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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보사찰의 하나인 승보사찰로서 매우 유서깊은 절이다. ‘송광’이라는 절 이름은 조계산의 옛 이름인 송광산에서 비롯된 것으로, 송광에 대한 몇 가지 해석이 있다. 구전해 내려오는 전설에는 이 산이 장차 ‘18공이 배출되어 불법을 널리 펼 훌륭한 장소’이기 때문에 송광이라 하였다고 한다. 소나무 ‘송’자를 ‘18공’이라고 파자하고 ‘광’자를 불법광포의 뜻으로 해석한 데서 유래한다. 또, 다른 전설에는 보조국사가 이 절터를 잡을 때 나복산에서 나무로 깎은 솔개를 날렸더니 국사전의 뒷등에 떨어져 앉았으므로 이 뒷등의 이름을 치락대라고 불렀다 한다. 이 이야기를 토대로 하여 최남선은 송광의 뜻을 솔갱이라고 풀었다. 김영수는 이 산에 ‘솔갱이’가 가득 차 있었으므로 지방사람들이 이 산을 예로부터 ‘솔메’라고 해 왔던 것이며, 그래서 송광산이란 이름이 생긴 것으로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송과의 ‘광’은 원래 언덕을 의미하는 ‘강’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승려 임석진도 <송광사사지>를 저술하면서, 김영수의 해석을 가장 타당하다고 보았다. 산에 소나무를 많이 심어 바위가 드러나지 않게 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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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새소식
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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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정스님 계신곳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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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광사 전각 배치도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5-10
[가람배치 및 당우]
<사적기>에 의하면 고려 명종 때 이미 80여동의 건물을 가진 대사찰이었고, 1951년 공비들에 의하여 소실되기 전만 하여도 건물 총수가 80여동을 유지하고 있었다. 현재까지 재건된 건물을 합하면 약 50여동의 대사찰로서 그 사격을 유지하고 있다. 중요한 건물은 대개가 서향하여 있다. 6ㆍ25사변 전만하여도 가람배치가 법계도의 도표처럼 배치되어 비를 맞지 않고 경내를 다닐 수 있었으며, 대방만도 6방이 남과 북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한다. 6방은 남쪽의 법성료ㆍ해청당ㆍ행해당, 서쪽의 문수전ㆍ임경당ㆍ도성당이다. 현존하는 건물을 중심으로 동구에서 부터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① 청량각ㆍ일주문: 청량각은 송광사가 자리잡은 조계산의 계곡물이 동구에서 굽이치는 지점의 깊숙한 계곡에 홍교를 쌓아올려 그 다리 위에 조성된 건물이다. 이 건물은 1921년에 중건하고, 1972년 승주군의 보조에 의하 여 중수하였다. 청량각에서 500m 오르면 일주문이 있고, 일주문 앞에는 송광사의 역대 고승 및 공덕주의 비석들이 있다. 다포로 형성된 일주문은 조선 후기에 건립된 것이다. 이 문의 현액이 보통 옆으로 한 줄로 쓰이는 데 대하여 종서로 씌어 있어 특이하다.
② 척주각ㆍ세월각ㆍ우화각: 일주문 뒤쪽에 4방 1칸씩의 몹시 작은 건물이 두 채 있는데, 현판에 척주각ㆍ세월각이라 하였다.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건물이다. 죽은이의 위패를 모시는 곳으로, 재식시 영가의 관욕처가 된다고 한다. 즉, 망령도 남녀를 갈라서 척주각은 남자 영가를 위한 관욕소이고, 세월각은 여자 영가의 관욕소가 된다. 영가가 절에 들어오기 전에 이 관욕소에서 목욕을 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관욕소 왼쪽 에는 보조국사가 스스로의 불멸을 입증하기 위하여 심었다는 고향수가 있다. 높이 15m의 이 고목나무는 보조국사가 다시 송광사를 예방할 때 소생한다는 전설이 얽혀 있다. 고향수를 지나면 계곡을 지나는 곳에 능허교 가 있고, 이 위에 우화각이라는 일종의 문루가 4칸 길이로 서 있다. 이곳에는 예로부터 송광사를 거쳐간 시인ㆍ묵객들이 지은 한시가 많이 걸려 있다. 건립연대는 1700~1711년 사이이며, 1774년(영조 50)에 중수하였다.
