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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 정보
상세설명
오륜대순교자성지는 부산에서 순교하신 8분의 ‘부산 순교자묘소’와 한국순교성인 103위 중 26위의 유해를 안치한 ‘순교자성당’이 있는 곳이다.
이곳 부산지역 에서는 1866년 병인박해에 이어 1868년 무진년 8월4일(양력 9월 20일) 수영장대에서 이정식 요한과 그의 가족들 그리고 이정식의 대자였던 양재현 마르티노를 비롯하여 함께 옥에 갇혔던 여덟 분의 신자들( 이정식, 이관복, 박소사, 이월주, 이삼근, 양재현, 차장득, 옥소사)이 군문효수의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정식 요한은 동래출신 무과에 급제 동래 병영의 장교, 60세에 입교 회장이 됨, 가족과 함께 울산 수박골로 숨어 살다가 체포되고 47일간 동래 동헌에서 옥중생활을 한 끝에 75세에 치명당함. 이정식의 대자였던 양재현 마르티노는 동래 북문 밖 오늘날 금사동에서 살던 이로서 벼슬보다는 민간에서 존경받던 좌수였다. 체포되어 수영장대에서 치명 당할 때 42세)
그 후 명장동(동래구 명장동 산 96번지)에 묻혀있던 이정식 요한회장의 가족 네 분의 무덤만이 조사 확인되어, 1977년 9월 19일 이곳 오륜대로 이장하여 ‘부산 순교자 묘소’로 꾸몄다.
현재에는 네 분의 무덤 외에 다른 네 분의 무덤이 가묘로 단장되어 있으며, 특히 이정식 요한과 양재현 마르티노는 ‘윤지충과 하느님의 종 123위’에 포함되어 2014년 8월16일에 복자품에 올랐으며 미구에는 부산교구의 성인으로 공경을 받게 될 것이다.
그들이 순교한지 100주년이 되던 해에(1968년) 순교자들의 얼과 사랑의 위업을 높이 기리고 전파하고자 ‘한국 순교 복자수녀회’에서는 이곳 오륜대에 수도원을 세우고 순교자 성당을 건립하여 성지로서의 면모를 만들어 갔다. 또한 1981년에는 한국순교자 기념관 축복식과 척화비 복제, 라파엘호 모형제작, 십자가의 길, 묵주기도의 길, 성모동굴 등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2009년 3월 2일에는 한국순교자기념관은 1종 전문박물관인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으로 등록되었으며, 2013년, 10월부터는 반세기 동안 성지를 관리해온 ‘한국 순교 복자수녀회’에서 부산교구로 성지의 관리권한이 변경되었다. 부산교구는 이곳을 ‘오륜대 순교자성지’로 명명하고 전담사제를 파견하여 미사와 강론, 강의 등을 통하여 순교자 정신의 계승에 힘쓰며, 노후화된 건물의 개보수 등 본격적인 성지 정비작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순교자성당
수영장대에서 치명당한 이들이 순교한지 100주년이 되던 해에(1968년) 순교자들의 얼과 사랑의 위업을 높이 기리고 전파하고자 한국 순교복자 수녀회에서는 이곳 오륜대에 수도원을 세우고 순교자 성당을 건립하여 성지로서의 면모를 만들어 갔다.
1976년 9월30일에 제2대 부산교구장인 이갑수 주교 집전으로 ‘한국 순교자 기념관’과 ‘순교자 성당’ 기공식을 거행하고, 1975년 아직 시성되기 전 복자상태에 있던 순교복자 유해 20위(이들은 1984년 시성됨)를 모셨으며 그 이후 기념관(1981년 10월 8일 축성식 거행, 1982년 9월 25일 개관식)보다 먼저 1977년 7월20일 이곳 ‘순교자 성당’이 축성될 때 새로이 복자 유해 6위가 추가되었다. 기념관과 순교자 성당에 대한 건축과 설계는 동아대 김성곤 교수가 담당을 해주었다.
2014년 10월 4일부터는 부산교구에서 이 성지를 담당하면서 매일(월-일) 11시에 미사를 거행하고 있다.
