사후세계, 불교경전, 연화가 피어온 발자취, 내 마음 연꽃피는법 알았으니등 부처님의 사상과 가르침으로서 대중들에게 감화를 주셨고
2005년 5월에 평생 숙원이었던 무량수 종각과 6층석탑 또한 배움의 장소인 법등원 자등원을 중창 함으로서 호법도량으로서 면모를 갖추었다.
2006년5월9일(양6월4일) 세연을 마치고 홀연히 입적하시니, 世壽66세가 되시고 法臘은 58세이십니다.
마음이 형상이 없고 바다는 마르면 밑을 보아도 사람은 죽어도 마음 알기 어렵다네.
그러나, 나는 마음의 얼굴을 보았노라.
산에서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물에서 흘러가는 마음을, 虛空에서 가없는 마음을, 바늘귀에서 작은 마음을,
낮에는 밝은 마음을, 밤에는 어두운 마음을, 貪嗔痴에서 삿된 마음을, 戒定慧에서 바른 마음을 보았노라.
求하지말라 求하면 괴로웁나니 無心하면 편안하리라 無心하기 어렵다마라. 慾心만 쉬면 그만이니 걸림없는 道를 알리라.
밉고 고운 것이 本來없고 너와 내가 둘이 아니다. 하나 이것도 空하였거니 부처와 중생이 어디있으리.
마음은 마음도 아니지마는 마음 아닌데도 着하지말라.
약력
1941년 충남 부여 출생
해인사, 조계사, 직지사 전무강원 수료
청주교도소 및 소년원 교화위원
청주 지방검찰청 선도위원
법무부 갱생 보호회 위원
BBS 청소년 선도위원
바르게살기운동 연합회 이사
제12회 교정대상 자비상 수상 (1994년)
바르게살기운동 공로 국무총리 표창장 수상(1996년)
충북참여시민연대 공동대표
저서
물레의 인생
사후세계
불교경전
연화가 피어온 발자취
내마음 연꽃피는 법 알았으니
내마음 연꽃 피었으니 -
- 풍주사 무량수종각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4-27
범종
범종은 본래는 대중에게 시간을 알리는 도구로 사용하여 왔으나 예불시에 범종을 치면서 모든 지옥중생이 이 종소리를 듣고 이고득락하도록 발원하게 된 것이다. 범이란 바로 우주만물이며 진리이고 맑고 깨끗함이며 한 없이 넓고 크고 좋다는 뜻이다. 종송을 하는 이유는 미몽에 빠진 중생의 깊은 잠을 깨워주며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에게 극락세계의 장엄을 일러주고 귀의 발원하도록 하는 것이다.
"원하옵니다. 이 종소리가 시방법계에 두루하여 지옥속을 밝게 비추어 주고 삼악도에서 고통받는 모든 중생들은 고통을 여의옵고 검수지옥 도산지옥 모두 다 부서지고 일체 모든 중생들이 이 종소리 듣고 성불하게 하옵소서."
"이 종소리를 듣는 모든 중생들아 번뇌를 끊고 보리를 이루어 지옥을 떠나 모두 성불하여 중생을 제도 하여지이다."
이것이 종송을 하는 발원이며 소망이다.
법고(法鼓)
불법을 북에 비유하여 법을 설하는 것을 북을 울린다고 한다. 이 말은 부처님의 교법이 널리 세간에 전하는 것을 북소리가 널리 퍼지는데 비유한 것이며 교법이 중생의 번뇌를 없애는 것이 마치 진치고 있던 군대들이 전진하라는 북소리가 울리면 적군을 무찌르는데 비유한 것이다. 또 붉을 치는 뜻은 축생들의 영혼(가죽이 있는 짐승들)을 위하여 법고를 친다고 한다.