③ 천왕문ㆍ해탈문ㆍ대장전ㆍ종고루ㆍ법왕문: 이 건물들은 모두 대웅전을 향하여 일직선상에 나란히 위치하였다. 이들 가운데 천왕문을 제외하고는 1951년 공비들에 의하여 불타버렸고, 현재 종고루만이 재건되었다. 천왕문은 1609년(광해군 1)에 초창하여 1718년에 중수하고 이듬해 봄에 내부의 천왕상을 중수하였으며, 또 100여년이 지난 1806년(순조 6)에 다시 사천왕상을 중수하고 채색하였다. 현 건물의 크기는 4방 3칸으로서 23평이며, 목조 사천왕상이 있다. 해탈문은 화재 전에 정면 3칸으로서 지붕의 중앙에 낮은 규모로 1칸을 다시 올려 건물이 독특한 양상을 띠었다고 한다. 대장전 안에는 화재를 입기 전까지만 해도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었 고, 사찰의 도서실로 사용되었다. 당시의 신문ㆍ잡지ㆍ도서 일체는 물론 작은 불상들이 봉안되어 있었으며, 현 박물관은 유물들은 소재 전에 이곳에서 꺼내어온 것이라 한다. 당시 보조국사의 장삼은 유리장 속에 걸어두 었고, 가사는 비단으로 되어 있었으나 많이 낡아서 함 속에 펴두었는데 불타버렸다. 종고루는 화재 이전에는 7칸 2면의 큰 건물이었고 지금처럼 아래쪽 중앙을 바로 통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1962년에 중건되었다. 현재 2층에는 범종ㆍ운판ㆍ목어ㆍ홍고등 불전사물이 있다. 법왕문은 정면과 측면 각 3칸이었으나 역시 소실되고 아직 복구되지 않았다. 이 문을 통과하면 법왕인 부처님을 봉안한 대 웅전에 바로 도달할 수 있다는 뜻에서 이 문을 법왕문이라고 한 것이다.
④ 대웅전ㆍ설법전ㆍ수선사: 대웅전은 송광사의 중심건물이다. 1951년의 화재로 불탄 뒤 1961년에 주지 금당이 중창하였다. 그 당시에는 내부에 비로자나불을 1구 봉안하였고, 건물은 전면과 측면 각 3칸이었다. 그뒤 1983년으 중창 때, 평면 넓이 108평의 亞자 형의 건물을 다시 세웠으며, 내부에는 석가모니불과 연등불ㆍ미륵불 등의 삼존불을 봉안하였다. 대웅전의 뒤쪽에는 대상의 건물들로서 설법전ㆍ수선사 등이 있다. 대웅전 뒤쪽 으로 설법전이나 선방 등이 있는 예는 요즘의 다른 사찰에서 보기 어려운 독특한 가람배치이다. 대웅전 뒤 계단을 올라 진여문을 통과하면 설법전에 이른다. 설법전은 본래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두던 곳으로, 1899년 봄, 조정에서 인출한 해인사의 대장경 4부 가운데 1부를 봉안하였으나 1951년 화재 때 설법전과 함께 소실되었다. 현 건물은 1968년 4월 30일에 재건되어 법회 등을 위한 대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수선사는 최초에 조 계총림의 방장인 보조국사의 거실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는 조사당으로 이용되었다. 현 건물은 1968년 여름에 착공하여 1969년에 낙성된 정면 6칸ㆍ측면 4칸의 건물이며 내부에는 커다란 원경만 있다. 이 건 물은 수행하는 선객이 이용하고 있다. 이들 중에는 현재 외국인 승려 여러명이 함께 정진하고 있고, 일체 외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는 분위기가 차분한 선실이다.
