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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진이 아가다 (1819~1839)
    한국의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 권진이 아가타는 안동 권씨 가문의 한 사람이며 문장과 명필로 이름을 얻었던 진사 권영좌의 딸이며 성녀 한영이 막달레나의 딸로 태어났다. 권 진사는 중년에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외교인이었던 아내에게도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켰으나, 성직자가 없던 조선 교회의 상황에서 영세를 받지 못하고 있다가 임종대세를 받고 가족들도 함께 세례를 받게 되었다. 부친의 유지를 받든 모친은 어린 딸을 데리고 교우의 집에 의탁하여 머물면서 수계생활을 하였다.

    성녀 아가다는 자라면서 빼어난 미모와 굳은 신앙심으로 교우들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았다. 13세에 시골 교우와 혼례를 올렸으나 남편의 집이 너무 가난하여 집에 데려갈 수 없었으므로, 남편의 친척인 정하상 바오로 집에 기거하면서 집안 살림을 맡아보게 되었다. 정하상 바오로와 교우들의 노력으로 두 번째로 조선에 들어와 사목을 하신 여항덕 빠치피고 신부님이 정하상의 집에 머무실 때 성녀의 모친이 신부님의 시중을 드는 살림꾼으로 들어가게 되자 성녀도 함께 도와 드리게 되었다. 신부님은 아가다 성녀를 매우 귀여워 하였고, 성녀가 혼인은 하였으나 동정을 지킬 의향이 있음을 고하자 혼례만 치르고 함께 살기 이전이기에 혼인 무효화를 시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주선해 주셨다. 그러나 신랑 집안의 반대와 반발이 심하였고 성녀의 행실이 교우들에게 좋지 못한 표양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신부님과의 좋지 못한 소문까지 나돌게 되었다. 이 때 조선의 부주교의 직분으로 조선에 들어와 사목 활동을 하고 계시던 모방 베드로 신부님께서 여 신부를 중국으로 다시 돌려보내고 성녀는 권면하여 바른 신앙의 길로 되돌아서게 하셨다.

    이 후 성녀는 자신의 단정하지 못했던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모친과 더불어 수계생활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기워 갚고 하느님께 그 죄의 용서를 얻기 위하여 아가타는 순교하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어머니와 함께 이러한 속죄와 신심생활을 하던 중 1839년 7월 17일 밤 성녀는 어머니와 이 아가타와 힘께 붙잡혔는데, 관원은 어머니만 옥에 가두고 성녀와 이 아가타는 사관청에 두고 옥졸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얼마 후 배교자 김여상이 성녀를 꾀면서 그와 함께 도망치자고 하였으나 아가타는 멸시하는 말로 대답할 뿐이었다. 그러나 다시 포교들이 성녀의 젊음과 아름다움에 마음이 움직여 그녀의 탈출을 도와주었다. 그리하여 성녀는 며칠 후 이 아가타와 함께 도망하였다. 결국 이 사건이 탄로되자 포도대장 이완식이 파직되고 군졸 하나는 사형을 당했으며 둘은 귀양을 갔다. 성녀는 재차 체포되어 온갖 형벌을 수 없이 받았지만 성녀의 신앙은 끝내 흔들리지 않았다.

    형조로 옮겨져 또 다시 3차에 걸쳐 심문과 고문을 당하였지만, 최초의 마음을 꾸준히 지켜 사형선고를 받았다. 성녀의 죄목은 사도(邪道)를 봉행하는 것이 뼈 속에까지 배었고 귀신을 공경하는 것이 본성이 되어 여자 중에 놀랄만한 요술쟁이라는 것이었고, 사형이 언도되어 1839년 12월 27일(양력 1840년 1월 31일) 먼저 순교한 어머니의 뒤를 따라 당고개에서 피를 흘리게 되었으니 성녀의 나이는 21세였다.

    성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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