목어(木漁)
목어는 나무를 깎아서 물고기 생긴 모양을 새겨 그 속이 비게 만들어서 송경할때와 그 밖에 불사에 치는 것인데 옛적의 목어는 그 생긴 모양과 용법이 후세의 것과 같이 않다고 한다. 목어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가) 교원청규에는 옛날 어떤 스님이 스승의 가르침을 어기고 법을 헐뜯은 까닭으로 죽어서 물고기가 되어 등에 나무가 나서 물결에 흔들리면 등에서 피가나고 아파서 고통이 심하였다. 어느날 스승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갈 때에 한 마리의 고기가 바다에서 몸을 나타내어 살았을 때 지은 죄를 참회하고 등에 난 나무를 없애 주기를 애걸하므로 스승이 수륙재를 지내고 천도하였다. 그 다음 스승의 꿈에 고기가 말하기를 이미 고기의 몸을 멋었으니 나의 나무를 회사하겠다 하므로 스승이 그 나무를 가지고 고기의 생긴 모양을 만들어 달아 놓고 대중을 경계하였다 한다. (나) 현장지귀곡에는 중국 당나라때의 역경가인 현장법사가 천축에서 돌아와서 촉도를 지나는데 한 장자가 상처하고 겨우 세살 난 아해가 있었다.
후모가 아해를 미워하여 장자가 사냥하러 나간 틈을 타서 다락 위에서 아해를 물 속에 던졌다. 장자가 이 사실을 알고 슬퍼하며 재를 베풀어 천도하려 할 때에 마침 현장법사를 만난지라. 장자가 가쁘게 맞아서 제1좌에 청하였더니 현장이 먹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내가 먼 길에서 오느라고 피곤하니 어육을 먹고저 하노라"하므로 좌석에 있던 여러 사람 모두가 크게 놀랐다. 장자가 고기를 사러 나가려 하니 현장이 부탁하기를 "큰 고기가 아니면 불가하다"하므로 장자가 현장의 말대로 큰고기를 사가지고 와서 도마 위에 놓고 자르려 할 때에 물에 던져 죽은 아해가 고기 뱃속에서 우는지라. 장자가 기뻐하므로 현장이 말하기를 "아해가 전생에 불살계를 가진 까닭으로 고기에 먹혔으나 지금까지 죽지 아니하였다."고 말하였다. 장자가 말하기를 "어찌하여 이 고기의 은혜를 갚겠느냐"하므로 현장이 말하기를 "나무에다 고기의 생긴 모양을 새겨서 절에 달아놓고 대중이 이것을 치면 가히 어덕을 갚을 것이라"하였으니 지금의 목어가 바로 이것이라 하였다. 또한 목어를 치는 것은 수중 고혼을 천도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도 한다.
운판(雲板)
선종에서 제당이나 부엌에 달고 대중에게 공양시간을 알리던 기구이다. 청동으로 구름모양으로 주조하며 운판이라 이름한다. 또 운판을 치는 뜻은 공중에 있는 고혼과 날아다니는 조류계의 중생의 이고득락과 해탈을 위하여 친다고 전해오고 있다.
-
- 풍주사 소개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4-27
부처님께서 설하신 극락세계 (極樂世界)의 한 곳인 천상도솔천(天上兜率天)에서 지상(地上)을 내려다보며 항상 인간세계(人間世界)의 중생들을 가련하게 생각하며 구제의 깊은 뜻을 품고 살아가던 영주선녀(靈宙仙女)는 지상(地上)으로 하계(下界)할 것을 결심(決心)하고 선녀(仙女)의 아름다운 자체 모습으로 내려가게 된다면 인간 세계의 혼탁함으로 인하여 미처 뜻을 이루기도 전에 인간들에게 짓밟힐 것을 염려 하여 노파의 모습으로 변신(變身)하여 타고 내려갈 용(龍)과 구름과 농사일에 쓰일 소와 씨앗들을 가지고 해동(海東)땅 서원(西原)인 지금의 청주(淸州)에 내려오게 되었다.
영주선녀(靈宙仙女)가 노파가 되어 내려온 산이라하여 고령산이었으나 지금의 고령산(古靈山)으로 바뀌어 불리워지고 있으며 선녀가 가지고 온 씨앗 중에 명협 (蓂莢)이라는 풀이 있는데 매월 초하루부터 보름까지는 한 잎씩 떨어지는 과정이 매월 반복됨으로써 인간들에게 달력 세는 법을 가르쳐주게 되었으며 영주선녀(靈宙仙女)가 가지고 온 풀씨를 명암(蓂庵)초라 하는데 그 후 그 이름을 따서 명암동 (明岩洞)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이러한 내력에 의하여 명암동(明岩洞)이라하고 용담동(龍潭洞)은 선녀가 타고내려 온 용이 살았던 연못이있어 용담동(龍潭洞)이라 이름하고 영운동(永雲洞)은 선녀가 지상에 내려올 때 휘장(揮帳)되었던 구름이 깔려있던 곳이라하여 영운동(永雲洞) 이라고 한다.
