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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설명
임제선풍의 대쪽 같은 승풍을 고고하게 지켜온 청정도량, 선암사는 전라남도 순천시에 있는 고찰로 신라시대에 창건되었습니다. 542년(진흥왕 3) 아도가 비로암으로 창건하였다고도 하고, 875년(헌강왕 5)도선국사가 창건하고 신선이 내린 바위라 하여 선암사라고도 합니다.
경내에는 보물 삼층석탑과 대웅전 등 다수의 중요 문화재가 있어 역사적 가치가 큰 만큼 2009년 12월 21일 사적 제50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현재는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찰로도 유명합니다. 백제성왕 5년인(527)년 현재의 비로암지에 초창주 아도화상께서 선암사를 창건하였고, 산명을 청량산 사찰명을 해천사라 하였습니다. 이창주 도선국사께서 현 가람 위치에 절을 중창하고 1철불 2보탑 3부도를 세웠으며, 지금도 1철불, 2보탑, 3부도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삼창주 의천대각국사께서 대각암에 주석하시면서 선암사를 중창하였습니다. 대각국사 중창건도기에 의하면 당시의 중창은 법당 13, 전각 12, 요사 26, 산암 19개소 등의 방대한 규모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 고려시대의 기록은 김극기(1171년~1197년)의 시에 의해 '적막하고 고요한 수행의 사찰'로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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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새소식
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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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암사 차의 역사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6-11
통일신라 선암사에 처음으로 차를 보급한 분은 도선국사로 선암사 일주문 주변에 차나무를 심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므로 선암사차의 역사는 통일신라 말로 선과 함께 같이 보급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인 대각국사는 칠구선원을 신축하고 현재 칠전선원차밭에 차를 심었고 여기서 수확한 차를 법제하여 송나라에 수출하였다고 전해진다. 대각국사 이후부터 임란이전까지 선암사차에 관련된 기록이나 구전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김극기의 시에서 정막하고 고요한 사찰로 기록하고 있어 선을 위주로한 사찰임을 알 수 있다. 이때 참선과 함께 차를 즐겼을 것으로 추측된다.
정유재란으로 선암사가 거의 소실되었을 때 차나무 또한 소실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이후 문정, 문준, 경준스님이 선암사의 복구를 시작하는데 이때 차밭도 함께 복구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조선시대 선암사의 기록에 차에 관한 기록으로는 상량문 등의 연화질에 다각이라는 소임이 등장하는데 이는 차밭과 차를 관리하는 소임자를 말하는 것으로 이는 일상 생활 속에서 차를 즐겨 마셨음을 알 수 있다.
해방과 함께 불교분규로 인하여 차밭을 거의 방치하다가, 70년대 선암사 스님들의 노력으로 차밭을 손질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현재에는 전통차의 보급과 활성화를 위하여 100여명의 스님들이 노력하고 있다. -
- 선암사 큰 스님들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6-11
527년 아도화상께서 비로암에 터를 잡으신 이래 150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사찰
선암사의 역대 큰스님들을 소개합니다
선암사는 527년 아도화상께서 비로암에 터를 잡으신 이래 150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사찰이다.
사찰의 역사가 말해주듯 선암사는 도선국사, 대각국사, 침굉현변스님 등을 비롯하여, 근대의 경운원기 선곡지우스님 등 수많은 고승대덕께서 주석하시면서 선암사를 빛내셨다.
선암사는 선종과 교종이 함께 발달한 몇 안되는 사찰중의 하나이다. 선(禪)쪽으로는 9산선문 중의 하나인 동의선문 혜철스님의 제자인 도선국사께서 선암사를 중창하신 뒤 선종사찰로서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도선국사 이후 수많은 선승들을 배출하였다. 선암사의 선방 수좌는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중국의 어느 사찰의 선방에서나 아무 조건없이 입방이 허락되었을 정도로 국제적으로 그 명성이 드높았다. 선원의 현판 또한 호남제일선원(澔南第一禪院)이라고 쓰여있어 선암사 선방의 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교(敎)쪽으로는 조선후기에 선암사의 남암인 대승암에서 4대강백(함명-경붕-경운-금봉)을 배출하였으며, 당시의 학승중에는 전라도는 물론이요 멀리 금강산의 유점사에 있는 스님까지 와서 공부를 하였다는 기록이 학계연록에 남아 있어 선암사의 교학또한 융성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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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암사 연혁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6-11
삼국시대
527년 백제성왕 5년아도(阿道)화상께서 이곳으로 와서 산 이름을 청량산(淸凉山), 절 이름을 해천사(海川寺)라 하였다.
통일신라시대
9세기도선(道先)국사께서 비보도량(裨補道埸)의 하나로 선암사를 창건함.
고려시대
11세기 후반의천대각국사께서 칠구(七區)선원을 세우는 등 선암사를 크게 중창함.
1540년 중종 35년 일주문을 중수함.
선조30년 정유재란때 큰 피해를 입어 1철불, 2보탑, 3부도, 문수전, 조계문 청측 등만 남고 모두 소실됨.
1655년 효종 6년 원각경을 선암사에서 개판(開板)함.
1660년 현종 원년 경잠(敬岑), 경준(敬埈), 문정(文正) 세분 대사가 도반 10여명과 함께 사찰 중수를 시작함. 이후 8년동안 중창불사를 계속함 "묘법연화경"을 선암사에서 개판함.
1691년 숙종 17년 백암성총(栢庵性聰)스님이 화엄대법회를 개최함.
1697년 숙종 23년 호암(護巖)스님이 관음상 1구를 조성함.