십자가의 길
가톨릭 신심행사중에서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것 중 하나. 예수 그리스도가 사형 선고를 받으신 후 십자가를 지고 갈바리아 산에 이르기까지 일어났던 14가지의 중요한 사건을 성화(聖畵)로 혹 조각으로 표현하여 축성된 십자가와 함께 성당 양벽에 걸어둔 곳(14처, stations)을 하나하나 지나가면서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바치는 기도를 말한다. 이것은 초기 교회시대에 예루살렘을 순례하던 순례자들이 실제로 빌라도 관저에서 갈바리아 산까지의 거리를 걸으면서 기도드렸던 데서 유래한다. 이 순례지가 지리적 정치적인 장애를 받게 되자 15세기, 16세기에 유럽에서는 성지 모형의 십자가의 길을 만들어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각 처의 숫자와 기도의 구체적인 형태는 결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 기도는 특히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의해 널리 전파되었는데 1688년 교황 복자 인노첸시오(B. Innocentius) 11세는 이 수도회의 모든 성당에 십자가의 길을 설립하는 것을 허용했고 예수의 수난을 묵상하며 경건하게 이 기도를 바치는 자에게 전대사(全大赦)를 허락하였다. 1694년 교황 인노첸시오 12세는 이 특전을 확증했으며, 1726년 교황 베네딕토(Benedictus) 13세는 모든 신자들이 이 특전을 얻을 수 있게 하였다. 1731년 교황 글레멘스(Clemens) 12세는 모든 교회에 십자가의 길을 설립하는 것을 허용하였고 곳의 숫자도 14처로 고정시켰다.
19세기에 이르러 이 신심은 전세계에 퍼져 예수의 수난을 묵상하는 가장 좋은 기도로 특별히 사순절에 널리 행해지고 있다. 성당이나 그 밖의 공적(公的)인 기도 장소에서 개별적으로 혹은 사제와 함께 단체로 행해진다. 각 처를 순례하듯 옮겨가는 것이 원칙이나 단체로 할 때는 대표만 움직이고 다른 분들은 움직이지 않고 해도 무방하다. 각 처마다 정해진 기도문과 함께 주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외며 묵상한다. 14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처 : 예수, 사형선고 받으심. 제2처 : 예수, 십자가 지심. 제3처 : 예수, 기진하시어 넘어지심. 제4처 : 예수와 성모 서로 만나심. 제5처 : 시몬이 예수를 도와 십자가 짐. 제6처 : 성녀 베로니카, 수건으로 예수의 얼굴 씻어 드림. 제7처 : 기력이 쇠하신 예수, 두 번째 넘어지심. 제8처 : 예수, 예루살렘 부인들을 위로하심. 제9처 : 예수, 세 번째 넘어지심. 제10처 : 악당들이 예수의 옷을 벗기고 초와 쓸개를 마시게 하였음. 제11처 : 악당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음. 제12처 : 예수,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 제13처: 제자들이 예수의 성시(聖屍)를 내림. 제14처 ; 예수, 무덤에 묻히심. 파스카의 신비를 생각하여 제15처 : 예수 부활 장면을 묵상하기도 한다.
로사리오의 길
먼저 로사리오(Rosario)란 말은 ‘장미화관’, ‘장미 꽃다발’이란 뜻을 지닌 라틴어이며 묵주(默珠), 혹은 묵주의 기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묵주란 구슬이나 나무알을 열 개씩 구분하여 여섯 마디로 엮은 염주형식의 것으로 십자가가 달려있는 물건이며, 이를 사용하여 성모 마리아께 드리는 기도를 묵주의 기도라 한다. 따라서 로사리오의 길이란 묵주기도를 바치며 묵상하고 걷는 길을 말한다. 로사리오의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도미니코 성인(St. Dominicus, 1170~1221)이 선교하는데 어려움을 당하여 성모께 도와주시기를 기도하던 중, 성모님이 나타나서 묵주를 주시고 묵주의 기도를 널리 전하라고 하셨다는 전설(Alan de la Roche의 Apologia에서), 도미니코회원이 신앙의 진리를 연속하여 설교할 때 작은 주제가 끝날 때마다 주의 기도와 성모송을 합송하였던 설교방식에 유래한다는 설, 12세기 문맹자들이 전례에서 시편 150편의 구절을 읽는 대신 주님의 기도 150회를 3부분으로 나누어 암송하던 관습에서 발전되었다는 설 등이다. 그 뒤로 여러 교황은 로사리오의 역사적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심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칙서를 통하여 로사리오를 널리 권장하였다.