⑤ 상사당ㆍ하사당ㆍ응진전: 송광사의 건물은 대웅전 뒤의 높은 축대를 기준으로 대상과 대하로 대별된다. 대상의 건물로는 상사당ㆍ하사당ㆍ향적전ㆍ응진전ㆍ성수전ㆍ산신각ㆍ진여문ㆍ청운당ㆍ백운당ㆍ설법전ㆍ 차안당ㆍ조사당ㆍ국사전ㆍ진영당 등이 있다. 상사당은 하사당과 함께 남향으로 병립해 있는데 제9대 국사 담당이 이곳의 물을 마시고 3일 만에 오도하였으므로 일명 삼일암이라고 부른다. 지금의 수선사 건물을 짓기 전 에는 이곳이 선방으로 사용되었다. 하사당은 보물 제263호로 지정되어 있는 특수한 건물이다. 건축양식이 국사전과 같으며 조선초기형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응진전은 1951년의 대화재를 모면한 1623년(인조 1)의 건 물로서 정면 3칸, 측면 4칸이며, 지붕은 역시 맞배지붕이다. 내부에는 석가여래와 그의 제자 16나한을 봉안하였으며, 중앙 동쪽 벽 후불탱화는 1724년(경종 4) 화승 의겸이 그린 것이며, 오른쪽의 탱화는 1725년에, 왼쪽 의 탱화는 같은 시기에 회안등에 의하여 조성되었다. 응진전 바로 옆에는 노전의 화목을 적재해 두는 향적전이 있다.
⑥ 국사전ㆍ진영각: 국사전은 승보사찰 송광사의 상징적 건물이다. 송광사와 더불어 나라를 빛낸 국사들의 영정을 봉안하고 그들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일종의 법당이다. 이곳은 일명 자음당이라고도 하며, 옛날에는 참선을 하는 수선장으로 이용되었다. 이곳에 봉안된 16국사는 조계종의 가풍을 선양하고 불교의 진면목을 드러낸 한국불교의 증인들이다. 현재 이 건물은 국보 제56호로 지정되어 있다. 진영각은 그 편액을 풍암영각이라 고 하였다. 그 까닭은 조선시대의 송광사 대덕들으 거의 다 풍암의 법손이었으므로 그와같은 이름을 붙이게 된것이다. 사찰의 기록에 의하면 1852년에 건립되었으며, 전면 3칸, 측면 2칸의 이 건물안에는 주로 풍암의 문 하대덕들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⑦ 약사전ㆍ영산전: 약사전은 송광사 안에서 규모가 가장 작은 법당이다. 건물 양식이 독특하여 현재 보물 제302호로 지정되어 있다. 내부에는 약사여래상과 후불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영산전은 보물 제30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내부에는 석가여래의 소조상을 비롯하여 영산회상도, 석가여래의 일생을 묘사한 팔상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중앙의 영산회상도는 1725년에 만들어졌고 화승은 의겸 등이다. 팔상탱화 역시 같은 시대에 이룩되었 으나 각기 다른 15명의 화승에 의해서 이룩되었다.
⑧ 관음전ㆍ명부전ㆍ화엄전: 관음전은 1903년에 건립되었으며, 관음전의 뒤쪽 언덕에는 보조국사의 부도탑이 있다. 높이 250cm의 탑은 고려 말기의 특징을 보이고 있고, 4각 기단 등은 대체로 딱딱한 감을 주고 있다. 그 옆에는 ‘불일보조국사감로지탑’이라고 쓴 오세창의 글씨가 있다. 전면과 측면이 각각 3칸인 명부전은 유명계의 시왕을 봉안하였으므로 일명 시왕전이라고도 한다. 화엄전은 대웅전 서남방 약 300m 지점에 위치한다. 1641년 건립된 화엄전에는 송광사의 장경판본들이 봉안되어 있다. 화엄전 주위에는 53불의 석불을 봉안한 불조전이 있고, 삼성각ㆍ월조헌이 있다. 이 불조전은 1684년에 건립되었고 1905년과 1946년에 중수하였다.[유물 및 사간장경]
이 절에 소장된 유물 가운데 국가지정문화재로는 국보 제42호인 목조삼존불감을 비롯하여 국보 제43호인 고려고종제서, 보물 제572호인 노비첩과 수선사형지기, 보물 제134호인 경질과 보물 제175호인 경패, 보물 제176호인 금동요령 등이 있다. 전라남도유형문화재로는 제18호이니 자정국사사리함, 제 19호인 은견난사, 제22호인 송광사금강저, 제28호인 고봉국사주자원불, 제30호인 팔사파문자 등이 있다. 이 중 능견난사는 바루로서 풀리지않는 신비성이 있다.
