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단/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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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장사(北長寺)는 그 창건 연대가 정확하지 않으나 사중에 전래되는 <<향승성책(鄕僧成冊)>> 및 <<상주천주산북장사사적기(尙州天柱山北長寺事蹟記)>> (필사본) 에는 신라시대 진감선사(眞鑑禪師) 주석지처(住錫之處) 이므로 신라 고찰이란 점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산명을 노악산(露岳山) 이라 하였는데, 그 동쪽에는 남장사, 서쪽에 북장사가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북장사가 위치한 산을 일명 천주산(天柱山) 이라 한 것은 산 위에 수미굴(須彌窟) 이 있는데, 굴 속에 아래는 좁고 위는 넓은 석주가 있어, 모양이 마치 하늘을 지탱하는 지주와 같다 하여 산명을 천주산(天柱山) 이라 했다 한다.
이 천주라는 산명이 어느때 붙여졌는지 알 수 없으나, 고사지(古寺址) 에서 창건 당신의 기와가 출토되었는데, '天柱山' 이란 3자(字) 가 있었다 하니 그 유래가 아득하다 하겠다.
다만 사중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에 전우(殿宇) 가 모두 불에 타 인조 2년(1624) 에 중신(重新) 하였다 한다. 그러나 효종 원년(1650) 에 회록(回祿) 되자 다시 서묵(瑞默), 충운(忠雲), 진일 화상(眞一和尙) 등이 그 도중(徒衆) 과 함께 중건하였으나, 겨우 8년 만인 동왕 8년(1657) 에 다시 화재를 입었다. 이렇게 화재가 잦은 것은 기지(基地) 남쪽에 화산(火山) 이 비치기 때문이라 하여 염수(鹽水) 를 그 첨두(尖頭) 에 묻어 양재(禳災) 하였다 한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어느 해 초동(樵童) 이 이를 훼손하자 다시 화재를 입었다. 이에 사승(寺僧) 이 상의하여 그 다음해에 복지(卜地) 로 이건하여 신북장사(新北長寺) 라 하였다. 이곳의 지세는 유광(幽曠) 하고, 계수(溪水) 는 청수(淸秀) 하여 전차후옹(前遮後擁) 하며 좌읍우공(左揖右拱) 하여 심히 길지라 하였다.
이렇게 옮겨간 북장사는 더욱 번성하여 불전(佛殿) 은 넓고 화려하며, 승방은 장려하여 삼보백물(三寶百物) 을 갖추지 않음이 없었다고 하였다. 북장사는 극락보전, 화장전, 원통전 등 20여 동의 건물이 있던 대찰이었고 남장사 역시 이곳의 일부를 옮겨갈 정도였으나, 지금은 극락보전, 명부전, 산신각을 비롯하여 요사가 있을 뿐이다.
<북장사사적기(北長寺事蹟記)>에 따르면 극락전 15간은 현종 원년(1660) 에 시작하여 동왕 8년(1667) 에 완공되었으며, 이때의 화주는 거사 김부귀(金富貴) 와 여행 화상(呂行和尙) 이었으며 목수는 천호(天湖), 지운 대사(智雲大師) 가 중심이 되었고, 시주는 박태웅(朴太雄), 최중복(崔重福), 안막복(安莫卜) 등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1970년에는 본래의 건물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현재의 건물을 새로 건립하였다. 규모는 정면 3간, 측면 3간의 맞배지붕, 총 14평의 건물이다. 내부의 존상은 목조아미타여래좌상(200 X 250cm) 과 목조 관음 . 세지(170 X 130cm)의 좌우 보처상(補處像) 을 봉안하였다. 이 불상은 좌상으로서는 거대한 편에 속하며, <북장사사적기> 에 따르면 숙종 2년(1676) 의 제작이라 하였다. 이때의 화주는 승은(勝恩) 이며, 시주는 김후백(金厚百) 이 중심이 되었고, 증명(證明) 은 소영당(昭影堂) 신경 대사(神鏡大師) 라 하였다.
그외 내부에 봉안된 존상은 칠성탱(192 X 192cm , 1947년), 신중탱(140 X 167cm, 1977년)을 위시하여 소종(85 X 50cm, 1981년) 등이 있다.
명부전은 정면 3간, 측면 2간의 맞배지붕, 총 16평이다. <<사적(事蹟)>> 에 따르면, 내부의 지장보살과 사왕상은 숙종 15년(1689) 에 조성되었으며, 화주는 신휘(信輝, 俗名 信梅), 시주는 노상명(魯尙明), 증명은 덕순(德淳) 으로 기록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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