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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 정보
상세설명
송림사는 신라 진흥왕 5년(544) 승려 명관이 중국에서 가져온 사리를 모시기 위하여 세운 사찰이다.
고려 선종 9년(1092)에 대각국사 의천이 중창하였으나 고종 22년(1235)에 몽고군에 의하여 폐허가 되었다.
그 뒤 다시 중창하였지만 조선 선조 30년(1597)에 왜군의 방화로 소실되었다.
이후 철종 9년(1858) 영추가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불당은 대웅전(보물 제2131호)을 비롯하여 명부전, 삼천불전 등이 있으며, 대웅전 안에는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보물 제1605호)이 있다.
이밖에 오층전탑(보물 제189호), 석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보물 제1606호), 명부전 목조시왕상과 제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60호), 명부전 석조삼장보살좌상(문화재자료 제471호) 등 다양한 문화재가 경내에 위치하고 있다(전통사찰 등록번호 가87호). -
소개·새소식
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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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림사 전각 배치도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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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림사 대웅전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5-02
지정번호 : 보물 제2131호
지정일 : 2021년 7월 21일
소유자 : 송림사
관리자 : 송림사
수량(면적) : 1동(147.92㎡)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계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정면 3칸, 측면 3칸 건물이 유형화되는 흐름 속에서 당시 송림사는 다른 사찰과는 구별되는 지위를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승려장인 각원이 조선 인조 27년(1649)에 대웅전을 재건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편액은 숙종(1674~1720 재위)의 어필로 알려져 있다.
대웅전에 관한 기록은 『대웅전중수기』(1775), 『칠곡송림사대웅전중수상량문』(1850) 등에 남아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선조 30년(1597)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영조 31년(1755)과 철종 1년(1850)에 중수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양난 이후 서서히 살아나는 불교건축은 17세기 후반 맞배지붕의 다포 주불전 건물이 일반화되며 송림사 대웅전은 이에 속하는 대표적인 건물 중 하나이다.
특히 경상도 일원에서 조성된 가장 큰 다포계 맞배지붕 건물로서 공포의 형식, 배면의 창호, 신방목, 불단의 조각수법 등은 당시 건축 및 장엄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대웅전이란 법화경에 석가모니 부처님을 큰 영웅, 즉 대웅이라 한데서 유래한 것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시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대웅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만 모셔야 하지만, 대웅이 모든 부처님을 가르키는 위대한 어른이란 뜻이므로 모든 부처님을 모시고 대웅전이란 현판을 걸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일반적으로 법당의 중앙에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3존을 모셔놓은 법당을 대웅전 혹은 대웅보전이라 합니다.
또한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불단을 바라볼 때 오른쪽에 동방 유리광세계의 교주인 약사여래부처님과 왼쪽에 서방 극락세계의 교주인 아미타부처님을 모시고 그 전각을 대웅보전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의 부처님들은 공간적으로 삼세계를 대표하므로 삼세불이라 부르는데, 조선시대에 조성된 큰 사찰에서는 대웅보전 내에 삼세불상과 함께 삼세불화를 봉안한 곳이 많습니다.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석가모니 부처님은 B.C 623년(지금으로부터 약2600여년전)에 히말라야의 산기슭, 즉 오늘날의 네팔 국경지대에 있는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 날이 음력 4월 8일 이라고 해서 우리는 사월 초파일을 부처님 오신날로 정해 기리고 있습니다.
석가모니의 아버지는 석가(Sakya 사카)족의 왕 정반왕(Suddho-dana숫도다나) 이였으며, 어머니는 마야(Maya)부인 였습니다
깨닫기전 이름은 고타마 싯다르타(Gotama Siddharata)였습니다. 여기서 고타마란 가족명, 즉 성(性)을 말하는데, 좋은 소를 일컫는 의미로 중국에서는 구담(瞿曇)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싯다르타(실달타悉達陀)란 목적을 달성한 자, 뜻을 성취한 자라는 의미입니다.
이 싯다르타 태자가 훗날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처절한 고행과, 그 고행마저 부정하는 철저한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어 석가모니(Sakyamuni)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석가란 출신 부족을 일컫는 말이요, 모니란 존귀한 자를 뜻하는 말로 석가족 출신의 존귀한 자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석가모니란 석가족의 고타마라는 성을 가진 존귀하신 분입니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깨달았으므로 고타마 붓다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고타마는 고유 명사이지만 붓다는 깨달은 자를 뜻하는 보통명사입니다.
불전(佛傳)에 의하면 고타마 싯다르타는 태어나자마자 일곱 발자국을 걸으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즉, “하늘과 땅 사이에 오직 나홀로 존귀하다,
세상이 모두 고통이니 내가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 고 외쳤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신화적인 포장이 엿보입니다.
