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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문우 요한 (1809~1839)
    성직자의 영원한 벗


    성 이 문우 요한은 권철신 암브로시오의 외증손으로 경기도 이천의 광주이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경천이라고도 불렸던 성인은 5살 때에 양친을 잃고 고아가 되어 서울의 오 바르바라라는 여교우가 양자로 삼아 서울에서 자랐다. 양부모를 효성 지극하게 섬기며 신앙인으로 자란 성인은 하느님을 위하여 동정을 봉헌할 마음을 먹었으나 양모의 간곡한 권유로 혼인을 하여 가정을 꾸리고 가장으로서의 좋은 모범을 보이며 살았다.

    그러나 성인의 아내와 두 아들이 세상을 일찍 떠나자, 다시는 혼인하지 않고 수덕생활에만 전념하며 교우들을 도와주는데 헌신하였다. 성인은 조선교회가 그렇게도 간절히 바라던 성직자들이 들어오신 것을 계기로 하여 성사를 받고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또한 모방 신부님의 복사가 되어 그 분의 전교 활동을 도와 드리면서 제2대 교구장이신 앵베르 주교님의 뜻에 따라 성직을 준비하는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라틴어와 신학을 배웠다.

    1839년 박해가 일어 활동하시던 성직자들과 교회가 위험에 처하게 되자 더욱더 성직자들을 도와 드렸고 위험을 무릅쓰고 조정의 정세를 알리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다. 앵베르 주교님을 위시하여 자신이 모시던 모방 신부님과 샤스땅 신부님께서 관에 갇히게 되고 교우들이 옥중 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옥중의 교우들을 도와주었다. 주교님과 신부님들께서 순교하시자 7-8명의 교우들과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하신 세 분의 시신을 찾아 노구산에 안장하였다. 그 후 시골로 피신하기 위하여 서울의 교우 집에서 마지막 밤을 지낼 때 갑자기 들이닥친 포졸들에 의하여 체포되어 포도청에 압송되었다. 성인은 체포 당시 한동안 당황하였지만,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는 “천주께서 나를 부르신다. 천주께서 특별한 은혜로 나를 부르시니 어찌 그분의 부르시는 소리에 대답을 아니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포도청에서 포도대장이 “너는 가문도 좋고 나이도 젊으니 문(文)을 숭상하여 고명하게 되고, 무(武)를 닦아 명성을 날릴 수 있거늘 사도(邪道)를 좇아 법을 범하고 부끄러운 죽음을 당할 위험을 무릅쓰니 어찌하여 그러느냐? 무슨 이유가 있어서 그런 행동을 하느냐? 지금이라도 배교하면 대관께 잘 여쭈어서 네 목숨을 구해줄 터이니 깊이 생각해 보아라. 아무 이유도 없이 저 무식쟁이들 모양으로 죽고자 한단 말이냐?”하니 성인은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두려워함은 인지상정이거늘 어찌 즐거운 마음으로 죽기를 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나라 법에 복종하면 우리의 대군대부이며 하늘과 땅과 천사와 사람을 만드신 창조주를 배반하여야 할 것이니 죽어도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대인께서 지금 말씀하신 모든 것에 대하여는 벌써 오래 전부터 깊이 생각하고 결심한 것이니 더 이상 묻지 마십시오.”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포도대장은 술과 음식을 주며 회유하였다. 이에 성인은 “판관께서도 국왕이 명하시는데, 어떤 지방관원이 왕명과 반대되는 것을 명한다면 누구의 말을 듣겠습니까? 이 세상은 제왕들과 관장들이 다스리나 천주님의 명을 받들어 온 세상을 다스린즉 그들은 천주님의 기계와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한즉 왕도 천주님께 복종하여야 합니다.”라고 답하였다. 그리하여 판관은 성인을 배교자들과 도둑들이 갇혀 있는 옥에 가두게 하였다.
    옥으로 가는 도중 성인의 행장을 보고 한 관리가 “네 옷이 훌륭한 것을 보니 돈을 감추어 둔것이 분명하다. 어디 있는지 대라.”함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하니 곤장 20대를 때리게 한 뒤 도로 가두었다. 기실 체포당시 성인의 복색은 흰 두루마기와 보라 명주 저고리를 입고 얼굴빛은 태평한 모습으로 옥에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고 유 바르바라는 증언하였다. 옥에 들어 배교한 교우들을 보자 슬프고 두려운 생각이 들어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 불쌍한 사람들이 혹 나보다 훨씬 훌륭한 생활을 하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타락하지 않았는가. 천주여, 나약함을 붙들어 주소서.”라고 기도하였다.

    또한 성인은 옥중생활로 나약해진 교우들의 신앙을 강하게 이끌고 마침내 순교의 면류관을 얻어 영원한 복락을 누리자고 권면하며 그들의 신앙을 돕기 위하여『옥중제성(獄中提醒)』이라는 천주가사를 지어 함께 기도하게 하였다. 형조로 이감되어 다시 문초를 당하며 배교를 강요당하였다. 하지만 성인은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앙을 증거 하였고, 그곳에 수감되어 있던 다른 열심한 교우들과 더불어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그리고 성인은 양부모와 교우들에게 옥중편지를 썼는데, 그 내용은 옥중 교우들의 신앙생활, 자신의 지난날에 대한 반성과 주님께 대한 사랑, 교우들이 주님 사랑을 저버리지 않도록 권고하였다. 그는 옥에 들어온 지 거의 3개월이 되던 1840년 2월 1일, 다른 두 동료와 함께 서울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순교 후에 교우들이 그의 시체를 찾아 장사지낼 때 그 시체에 빛이 났다고 한다. 그의 나이는 31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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