1707년 숙종 33년 호암스님이 승선교를 축조함. 선암사 중수비를 세움
조선시대
1754년 영조 30년 상월(霜月)스님이 화엄대법회를 개최함.
1759년 영조 35년 화재를 만나 큰 피해를 봄.
1760년 영조 36년 상월, 서악(西岳)스님이 선암사를 중건함.
1761년 영조 37년 상월스님이 화재를 에방하기 위해 산명을 청량산으로 사명을 해천사를 개칭.
1797년 정조 21년 해붕(海鵬)스님이 칠전선원을 중건함.
1823년 순조 23년 실화르 대웅전을 비롯한 불우 4동과 승료(僧寮) 6동이 불에 탐.
1824년 순조 24년 해붕, 눌암(訥庵), 익종(益宗)스님 등이 대웅전을 비롯한 4동을 중건함
1825년 순조 25년 심검, 설선양당을 중건함. 산명을 조계산, 사찰명을 선암사로 복칭함.
1906년 선암사 승선학교를 세움
일제시대
1911년 일제 총독부가 30본산 제도를 시행할 때 선암사는 호남지역본사의 하나가 됨.
1914년 선암사 말사인 증심사를 중신으로 하여 광주 북쪽에 포교당을 거립함
현재
한국불교 태고종의 총림으로 그 법맥을 이어가고 있음 -
- 선암사 소개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6-11
임제선풍의 대쪽 같은 승풍을 고고하게 지켜온 청정도량, 선암사는 전라남도 순천시에 있는 고찰로 신라시대에 창건되었습니다. 542년(진흥왕 3) 아도가 비로암으로 창건하였다고도 하고, 875년(헌강왕 5)도선국사가 창건하고 신선이 내린 바위라 하여 선암사라고도 합니다.
경내에는 보물 삼층석탑과 대웅전 등 다수의 중요 문화재가 있어 역사적 가치가 큰 만큼 2009년 12월 21일 사적 제50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현재는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찰로도 유명합니다. 백제성왕 5년인(527)년 현재의 비로암지에 초창주 아도화상께서 선암사를 창건하였고, 산명을 청량산 사찰명을 해천사라 하였습니다. 이창주 도선국사께서 현 가람 위치에 절을 중창하고 1철불 2보탑 3부도를 세웠으며, 지금도 1철불, 2보탑, 3부도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삼창주 의천대각국사께서 대각암에 주석하시면서 선암사를 중창하였습니다. 대각국사 중창건도기에 의하면 당시의 중창은 법당 13, 전각 12, 요사 26, 산암 19개소 등의 방대한 규모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 고려시대의 기록은 김극기(1171년~1197년)의 시에 의해 '적막하고 고요한 수행의 사찰'로 전해집니다.
조선 전기 선암사의 기록은 중종 35년(1540)년 일주문을 중수했다는 기록이 유일합니다. 선암사도 다른 절과 마찬가지로 정유재란 당시 큰 피해를 입었는데 모든 전각이 불타고 철불, 보탑, 부도, 문수전, 조계문, 청측만이 남았다고 전해집니다. 1660년에 경준, 경잠, 문정, 세 분의 대사에 의하여 대웅전을 세우는 등 8년간 괄목할 중수를 이뤘습니다. 그러나 전쟁 이전의 상태를 복구하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선암사의 중창불사를 마무리하신 분은 호암약휴스님이었습니다. 호암스님은 승선교를 비롯하여 원통전 불조전 등을 만들었습니다. 중창 이후 법당 8, 전사 12, 중료 16, 산암 13, 부속암자로 선적암, 도선암 등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러나 영조 35년(1759) 봄에 선암사는 또 다시 화재를 만나 큰 피해를 입게 되었는데, 상월 새봉스님과 서악스님이 다음해인 1760년 재건 불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는 아도화상 이래 도선-의천-경잠-경준-문정-호암의 뒤를 이은 오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상월 새봉스님은 중창불사뿐 아니라 1734~1735년 두 차례에 거쳐 화엄대법회를 개최하였는데, 이 때 참가한 1287명의 명단이 선암사 해주록에 전해집니다. 그리고 상월스님은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1761년 산 이름을 청량산, 사찰명을 해천사로 개칭하였습니다.
정조 13(1789)년에 임금이 후사가 없자 눌암스님이 선암사 원통전에서, 해붕스님이 대각암에서 100일 기도를 하여 1790년 순조임금이 태어났습니다. 이후 왕위에 오른 순조임금은 인천대복전 편액과 은향로, 쌍용문가사, 금병풍, 가마 등을 선암사에 하사했습니다.
순조 22년(1798)에는 승중문음으로 유명한 해붕전령이 칠전을 중창하였습니다. 순조 23년(1823) 3월 30일 대웅전을 비롯한 여러 동의 건물이 불에 타자 다음해부터 해봉, 눌암, 익종스님 등이 제6 중창불사를 하여 현재의 가람의 규모를 갖추었습니다. 그리고 산명과 사명을 다시 복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호남을 대표하는 함명태선-경붕익운-경운원기-금봉기림 등의 4대 명강백을 배출하였습니다. 1919년 본발사법에 의하여 전국 사찰을 30본산으로 지정했을 때 선암사는 전남의 4본산 중 하나로 지정되어 순천, 여수, 광주 지역의 사찰을 관장하였습니다. 현재 선암사는 태고종 유일의 총림인 태고총림으로서 강원과 선원에서 수많은 스님들이 수행정진하는 종합 수도 도량의 역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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