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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은 홍유한 선생이 1775년 3월 10일 60세로 세상을 떠나자, 그해 5월 27일(음 4월 19일)에 유택에서 50리쯤 떨어진 봉화군 봉성면 다덕 약수터가 있는 우곡리의 문수산 중턱에 묘 터를 잡아 안장을 했다. 전승에 따르면, 이 묘 터는 정조(正祖) 임금이 보낸 지관이 터를 잡았다. 1995년 3월 8일 천주교 안동교구는 선생의 후손인 홍관희 선생이 가토(加土)를 하기 위하여 묘지에 도리 석을 쌓으면서 봉분(封墳)의 흙을 파 헤쳤을 때 관을 보호하기 위해 주위를 덮은 석회 위에 두텁게 진흙을 바르고 「山林處士 洪公之墓」라고 숯으로 쓴 명정(銘旌)이 발견되었다.
홍유한 선생 가계 가운데 그 분의 뜻을 이어 피를 흘리며 신앙을 증거안 순교자들은 13명이나 된다. 후손들이 선조 순교자들을 현양하기를 원했으나 각지에 흩어져 있는 선조 순교자들의 유해를 찾을 길 없어 고심하던 중, 선조(先祖)인 홍유한 선생의 묘소가 있는 이곳에 13위(位) 순교자들의 가묘(假墓)라도 함께 모실 것을 안동교구에 청하였고, 교구는 이들의 신앙적 열성을 받아들여 후손과 함께 교구 설정 40주년이 되는 2009년 5월 29일 13위(位) 순교 선조들이 순교한 각 순교터의 흙을 담아 가묘(假墓)를 조성하고 비를 세워 현양하게 되었다.
홍유한 선생의 생애
홍유한 선생은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수덕자이다.
선생의 본관은 풍산(豊山 )이고, 부친 홍창보(洪昌輔)와 창녕 성씨(昌寧 成氏) 훤의 따님인 모친 사이에서 1726년(영조 2년) 서울 아현동에서 출생하였다.
자(字)는 성문(聖文)이며 호(號)는 농은(隴隱)이다.
1742년 16세에 부친의 권고로 당대의 대 유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의 문하생으로 들어갔으며 수학 중 특히 『천실주의』, 『칠극』 등 천주학(天主學)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1757년부터는 권철신(權哲身) · 이기양(李基讓) · 홍낙민(洪樂敏) 등과 더불어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들여와 신앙 공동체를 만들기로 다짐하였고, 자신부터 먼저 신앙적 수계생활(守誡生活)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여러 여건상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게 되자, 1775년 선생은 홀로 소백산 자락 경상도 순흥 고을 단산면 구구리로 이주하여 복음의 깊은 뜻을 실천하며 살았고, 처음 뜻을 같이했던 다른 이들은 1779년부터 천진암 주어사에서 강학(講學)을 시작하였다.
농은 선생은 세례를 받지는 않았지만 강학회원들보다 먼저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이들과도 신앙적으로 깊은 친교를 나누면서 1785년 선종할 때까지 10년동안 천주교 교리를 온몸으로 실천하였다. 이러한 신앙적 열정은 1784년 이 땅에 천주교가 창립되는데 디딤돌이 되었다.
홍유한의 묘소
경북 봉화군 봉성면 우곡리 15-1에 있다. 홍유한 선생이 1785년 3월 10일 60세로 세상을 떠나자 그해 5월 27일(음 4월 19일)에 사신 곳에서 50리쯤 떨어진 봉화군 봉성면 다덕약수터가 있는 우곡리의 문수산 중턱에 묘 터를 잡아 안장을 했다. 이 묘 터는 정조임금이 보낸 풍수가 터를 잡았다고 한다.
1995년 3월 8일 봉화본당 신자들과 선생의 후손인 홍관희 선생이 가토(加土)를 하기 위하여 묘지에 도리석을 쌓으면서 봉분(封墳)의 흙을 조금 파헤쳤을 때, 관을 보호하기 위해 주위를 덮은 석회 위에 두껍게 진흙을 바르고 『山林處土洪公之墓』라고 숯으로 쓴 글이 발견되었다.
홍유한 후손 순교자 13위(位) 가묘 및 현양비
홍유한 선생 가계 가운데 그 분의 뜻을 이어 피를 흘리며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은 13명이나 된다.
이에 지금의 후손들은 선조 순교자들을 현양하고자 하나 각지에 흩어져 있는 선조 순교자들의 유해를 찾을길 없어 고심하던 중, 선조(先朝)인 홍유한 선생의 묘소가 있는 이곳에 13위(位) 순교자를 함께 모실 것을 안동교구에 청하였고, 교구는 이들의 신앙적 열성을 받아들여 후손과 함께 교구 설정 40주년이 되는 2009년 5월 29일 13위(位) 순교 선조들이 순교한 각 순교 터의 흙을 담아 순교자 묘원을 조성하고, 비를 세워 현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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