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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순례지 정보
순교자들의 피의 꽃으로 피어난 숲정이성지
063-255-2677
숲이 칙칙하게 우거져 있어 숲정이로 불렸던 이곳은 조선시대 군사훈련장이었다. 이 근처에는 피 묻은 칼을 씻을 수 있는 전주천이 있었기에 사형장으로도 사용되었다.
신유박해(1801) 때 ‘호남의 사도’ 유항검의 가족의 일부(신희, 이육희, 이순이, 유중성)와 동료(김천애 등)가 순교한 이후로 천주교인들의 피가 마르지 않았던 곳이다.
기해박해(1839) 때는 12년간 전주옥에 수감되어 있던 5명(이일언, 신태보, 이태권, 정태봉, 김대권)과 많은 신자(홍재영, 최조이,이조이, 오종례 등)들이 순교했다. 병인박해(1866) 때는 6명(이명서, 손선지, 정문호, 한재권, 조화서, 정원지)이, 1867년에도 많은 신자들(김사집 등)이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숲정이 순교터는 후에 이명서 성인의 후손이 매입해 순교자비를 세웠다.
숲정이 순교터는 도지정 기념물 제71호이다.
성 조윤호의 순교터 서천교성지
063-284-3222
서천교는 병인박해때 순교한 조윤호 성인의 순교터이다. 조윤호는 조화서 성인의 아들이며, 1839년에 치명한 조 안드레아의 손자로, 부친 조화서와 함께 완주 소양 성지동에 살다가 함께 잡혀와 부친이 참수된 지 열흘 뒤에 서천교에서 밧줄로 목이 졸려 순교했다.
그는 전주 감영 에서 부친과 여러 차례에 걸친 신문과 형벌을 받았으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끝까지 신앙 을 지켰다. 부친이 형장으로 갈 때에는 서로 천국에서 만날 것을 기약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부자를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같은 칼로 처형할 수 없다는 국법에 따라 부친이 참수된지 10일 뒤인 12월 23일(혹은 12월 18일, 12월 28일) 전주 서문 밖 서천교 형장에서 모진 매를 맞았지만, 죽지 않아 끝내는 밧줄로 목을 졸라 사형시켰다.
당시 그의 나이 18세였다.
남명희와 홍봉주의 아들이 수장당한 순교터 초록바위성지
063-284-3222
초록바위는 병인박해(1866)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남종삼의 큰아들 남명희와, 남종삼과 함께 순교한 홍봉주의 아들을 교수형으로 죽인 후 전주천으로 밀어넣어 수장시킨 곳이다.
남종삼이 처형되고 난 후 그의 부친 남상교와 큰아들 남명희는 공주 감영으로 이송되었는데, 할아버지와 손자를 한 감옥에 가두지 않는다는 국법에 따라 14세였던 남명희는 전주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전주 감영으로 이송된 남명희는 국법에 따라 성인(15세)이 되는 이듬해까지 처형을 연기하고 옥에 가두어 두었다. 그후 이듬해에 이곳 전주천 옆의 초록바위에서 교수형으로 죽인 다음 그 시신을 전주천에 수장 시켰다.
남명희 집 안은 3대가 순교의 영광을 입었다.
한국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성지 전동성당
063-284-3222
미사시간
월 : 오전 5시 30분
화,목 : 오전 5시 30분 / 오후 7시
수,금 : 오전 5시 30분 / 오전 10시
토 : 오전 5시 30분 / 오후 4시 / 오후 6시
일 : 오전 5시 30분 / 오전 9시 / 오전 10시 30분 / 오후 5시 / 오후 8
전동성당이 세워진 자리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풍남문 밖, 현 전동성당 자리는 신해박해(1791)때,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이 유교식 조상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웠던 진산사건으로 순교한 곳이고, 또 ‘호남의 사도’로 불렸던 유항검과 그의 동료들이 신유박해(1801) 때 순교한 곳이기 때문이다.
전동본당의 초대 주임신부는 프랑스인 보두네 신부였다. 1889년 전주본당이 설립되고 보두네 신부가 부임했지만, 당시 전주에는 신자가 한 명도 없어 처음에는 완주 소양 대승리에서부터 시작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1891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고, 1908년에 성당 건축을 시작했으며 설계는 명동성당을 설계한 프와넬 신부가 했다. 보두네 신부를 통해 이곳에 성당이 건립된 일은 하느님의 섭리였다. 보두네 신부 자신도 이곳이 순교터인 줄은 몰랐지만 순교자들의 피가 서려있을 법한 전주성 성벽의 돌과 흙으로 주춧돌을 세웠는데, 바로 그곳이 순교터였기 때문이다.
전동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써 사적 제 288호 이고 사제관은 도지정 문화재 자료 178호이다.
심문과 형벌의 장소이자 기도하던 곳 전주옥터
063-284-3222
전주옥은 신유박해(1801)때 동정부부인 유중철과 그의 동생 유문석이 그해 10월 9일 옥중 교살된 곳이다. 정해박해(1827) 때는 240여 명이 넘는 천주교인들이 감금되어 문초를 받았다. 이때 이순이의 동생 이경언도 이곳에서 옥사했다. 기해박해(1839) 때는 김조이, 홍봉주 토마스의 아내 심조이가 옥중 생활에서 얻은 병과 형벌로 인한 상처로 옥중에서 순교했으며, 한국 천주교 순교 역사상 가장 어린 이봉금이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이때 이봉금의 나이는 만으로 12세를 넘지 못하였다고 한다. 박해시기에 옥은 고통스런 곳이었지만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기도처였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증거하는 곳이었다.
기해박해(1839) 때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이들 중에는 정해박해(1827) 때 잡혀와 만 12년간을 옥중에서 긴긴 세월을 보낸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옥중에서도 밤마다 등불을 켜 놓고 함께 성경을 읽으며 큰소리로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한때 이 옥에는 240여 명의 교우들이 갇혀 있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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