[부속암자]
기록에 의하면 조계산에는 모두 16개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대부분의 암자들은 폐허가 된 채 유지만 남아 있거나 아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 상태에 있다. 현재 수행승이 거처하고 있는 암자는 천자암ㆍ부도암ㆍ감로암ㆍ불일암뿐이다. 이밖에도 유지만 밝혀진 암자로는 광원암ㆍ청진암ㆍ목우암ㆍ실상암ㆍ판와암ㆍ상선암ㆍ자정암 등이 있고, 보조암ㆍ은적암ㆍ조계암ㆍ묘적암 등은 이름만이 전할 뿐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
- 승보종찰이란?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5-10
부처님은 진리에 눈뜬 사람으로 2600년 전 인도에서 태어나셨던 석가모니 부처님을 먼저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가르침은 부처님께서 깨친다음 우리를 위해 설하셨던 내용으로 오늘날 팔만대장경이란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끝으로 승가는 스님들과 신도들로 구성된 신앙공동체를 가리킨다. 실로 부처님의 가르침은 승가를 통해 오늘날까지 면면히 전승되어 오고있다. 이렇게 보면 부처님은 진리의 길을 먼저 걸어 깨치셨던분으로 그 길을 우리들에게 친절히 가리켜 주시는 길잡이(導師)요, 가르침은 그 길을 표시하고 있는 지도나 이정표와 같고, 승가는 진리의 길을 함께 걷는 길동무들의 모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세 가지 보배인 삼보는 거기에서 그치지않고 더욱 내면화되어 바로 우리들이 본래부터 갖추고잇는 참마음을 가리킨다. 원효스님께서도 "돌아가는 바 그 하나인 마음(一心)이 바로 삼보인 것이다"라고 확언하고 계신다. 곧 우리들 본래의 마음이 다름아닌 부처요 진리며 승가라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 승가를 가장 귀한 보배라고 한 까닭은 무엇일가?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영원한 세계, 진리의 세계에 다다를 수 있으며 우리들 존재의 원천인 본래의 나, 참 나에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값이 없는 보배요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이다. 불교의 신앙은 바로 그 보배를 향해 가는 것이다.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승가에 귀의합니다 하는 이른바 삼귀의(三歸依)가 바로 그것이다. 이 세상 어떤 것 보다도 보배롭고 소중한 세가지 보배를 향해 내 모든 것을 다하겠습니다 하는 의지의 표현이 삼귀의인 것이다. 따라서 삼보에 귀의하겠습니다하는 말은 나는 "이렇게 살겠습니다" 하는 삶의 방향과 목표를 고백하는 서원이요 다짐이다.
이처럼 부처님, 가르침, 승가야말로 불교를 받치는 세 기둥이요 불교를 불교이게 하는 세가지 요소이다. 그래서 한국 불교에는 일찍부터 세 가지 보배를 가리키는 삼대 사찰이 있고 이를 삼보사찰(三寶寺刹)이라고 한다. 곧 경남 양산의 통도사, 경남 합천의 해인사 그리고 전남 순천의 송광사이다. 통도사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있기 때문에 불보사찰(佛寶寺刹), 해인사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팔만대장경의 경판이 모셔져있기 때문에 법보사찰(法寶寺刹), 그리고 송광사는 한국불교의 승맥(僧脈)을 잇고 있기 때문에 승보사찰(僧寶寺刹)이라고 한다.
그것은 두 가지 사실에 연유한다. 첫제는 지금으로부터 800여 년전 고려 때 보조 국사(普照國師 知訥)스님 께서 정혜결사를 통해 당시 타락한 고려 불교를 바로잡아 한국 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였는데 그 근본도량(根本道場)이 바로 송광사였다.
다른 하나는 지눌 스님의 뒤를 이어 송광사에서 열다섯명의 국사들이 출현하여 지눌과 함께 모두 열여섯명의 국사(十六國師)가 나와 한국 불교의 전통을 면면히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송광사야말로 한국 불교 전통의 산실이요 또 그 전통을 잇고 있는 중요한 사찰이다. -
- 송광사 창건 및 연혁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5-10
송광사는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에 있는 조계산 자락에 새둥지처럼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다.