로사리오의 방식은 여러 가지이며, 교황 성 비오 5세의 칙서(1569년)는 그 방식을 표준화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 표준에 따르면 로사리오는 염경기도와 묵상기도로 구성되어 있다. 즉 성모송 열 번과 주의 기도 및 영광송 각 한 번이 모여 한 단을 이루고 그 한 단이 모여 5단 또는 15단이 된다. 묵상기도의 내용은 구원의 역사이며 이를 환희의 신비, 고통의 신비, 영광의 신비로 구분하였는데, 각 신비는 5개의 묵상주제로 이루어졌으므로 모두 15개의 주제가 되어, 염경기도 15단을 드릴 때 각 단마다 각 주제를 묵상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로사리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묵상하면서 염경기도를 드리는 것이요, 가장 먼저, 가장 깊은 체험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사신 성모를 통하여 그분의 신비를 접근하고 친밀해지며 구원의 신비와 일치하면서 성모처럼 인류 구원의 협조자 구실을 할 수 있는 방법이 된다. 성모는 1858년 루르드(Lourdes)에서, 1917년 파티마(Fatima)에서 각각 발현하여 로사리오를 열심히 바치라고 당부하였다. 교회는 로사리오 축일을 지내고 로사리오 성월을 정하여 로사리오에 의한 신심을 장려한다.성모동굴
프랑스 남부 루르드(Lourdes) 성지에서 한 소녀에게 발현하신 성모님 모습
루르드는 오트 피레네도의 타르브 평야에서 그치는 산맥의 마지막 기복과 라브당 산의 일곱 계곡의 물이 흐르는 하구에 위치한다. 루르드의 성채는 피레네의 요새였고, 18세기에는 감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성모 마리아는 1858년 2월부터 7월까지 18회에 걸쳐 벨라뎃다 수비루(14세)에게 발현 하셨다. 연약한 양치기 소녀 벨라뎃다가 친구 및 동생과 함께 땔감을 구하러 들로 나가 개울을 건너려고 양말을 벗을 때였다. 아주 강한 바람소리와 함께 세상의 어느 누구도 감히 견줄 수 없는 아름다운 부인이 저만치 서 계시는 것이었다. 별 말씀 없이 부인은 아기의 천진함과 처녀의 순결함 그리고 모성의 부드러움을 지닌 채 푸른 띠를 나부끼며 정성스레 합장한 손으로 묵주알을 굴리고 계셨다. 성모께서는 동굴 속에서 황금빛의 구름 가운데 발현하셨다.
성모님을 본 14세의 소녀 벨라뎃다는 무릎을 꿇고 묵주기도를 하기 시작하였는데, 성모께서는 고개를 끄덕여 잘 한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오른 팔에 늘어뜨린 묵주를 양손으로 옮겨 잡고 벨라뎃다와 함께 묵주기도를 하셨다.
성모님은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메시지와 함께 죄인들의 회개를 강조하셨고, 발현하신 그 장소(동굴)에 성당을 지어 많은 사람들이 참배할 수 있도록 부탁하셨다.
당시 프랑스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물결의 태동으로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멀리하고 있었던 터라 발현에 대해 말하는 벨라뎃다는 정부 당국과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으며, 발현 장소에 가는 것마저 금지당하기도 했다. 즉 벨라뎃다로 하여금 수많은 군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물이 귀한 그 지방의 마사비엘 동굴에 샘을 파게하시고, 그 물로 불치의 병자들을 속속 치유하기 시작하셨다. 동정 마리아의 루르드 발현은 1862년 공인되었고, 잡목으로 둘러싸인 벽지의 동굴 속에 '원죄없는 잉태'의 성모상이 1864년 최대의 성황리에 안치되었다. 첫 번의 발현 후 그 해 7월 16일까지 모두 18번의 발현이 계속되었다. 8번째 발현하셨을 때 벨라뎃다가 성모님의 이름을 묻자, 성모께서는 겸손한 자세로 고개를 약간 숙이는 듯했다. 그러다가 두 손을 합장하여 가슴 위로 올리더니 하늘을 향해 눈을 들었다. 그 다음 서서히 손을 편 후 벨라뎃다를 보고 감격에 떨리는 음성으로 "나는 무염시태(無染始胎: 원죄없이 잉태되신 분)로다."고 대답하셨다.
무염시태 교리는 그 일이 있기 불과 3년 전에 교황 비오 9세가 선언한 것이었다. 이 대답으로 무지하고 어린 벨라뎃다가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한 것에 대한 의심이 풀렸다.
발현 후 50년동안 4,000건 이상의 난치병 치유 사실이 보고되었고, 신앙의 기쁨을 찾은 이들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1872년부터는 순례자가 더욱 모여들기 시작하였고, 오늘날 그 수는 연간 200만명을 넘는다. 실로암(요한 9:10)과 베짜타 연못 (요한 5:4)에서 행하신 그리스도의 치유능력을 마리아는 오늘도 루르드의 샘을 통해 드러내고 계신다. 또한 육신의 병에 대한 루르드의 기적적인 치료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곳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치유이다. 자기 병을 고치려는 희망을 가지고 루르드에 간 병자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곤 한다. 인공 폐를 장착하며 힘든 병상 생활을 하던 한 사나이는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하느님은 어떤 이유로 인해서 나로 하여금 고통을 당하게 하시는 것 같다. 나는 이것을 나의 천국 가는 차표로 생각한다."
벨라뎃다는 1866년 루르드를 떠나 수녀가 되었으며, 35세를 일기로 1879년 선종하였고 1933년 시성되었다. 루르드의 성모님은 허리에 푸른 띠를 두르고 계신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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