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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 축(鷲),깃들서(棲),즉 독수리가 사는 절이라는 뜻으로 독수리는 지혜를 뜻하며 지혜는 바로 큰 지혜를 가진 문수 보살님을 뜻한다. 또 다른 가설로 험준한 뒤쪽 산세가 풍수지리학상으로 독수리의 형국이므로 축서라 명명했다고 보는 이도있다.
축서사는 신라 제 30대 문무왕 13년(서기673년)에 의상조사가 창건한 절로서 창건 연기설화에 의하면 문수산 아래 지림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이절의 스님이 어느날 밤 지금의 개단 초등학교 앞산을 바라보니 휘황찬란한 빛이 발산되고 있어 광체가 나는 곳으로 달러갔더니 한 동자가 아주 잘 조성된 불상앞에서 절을 하고 있었다. 얼마후 그 동자는 청량산 문수보살이라며 구름을 타고 사라져 버리고 불상만 남았다. 훗날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의상대사가 불상을 모실 곳을 찾아 다니다가 현 대웅전 터에 법당을 짓고 불상을 모시니 축서사의 창건이다 이때 산 이름도 문수보살이 출현하였다해서 문수산이라 한듯하다. 3년 뒤에 의상대사께서는 축서사에서 40여리 떨어진 봉황산 중턱에 대찰을 세웠으니 동국화엄제일도량인 부석사이다. 흔히 축서사를 부석사의 큰집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있다.
대웅전 상량문에 의하면 이 절은 광서(光緖)7년(서기 1875년)에만 해도 대웅전,보광전,약사전,선승당,동별당,서별당,청련당,백화당,범종각등 여러동의 건물이 있었고, 산내 암자만도 상대,도솔암,천수암등 세 개나 되었고 대중이 44명이 살았으며 대웅전 본존불에 기도하면 영험이 있다하여 기도처로 유명한 사찰이기도 하였으나, 조선조 말기 을사보호조약(서기1905년)과 정미7조약(서기1907년)으로 왜구의 속국화되는 것을 분개하여 전국적으로 의병이 무장봉기하여 항일투쟁할 때 이 곳에도 일본군이 의병을 토벌하기 위한 작전으로 방화하여 대웅전 1동만 남기고 전소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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