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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영이 바르바라 (1818~1839)
    원앙을타고 천상에오른 성녀


    성녀 최영이 바르바라는 성 최창흡 베드로와 당고개 같은 형장에서 하루 먼저 순교의 면류관을 받으신 손소벽 막달레나 성녀의 딸로 태어났다. 성녀의 부모는 11남매를 두었으나 어려서 모두 잃고 장녀인 성녀만이 부모님과 함께 살다가 성녀의 아들과 나이가 같은 막내 여동생이 살아 있었다.

    성녀는 어려서부터 부모의 모범을 본받아 신앙생활에 대한 열의로 가득 찼으며, 또 본성이 순량하고 총명하였다. 15세 되던 해에 신부의 강론을 들은 후에 기도와 영적 독서에 전념하기 시작하였으며 성사를 받은 뒤로는 그 열심을 더욱 분발하였다. 20살 되던 해에 부모가 혼인을 시키려 하자 그의 혼인에 대한 소원을 “이렇게 중요한 일에 있어서 지위가 높다든가 낮다든지, 부자라든지 가난하다든지 하는 것은 보지 말도록 하셔요. 저는 그저 열심하고 글을 많이 배운 교우와 혼인하였으면 좋겠어요.” 라고 말씀드렸다.

    이런 성녀의 원의에 따라 문벌과 나이에 큰 차이가 나는 조 신철 가롤로 성인과 혼인을 하게 되었다. 조신철 가롤로는 조선 교회의 성직자 영입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북경을 수없이 넘나들었던 정하상 바오로와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성인에 의해 입교하고 그들을 도와 북경을 오가며 성직자 영입에 공을 세운 열심한 교우였을 뿐 아니라 성인의 부인과 장인 장모 등 온 가족이 체포되어 포도청에 압송되어 가는 길을 따라 갔다가 같이 잡히어 세 분 성직자들이 순교하고 난 며칠 후 “나는 좋은 대로 가니 집안사람더러 뒤를 따라 오라 전하여 달라”하며 나졸에게 부탁하며 서소문 형장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받으신 분이었다.

    성녀는 혼인 후 밀사로서 사선을 넘나들며 교회를 위해 활동하는 남편을 도와주면서 수덕생활을 계속하였다. 박해가 일어나 체포되어 포도청에 압송될 때에 친정어머니이신 손 막달레나와 같이 두 살짜리 아들을 품에 안고 옥에 갇히게 되었고 옥중 생활 도중 함께 고통을 겪을 아들로 인하여 모정으로부터 비롯된 유혹을 견디기 어려워 배교할까 두려운 마음에서 아들을 친척에게 자신을 대신하여 양육시켜 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성녀는 포도대장이 하느님을 배반하고 교우들을 대라는 형문과 중국에서 들여온 남편의 물건들의 출처를 추궁받았으나 “차라리 죽을지언정 천주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 저는 아직 나이가 어려서 사람을 많이 사귄 적이 없으므로 일당을 모릅니다.”하는 대답과 함께 결연히 신앙을 지켰다.

    형조로 이송되어 세 차례의 형문과 260도의 곤장을 맞고 나서 사형 언도를 받았다. 성녀는 옥중에서 한 교우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부모와 남편과 베네딕다 모두 치명하셨습니다. 혈육에서 오는 괴로움이 오죽하겠습니까마는 천당을 생각할 때 도리어 위로가 되고 이 은혜를 주신 천주께 감사합니다. 내 마음은 기쁨이 넘쳐 즐겁기만 합니다.”라고 씌어져 있었다.

    성녀는 모친이 순교하신 다음 날 즉 1839년 12월 28일(양력 1840년 2월 1일) 당고개에서 두 명의 동료 교우와 함께 참수 치명하니 나이 22세였다. 성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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