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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부산교구
지역/지구 야음지구
대표전화 052-262-5312
   유치원 052-262-1319
팩스 052-262-5316
  주임신부 이상율 바실리오 신부
설립일 1927.04.04
홈페이지 http://eonyang.pbcbs.co.kr/
  주소 울산 울주군 언양읍 구교동1길 11
   울산 울주군 언양읍 송대리 404 언양성당
   11 Gugyodong 1-gil, Eonyang-eup, Ulju-gun, Ulsan
Tag 언양성당, 언양천주교회, 성모동굴, 죽림굴, 유물전시관
  • 상품 정보

    상세설명

    언양성당은 1888년 조선대목구 시절에 이미 본당 설립 위원회를 결성하였으나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본당 설립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절영도에 부산의 첫 본당이 설립되었다. 그러다가 1927년 당시 대구대목구 소속으로 있으면서 보드뱅(Beaudevin, 丁道平, 1897~1976, 에밀) 신부를 본당 신부로 하여 현 부산교구에서 두 번째로 본당이 설립되었다.

    구전에 의하면, 언양 지역의 첫 신앙 공동체는 이 지역 출신 오한우(1760~1801, 베드로)가 1790년에 영세한 뒤 1801년 신유박해 때 충청도 지역에서 관헌에게 체포되어 피안 살수형(백지사?)으로 치명하였으며, 오한우와 같이 영세한 그의 육촌 매제인 김교희(일명 재권?, 1775~1834, 프란치스코)가 박해를 피해 내간월 불당골(현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로 숨어들어 교우촌을 형성하였고, 그리하여 언양 지역에는 이미 1800년대 초에 교우촌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문헌 자료에 의하면 언양 지방에 처음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아마 1801년 이 지역으로 유배를 온 강이문으로 부터 전교를 받은 것으로 추측되는 오치문(1804~1861, 오한우의 손자)에 의해서 인 듯하다. 이후 박해 시대인 1850년경부터는 번창한 신자촌으로 성장하였다.

    언양 지역의 교우촌들은 병인박해 때 심한 타격을 입었다. 문헌상으로 나타나는 이 지역 최초의 순교자는 김사집(1845~1867, 필립보 또는 베드로)으로, 그는 1866년 11월 진영 포졸에게 체포되어 이듬해 5월(음)에 순교하였는데, 그때 그의 나이 23세였다. 이어 언양 대재[竹嶺] 교우촌에 살던 허인백(許仁伯, 1822~1868, 야고보), 김종륜(金宗倫, 1819~1868, 루카), 이양등(李陽登, ?~1868, 베드로) 등 3명이 1868년 9월 14일(양)에 체포되어 울산 장대에서 순교하였다.

    박해가 끝난 뒤 교우촌이 재건되면서 1882년 대구(현 계산동) 본당의 주임으로 경상도 지역을 담당하게 된 로베르(Robert, 金保祿, 1853~1922, 바오로) 신부가 1883년에 살티 공소를 설립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언양읍 공소도 설립되었다. 1904년에는 순정 공소가 설립되었으며, 이 세 공소의 신자 수는 153명에 달하였다. 이 지역신자들의 노력에 힘입어 1927년 5월 25일 언양 본당이 설립되고 초대 주임으로 보드뱅(Beaudevin, 丁道平, 1897~?, 에밀) 신부가 부임하였다. 1936년 10월 25일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하고 드망즈 주교 집전으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전국적 성소의 온상지로 70여 명의 성직자와 수도자, 20여 명의 동정녀를 배출시켰다. 그리하여 대주교 1명, 주교 1명, 수도회 관구장 2명의 출신지가 되었고, 또한 교구 내 가장 많은 16개 공소를 둔 본당으로 순교 선열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중심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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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모동굴
    언양성당의 뒷산에 위치한 성모 동굴과 십자가의 길에 대한 구상은 1927년경에 시작 되었다. 1926년 11월에 언양 성당 부지를 매입 하였고 그 다음해 정 보드맹 신부는 성당을 짓고 바로 뒷산에는 성모 동굴을 만들어 성모님을 모시자는 의견을 제시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성모 동굴 조성사업은 실현되지 못하다 2000년대 희년을맞아 언양 성당이 순례 성당으로 지정되어 서정웅 지도 신부의 노력으로 각 공소 보수사업, 죽림굴 환경 미화 사업, 성모 동굴 조성사업 등에 전 교우들이 참가하여 과감하게 실천에 옮겨그 결실을 보게 되었다. 성모 동굴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14처를 지나서 가게 되므로 성모 동굴과 십자가의 길은 다른 성당의 성모 동굴과는 달리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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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교자 오상선(1840-1867)
    언양 성당 뒷산에는 오상선의 묘가 있는데 오상선은 이 지방에서 처음으로 신앙을 받아들인 오한우(1760-1801)의 증손자이다. 오한우는 육촌 매제인 김교희와 함께 천주교를 받아들여 1790년경에 서울에서 세례를 받고 입교 하였다고 전해진다. 오한우는 서울을 왕래하며같은오씨문중의 오몽상과 권일신, 정약용과 교분을 두텁게 하고 <천주실의>와 교리 서적 몇 권을 얻어서 집으로 돌아와 열심히 신앙공부를 하여 천주교에 입교하였다고 한다. 그 후 그는 1801년신유박해 때 충청도와 경상도 경계 지점에서 피안살수형으로 죽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그의 손자 오치문과 증손자 오상선도 천주교를 받아들여 경신박해(1860)와 병인박해(1866)의 여파로 순교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언양현 상북면에 세거한 향리 집안이었기 때문에 오치문과 오상선은 집안의 힘을 빌어 읍 주변의 신자들을 보호하여 준 듯하다. 이 집안의 전교에 의하여 향리들까지도 천주교를 믿고 이들이 신자들을 보호하였다는 이사실은다른지역과는 상이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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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주임신부 : 강호성 요셉 신부
    예수 성심 전교 수녀회
    주보 : 그리스도 왕
    신자수 : 2,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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