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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로 들러, 순례자가 되어 돌아가는 인월공소
일상을 벗어나 운봉과 인월까지 펼쳐져있는 지리산 둘레길을 걷는다. 자연 안에서 하느님을 느끼며 찬미의 마음이 들 즈음 인월공소(운봉성당 관할, 주임=소명섭 신부)를 만나게 된다. 주일 미사는 오전 9시지만 이미 자리를 가득 채운 신자들은 기도를 하며 미사를 준비 한다. 신자들의 성가 소리는 우렁차고 젊은 신부가 봉헌하는 미사는 힘이 넘친다.
이영석(요한, 요셉회 회장)형제는 내년에 공소 설립 60주년을 맞아 관광객을 위한 안내책자를 만들기 위해 공소의 역사를 정리 중이라 한다.
인월공소의 시작은 아영면 봉대리 숲실이다. 장수 수분리 본당 인근 신자 집에서 머슴살이 하던 임석기(바드리시오)형제가 이사 오면서 전교하기 시작 했는데, 전체 30여 가구 중 20여 가구가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봉대리 교우 이상태(아릭스) 형제는 공소가 이곳에 있는 것보다는 인월 쪽으로 나가야 훨씬 발전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상태 형제는 군 제대 후 1958년경(당시30세) 여러 어려움에도 당시 남원 쌍교동본당 주임 박성운(베네딕토)신부의 허락으로 인월면에 땅을 사고 가건물을 지었다. 그러나 당시 인월면에는 신자가 한 사람도 없어서 공소 건물을 지키기 위해서 아릭스 형제가 가족을 데리고 인월로 이사를 했다. 그는 인월 공소를 중심으로 전교를 시작했고 당시 정부정책에 힘입어 탁아소를 운영하고 인월신용협동조합을 설립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해 아영면 봉대리와 성리에서 인월공소로 판공성사를 드리러 왔다.
당시 여단부대가 남원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군부대에서 나왕과 철근, 시멘트 등 공소건물을 신축할 재료를 공급해주었다. 이에 힘입어 신자들이 협력하여 50여 평의 낡은 건물을 헐고 철근 콘크리트 기둥의 슬래브 건물을 지었다. 10년 만에 공소건물을 다시 지은 것이다. 1971년, 당시 전주교구장 한공열 주교(제4대 전주교구장)주례로 인월공소 신축건물 축복식을 거행했다. 그 후 공소 주변으로 도로가 뚫리면서 현재에 이른다.
파견성가 전 주임신부는 삼겹살 드실분 만 상추를 가져가라고 농담 섞인 말씀을 한다. 정자 위에 놓인 상추는 전신자가 넉넉히 가져가고도 남을 정도로 넘친다.
서우교(분도, 현 공소회장) 형제는 “인월은 예로부터 전라도에선 생선장수가 노고단을 넘고 경상도에서는 소금장수들이 팔령제를 넘어 인월의 산나물 장수들과 만나 어우러져 5일마다 큰 장터를 벌이던 곳”이라고 설명한다. 경상도 마천에 사는 이성기(마인라드)형제는 공소가 위치적으로 가깝기도 하고 가족적인 분위기에 인정이 넘쳐 교적을 옮기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고 한다. 교중미사 때는 51가구 80여 명이 참례해서 공소를 가득 채우고 귀촌과 귀농을 한 젊은 신자들이 있어 매주 토요일 어린이 미사에는 10여 명의 어린이가 참례한다. 또한 매월 둘째 주에는 점심식사 후 어르신들을 위한 민들레 학교를 운영하며 만들기, 실버댄스 강습도 진행하며 소박하지만 활발한 공동체로 살아가고 있다. 서 분도 형제는 피서철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많은 관광객들로 인해 자리가 부족해 성당밖 마당에 간이의자를 놓고 미사를 봉헌하는 모습을 보면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한다.
인월공소 신자들이 손꼽는 최고의 자랑은 올해 신학교에 입학한 허 스테파노 신학생이다. 허 스테파노 신학생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독실한 싱앙생활을 보며 성소를 키웠다고 한다. 이처럼 신앙선조들의 모범을 보고 자란 이들이 다시금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신앙전파에 깊은 성찰을 해본다.
취재 | 송병근 기자(교구 기자단), 사진 | 윤영, 원금식(교구 가톨릭사진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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