그러나 신화라 하여 그것이 전혀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신화 속에는 실존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신화적인 이야기라 하여 일소에 붙칠 것이 아니라 그 신화를 탈신화하여 실존적인 의미를 되새기는 작업이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일곱 발자국을 걸은 것은 여섯 가지 즉, 천상,인간,수라,축생,아귀,지옥의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크게 한 발 더 건너뛰었다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외침은 ‘나 하나만의 제일’이라는 독아론(獨我論)적 발언이 아니라 “신에 의지하거나 물질에 의지하는 의타심을 벗어나, 인간의 고귀함과 자존성에 대한 우렁찬 외침이며 천지건곤(天地乾坤)을 당당하게 거니는 인간의 본래 모습에 대한 확신에 찬 외침”인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되살려 오늘날에도 사월 초파일이 오면 자그마한 탄생불에 관불(灌佛)의식을 합니다.
이는 석가모니 탄생시 하늘에서 용이 내려와 싯다르타의 몸에 향탕(香湯)을 부었다는 데서 유래하지만, 그 진정한 의미는 탄생불에 물을 부으면서 인간의 존귀한 가치와 그 가치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 스스로 되새기는 것입니다.
싯다르타는 16세에 아쇼다라(Yasodhara)를 만나 결혼해서 아들 라훌라(Rahulla)를 낳고는 생의 아수라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29세에 출가를 감행했습니다.
이를 위대한 포기(The Great Renunciation)라 합니다. 왜 위대한 포기인가?
부친을 이어 일국의 왕이 될 왕자가 왕국과 아름다운 부인과 그리고 귀여운 자식을 뒤로하고, 일반인으로서는 도저히 엄두도 못낼 일을 감행한 결과 그 떠남에서, 자기 버림에서 커다란 깨달음을 얻어 깨침의 빛이 영원토록 사바세계를 비추어 뭇 생명의 갈 길을 인도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교묘하게 위장된 집단적 이기성의 대명사로 곧잘 표현되는 가정이나 국가의 테두리를 박차고 나가 보편적 인류의 지평을 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지평을 연 깨달음은 6년간 각고의 수행 끝에 새벽 별을 보시고 깨달음을 얻으셨던 것입니다. 드디어 싯다르타는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던 번뇌 더미를 단숨에 쓸어버리고 위대한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대웅(大雄)이라 하며, 그 분을 모신 궁전을 대웅전(大雄殿)이라고 칭하게 된 것입니다.
그 때 고타마 붓다의 나이 35세. 그날이 음력 12월 8일로 우리나라에서는 성도제일이라 하여 전국의 사원에서 철야 용맹정진을 합니다.
깨달은 그 날을 기념하여 부처님처럼 치열하게 정진하는 것입니다.
커다란 깨달음을 얻은 후 80세에 이르러 열반에 이르기까지 석가모니 부처님은 어느 한곳에 머물지 않고 길에서 길로 진리의 전파에 나선 것입니다.
자신의 가르침을 뗏목에 비유하여 강을 건너고 난 뒤에 뗏목에 대한 집착을 버리듯 자신의 가르침에도 애착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45년 동안 교화하고 다니셨지만 자신은 한 마디도 말 한바가 없노라고 했습니다.
열반에 들려 할 때 20년 동안 그의 곁에서 시중을 들었던 아난(阿難)이 흐느끼면서 마지막 설법을 간청하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스스로에 의지하라,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에 의지하라” 『자등명 자귀의, 법등명 법귀의 自燈明 自歸依, 法燈明 法歸依』
“내가 간 후에는 내가 말한 가르침이 곧 너희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은 덧없이 흘러가니 쉬지 말고 정진하라.”고하셨던 것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의 형상은 자금색으로 조성되며 그 수인은 대체로 항마촉지인으로 조성됩니다.
그러나 그 기능과 역할에 따라 설법인 선정인 여원인 시무외인 등 다른 수인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석가모니부처님의 가사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는 우견편단식과 양어깨를 덮는 통견식이 있습니다.문수보살(文殊菩薩)
석가모니불이나 비로자나불의 좌 협시보살로서 부처님의 지혜를 상징하는 분입니다.
따라서 왼손에는 지혜를 나타내는 여의주나 칼, 오른손에는 청련화를 들고 있으며 해태(사자와 비슷함)를 탄 모습으로 조성하여 모시기도 합니다.
문수보살이 해태를 타고 날카로운 칼을 차고서는 어떠한 장애도 베어 버리고 모든 번뇌를 없애는데 그침이 없는 지혜를 나타내는 보살입니다.
문수보살은 사위국의 바라문의 아들로서 석가모니 부처님 입멸 후 이 세상에 출생했던 실존 인물이라고도 하고 여러 보살들과 더불어 대승경전을 결집했다 하나, 그 역사적 근거는 희박합니다. 지혜를 강조하여 문수보살는 모든 불보살의 어버이요, 모든 부처님은 그의 제자라는 설이 나오기까지 합니다.
불교에서는 지혜를 일러 반야(般若)라 하는데, 이는 이분대립적인 지식을 뛰어넘는 초월지(超越智)로서 어떠한 사태를 상대적, 부분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사태와 완전히 하나가 되어 이치를 꿰뚫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공(空)에 투철한 진여(眞如)입니다.