송광(松廣)이라는 이름에는 몇가지 전설이 있다.
그 첫째는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셔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 절이라는 뜻이다.
곧 '송(松)'은 '十八(木)+公'을 가리키는 글자로 18명의 큰스님을 뜻하고, '광(廣)'은 불법을 널리 펴는 것을 가리켜서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서 불법을 크게 펼 절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보조 국사 지눌스님과 연관된 전설이다. 곧 스님께서 정혜결사를 옮기기 위해 터를 잡으실 때 모후산에서 나무로 깍은 솔개를 날렸더니 지금의 국사전 뒷등에 떨어져 앉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뒷등의 이름을 치락대 (솔개가 내려앉은 대)라 불렀다한다. 이 전설을 토대로 육당 최남선은 송광의 뜻을 솔갱이(솔개의 사투리)라 하여 송광사를 솔갱이 절이라 풀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일찍부터 산에 소나무(솔갱이)가 많아 '솔메'라 불렀고 그에 유래해서 송광산이라 했으며 산 이름이 절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기록에 의하면 송광사는 신라말 혜린(慧璘)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송광산 길상사(吉祥寺)였으며 100여 칸쯤 되는 절로 30, 40명의 스님들이 살 수 있는 그리 크지않은 규모의 절이었다고 한다. 그 뒤 고려 인종때 석조(釋照)대사께서 절을 크게 확장하려는 원을 세우고 준비하던 중 타계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50여년 동안 버려지고 페허화된 길상사가 중창되고 한국불교의 중심으로 각광받게 된 것은 불일 보조국사 지눌스님의 정혜결사가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부터이다.
지눌스님은 9년 동안의(명종 27년1197년 ~ 희종 원년) 중창불사로 절의 면모를 일신하고 정혜결사운동에 동참하는 수많은 대중을 지도하여 한국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였다.
이 때부터 송광사가 한국불교의 중심으로 각광받기 시작하였다. 그 동안 정유재란, 6.25사변 등 숱한 재난을 겪었으나 지속적인 중창불사로 지금의 위용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제 1차 중창
석조 대사 이후 50여년 동안 버려지고 폐허화된 길상사가 새로운 규모로 중창되고 한국 불교의 중심으로 각광을 받게 된 것은 지눌의 정혜결사가 이곳으로 자리를 옮기면서부터이다. 지눌은 9년동안의(명종 27년, 1197~희종 원년, 2004) 중창 불사로 절의 면모를 일신하고 정혜결사 운동에 동참하는 수많은 대중을 지도하여 한국 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였다. 드디어 송광사가 한국 불교의 중심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거조사로부터 길상사로 정혜결사를 옮겨와 수선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가까운 곳에 정혜사라는 절이 있어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산이름도 송광에서 조계로 바꾸었다. 뒤에 절 이름도 수선사에서 송광사로 불리게 되어 조계산 송광사로 되었다.
제 2차 중창
지눌이 타계한 다음 그의 법을 이는 진각 혜심(眞覺 慧諶) 스님은 수선사의 전통을 이어 선풍을 크게 진작시켰다.
이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자 다시 절이 비좁게 되었다. 강종(康宗)이 이 소식을 듣고 명을 내리어 절을 크게 증축하였다.
제 3차 중창
혜심 스님이후 180년이 지난 조선조 초 16국사의 마지막 분인 고봉화상께서 원을 세워(1395년) 유서 깊은 도량을 중창하기 시작하였다. 고봉의 뜻을 계승하여 중인(中印)선사께서 중창 불사를 완성하여 90여 칸의 증축을 하였다 한다.
제 4차 중창
정유재란으로 침입한 왜군이 불을 질러 역사적 도량은 일시에 잿더미로 변하였다. 이에 응선(應禪)화상께서 복구의 손을 대기 시작하였고 드디어 지리산에 계시던 부휴 대사를 모시어 불사를 완성했다고 한다. 이때 600여 명의 제자들이 송광사에서 부휴 대사의 지도로 공부했다고 한다.