우암산(牛岩山)은 선녀가 끌고 내려온 밭갈이 소를 우암산(牛岩山)이라 이름하고 금천동(金川洞)은 소에게 물을 먹이던 개울이 있던 자리에 금천동(金川洞)이라 하고 탑동(塔洞)은 인간들에게 농사일과 예의범절 및 하늘부처님을 알게 해주기 위하여 하강(下降)함으로써 천상복락(天上福樂)을 마다한 영주선녀(靈宙仙女)의 거룩한 덕을 기려 묘(墓)를 쓰고 공적탑(功積塔)을 세웠던 곳이라하여 지금의 탑동(塔洞)이라 이름한다.
서울에 우면산(牛眠山) 및 전북 익산에 와우산(臥牛山)등과 같이 대부분 소가 잠들어 있고 누워있는 모습들이지만 청주의 우암산(牛岩山)만은 우뚝 솟아 밭갈고 있는 형상 (形象)으로써 소의 조종(祖宗)과 농업(農業)의 근원지(根源地)라 할 수 있겠다. 이리하여 이곳 청주에서 백성(百姓)들을 풍족(豊足)하게 해주고 온나라가 풍년(豊年) 을 기원하고 과거, 현재, 미래, 삼세(三世)에 걸친 중생제도(衆生濟度)의 도량(道場) 이며, 영주선녀(靈宙仙女)의 갸륵한 뜻을 기리고저 범추스님은 풍주사(豊宙寺)라고 도하며 소를 밭갈고 농사지으니 풍년이 든다하여 풍주사(豊宙寺)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다.
충북 청주시 상당구 명암동 산 130-3번지에 위치한 고령산 풍주사(古靈山 豊宙寺)는 창건연대가 미확인 된 사찰 안영암(安靈庵)이 있던 자리에 1966년 새롭게 주변에 전설적 고증과 산세주령을 토대로 풍주사(豊宙寺)를 창건하였다. 안영암(安靈菴)의 창건년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령산 주령을 따라 상당산성(上黨山城)이 있으며 임진홰란 당시 청주성 탈환을 위해 순국한 영규대사(英圭大師)의 열반(涅槃)을 추모하고 의병들의 영혼을 편안하게 왕생극락을 발원한다하여 안영암(安靈菴)이라 하였다한다. 이에 범추(範鄒)스님은 근동(近洞) 노옹(老翁)들의 전언(傳言)으로 확인(確認)되고 무인년(戊寅年 1938년)에 세워졌던 안영암(安靈菴)을 입증하고 있다. 여기에 범추 스님은 하늘을 휘어잡고 구비치는 비룡(飛龍)과 같은 힘찬 모습으로 주춤거리며 내려 온 산줄기 끝이 마치 용의 입과 같이 오목히 벌려진 옛 절터 안영암(安靈菴) 자리에 병오년(丙午年 1966년) 7월에 풍주사(豊宙寺)로 이름하고 착공불사가 시작되어 경신년(庚申年 1980년) 12월에 대법당 무량수전(大法堂 無量壽殿)을 중건(重建) 하고 병인년(丙寅年 1986년) 10월에 풍주선원(豊宙禪院)을 개원(開院)하였으며 갑술년(甲戌年 1994년) 4월에 그동안 숙원이었던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 진신사리(眞身舍利) 15과를 버마 미얀마와 티베트에서 위차나 난타 스님이 이운 (移運)하여 용주관음전 보탑에 봉안(奉安)함으로써 호법도장(護法道場)으로 일신하고 을유년(乙酉年 2005년) 10월에 풍주사(豊宙寺) 종각 타종식과 육층석탑을 조성하여 부처님 진신사리 육과를 이운하고 육파나밀(六波羅密)을 상징하는 육층석탑 사면에 남쪽은 비로자나불, 서쪽은 아미타불, 북쪽은 석가모니불, 동쪽은 미륵존불, 이렇게 조성되어 여러 선남선녀 신도님들의 공덕을 기리며 세세생생에 성불도를 이르시길 발원합니다.
-
-
변경/수정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