보현보살(普賢菩薩)
석가모니불이나 비로자나불의 우 협시보살로서 부처님 자비의 실천적 행위을 상징하므로 흔히 연꽃(연꽃위에 경책을 얹기도 함)을 들고, 흰 코끼리를 탄 모습과 혹은 연화대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조성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보현보살은 세계 곳곳에 빠짐없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 나타나는 모습이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바로 문수보살의 智(지)와 대응하는 실천적이고 구도적 행(行)의 보살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문수보살이 해태를 타고 날카로운 칼을 차고서는 어떠한 장애도 베어 버리고 모든 번뇌를 없애는데 그침이 없는 지혜를 나타내는 보살이라면, 보현보살은 월색(月色)의 몸을 한 채 여섯 개의 상아를 지닌 흰 코끼리를 타고 두루 일체의 장소에 몸을 나투어 청량의 빛으로서 중생을 길러내는 자비를 상징하는 보살입니다.
이렇게 보현보살이 흰 코끼리를 탄 모습으로 그려지는 근거는 “법화경”- ‘보현보살권발품’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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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림사 명부전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5-02
우리나라에 지장신앙이 언제부터 들어왔는지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삼국유사에는 8세기 중엽 진표 율사에 이르러 지장신앙과 관련된 대목이 보이고 있습니다.
그 후 고려시대에 이르러 사후(死後)신앙과 연결되어 유행하기 시작하였고 조선 중기 이후에는 많은 지장탱화가 등장하는데, 이것으로 우리나라에서 지장신앙이 크게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겠습니다.
지장 삼존상으로 모셔진 경우에는 천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의 협시 보살로 허공장(지지)보살과 지장보살의 삼장보살님을 봉안 합니다.
또는, 사찰에 따라서는 중앙에 지장보살이 있고 좌우로 협시존상은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입상으로 표현합니다.
삼장보살
천장보살(天藏菩薩). 허공장(지지)보살(虛空藏(地持)菩薩).지장보살(地藏菩薩)을 말한다.
불교가 교리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같은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그 본질적인 면을 깊이 분류하여 법신, 보신, 화신의 3신불 사상이 등장하게 되었고, 또는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불로 확대시켜 나간 것처럼 바로 그와 같은 논리가 지장보살에 적용되어 나타난 것이 삼장사상이다.
말하자면 삼신의 법신에 해당하는 것이 천장보살이고 보신에 해당하는 것이 허공장(지지)보살 , 화신에 해당하는 것이 지장보살로써, 그들은 각각이 천부(天部)와 허공(虛空)과 명부(冥部)를 관장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세 보살은 하늘과 땅과 지하의 삼계(三界)를 제도하는 보살로 신앙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삼장신앙은 다른 나라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만 독특하게 발달되어 유행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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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림사 명부전 석조삼장보살좌상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5-02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제471호
지정일 : 2004년 10월 14일
소유자 : 송림사
관리자 : 송림사
수량(면적) : 3구
송림사 명부전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석조삼장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는 곳으로 삼장보살이 불화로는 자주 그려졌으나 불상으로 조성된 사례는 거의 없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불석(佛石)으로 제작한 삼장보살좌상은 중앙의 천장보살상을 중심으로 지지·지장보살로 구성되어 있다.
각 보살상은 좌우 협시상을 거느리는 삼존 형태로 배치되어 있는데 천장보살상의 협시는 후대에 따로 조성되었다.
삼장보살좌상은 신체에 비하여 큼직한 얼굴이 거의 정사각형에 가깝고 넓적한 얼굴과 가늘고 긴 눈, 넓적한 코와 콧망울 등 시원스럽게 이목구비를 표현하였는데 이는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불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공통적인 특징이다.
한편 천장보살상의 복장에서 발견된 경전류와 다라니류 등을 통해 조선 영조 29년(1753) 이후에 중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
- 송림사 범종각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5-02
불교 사찰에서 범종을 두는 당우(堂宇).
범종을 달아 놓은 전각을 말한다. 당호는 절에 따라 범종루·종각·종루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단층일 경우 각(閣)이라 하고 중층일 경우 루(樓)라고 한다.
규모가 큰 사찰에서는 중층으로 세워 법전사물(法殿四物)을 함께 두기도 한다. 전각의 외양은 대개 기둥과 목책이 있는 사각의 단층 건물이거나, 2층 누각이다.
보통 불이문(不二門)을 지나 사찰 경내에 들어서면 법당 앞에 있거나 일주문 왼쪽에 있는데, 중층 누각의 경우는 다르다.
경상북도 영주 부석사(浮石寺)의 경우는 해탈문인 안양루 아래에 있고, 청도 운문사(雲門寺)의 경우는 누각 밑이 바로 사찰 진입로이다.
전라북도 완주 송광사(松光寺)의 경우는 평면이 십자형이다.
영암 불갑사(佛甲寺)의 범종루는 6각의 중층 누각으로, 1층에 목책을 두르고 범종을 안치했으며 난간을 두른 2층 다락은 비워두었다.
고창 선운사(禪雲寺)에서는 천왕문 2층에 범종과 법고를 함께 둔다.
범종각에 범종과 함께 두는 법전사물은 법고(法鼓)·운판(雲板)·목어(木魚)이다. 법고는 바닥에 두고 운판과 목어는 보나 도리에 매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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