제 5차 중창
헌종 8년(1842)에 큰불이 나 대웅전을 비롯한 거의 모든 건물이 불타 버렸다. 정유재란 이후 두번째 겪는 수난이었다. 불이 난 이듬해부터 절을 일으켜 세우는 일이 시작되어 철종 7년(1856)까지 무려 14년의 시간이 걸려 2,150여 칸이 다시 세워졌다.
제 6차 중창
5차 중창으로부터 70, 80년 뒤인 1922년에 주지 설월(雪月)스님과 율암(栗庵)스님에 의하여 1928년까지 퇴락한 건물들을 고치고 개와를 바꾸는 등 전반적인 중수가 있었다.
제 7차 중창
1948년에 일어난 여순반란과 6.25사변의 발발은 조계산 송광사 일대를 공비의 노략과 살육의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산중에 은신한 이들 공비를 토벌하기 위하여 국군 토벌대는 작전상 절 주변의 숲을 벌채하게 되었다. 이에 격분한 공비들이 1951년 2월 절을 지키던 노인들을 학살하고 5월에는 절에 불을 질러 대웅전등 중심부를 불태워 버렸다. 1955년부터 주지 금당(錦堂)스님과 화주 취봉(翠峰)스님의 원력으로 5년 동안에 걸쳐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들을 복구하였다.
제 8차 중창
1969년 조계총림이 발족하면서 방장 구산(九山)스님께서는 승보 종찰다운 도량을 가꾸어야 된다는 원력에, 사부대중이 뜻을 함께하여 1983년부터 1990년까지 8년여에 걸쳐 대웅전을 비롯하여 30여동의 전각과 건물을 새로 짓고 중수하여 도량의 모습을 일신하고 승보 종찰로서의 위용을 갖추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8차 중창 불사와 아울러 특기할 것은 외적인 불사와 함께 내적인 불사, 건물 불사와 함께 사상 불사를 해야 한다는 뜻으로 1987년 보조 사상 연구원을 발족하여 보조 사상 선양에 진력해 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보조 사상 연구원은 [보조 전서]를 발간하고 매년 학술 회의를 개최하여 회지 [보조 사상]을 발간하고 있다.
이는 사찰에서는 처음 있는 일로 보조 사상, 목우가풍을 바르게 이해하고 정혜결사 정신을 오늘의 우리들 삶에 살리려는 훌륭한 노력이라 하겠다. 이러한 노력과 실천이 따르는 한 정혜결사의 창의적 전통은 내일의 한국 불교를 밝히는 등불고 다시 피어날 수 있으리라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제 9차 중창
1990년대에도 계속하여 관음전, 문수전, 정혜사(定慧社) 등의 해체 중창과 산내암자 복원불사 및 국보 국사전과 국가보물인 하사당, 약사전, 영산전 등의 보수를 하였고, 특히 2000년부터 임경당, 해청당, 사자루, 응진전, 불조전, 월조헌, 취정루 등의 중요 건물을 대대적으로 해체 보수하고 종무소, 선호당(善護堂), 다송원(茶松苑), 효봉영각, 수석정, 죽림정사, 목우농원 등을 신축 또는 중창하여 현재 80여 동(棟)의 장엄한 모습을 이루게 되었으며, 지금도 계속하여 산문 진입로의 옛길 복원 및 건물 보수불사를 계속 진행하고 있다.
송광사에서는 전국 사찰 가운데서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으며 국보 제42호인 목조삼존불감, 국보 제43호인 고려고종제서, 보물 제572호인 수선사형지기, 보물 제1366호인 화엄탱화, 보물 제1376호인 티베트문법지 등 기타 동산문화재(動産文化財)와 고문서(古文書) 전적류(典籍類)의 과학적인 보수(補修) 및 보존처리와 체계적인 자료정리를 계속하면서, 성보박물관의 효율적 운영을 위한 각종 특별전시회를 기획하여 우리 전통문화의 우수성을 홍보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조계총림의 선원, 율원, 강원에서는 150여명의 스님네가 모여 보조국사의 정혜결사정신을 이어 여법히 정진하면서 내실(內實)있는 수행불사(修行佛事)를 진행 중이다.
또한 해마다 유명한 여름수련회와 각종 세미나를 열고 사보(寺報) 발간 및 홈페이지를 개설하여 포교하면서 제4의 사이버 종찰(宗刹)이 되도록 정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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