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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인덕 마리아 (1818~1839)
    신앙의 마중물

    성녀 이인덕 마리아는 1839년 12월 29일에 순교한 이영덕 막달레나 성녀의 동생이다. 성녀의 모친 조 바르바라는 두 딸과 함께 체포되어 옥중 생활을 하는 도중 전염병에 걸려 고생하다가 옥사하여 먼저 순교자의 반열에 들어 하느님 품에 가셨다.

    성녀는 본래 자신의 집에 함께 사시던 외할머니에 의하여 천주교 교리를 듣고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외할머니께서 세상을 뜬 후 부친 몰래 세례를 받았다. 부친은 완고한 성격을 가진데다 천주교를 적대시 하고 있었기에 세 모녀의 세례 사실을 알고 더욱 반대하였다. 더구나 성녀의 언니 이 영덕 막달레나의 혼인 문제를 놓고는 더욱 완강하였다. 하느님을 위하여 동정을 지키며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는 언니의 원의와는 관계없이 외교인과 혼인을 시키려하였다.

    이러한 부친의 뜻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워 성녀의 언니는 단지(斷指) 즉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혈서로써 부친께 자신의 청을 들어 달라 간청하였으나 허사였다. 오히려 부친의 강압과 학대가 날로 심해져 성녀를 비롯하여 세 모녀가 집을 나와 교우 집에 피신하였다. 엥베르 주교님께서 그 연유를 듣고 삶의 길을 열어주시어 교우들과 더불어 기도와 묵상과 독서로 수계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중 1839년 음력 5월에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문초와 형문을 받고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당시 교우들이 수감되어 있던 감옥의 환경은 이와 벼룩은 물론 쥐들이 들끓고 수감자들에게 주어지는 음식도 제때에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옥중 교우들은 불결한 환경과 배고픔으로 오는 고통을 고스란히 참아 받으며 지내야 하였다. 그리므로 무섭게 내리치는 곤장의 아픔도 용감히 견디어 내었던 교우들 중 옥중 생활의 어려움에서 오는 고통 때문에 마음에 약해져 배교하게 되는 안타까움이 많았다.

    성녀가 수감되었던 감옥의 사정도 마찬가지여서 그 해 창궐하던 전염병으로 인해 모친과 두 자매 역시 심한 고역을 치르다가 모친 조 바르바라가 먼저 하느님 품으로 떠나셨던 것이다. 그 후 언니 이영덕 막달레나가 서소문 형장으로 나아가 칼 아래 목숨을 바쳐 하느님을 증거 하였고, 성녀는 해를 넘기기 전 12월 27일(양력1840년 1월 31일) 새해 명절 대목장이 서는 서소문밖 형장을 뒤로하고 당고개에서 동료 교우 여섯 명과 함께 휘광이의 칼날에 아름다운 동정의 월계관과 순교의 월계관을 동시에 하느님께 바쳤다.

    성녀는 “나는 교우요, 죽는 날까지 교우로 있겠습니다.” 라는 말을 남겼다. 성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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