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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월리공소의 본당 승격 기월리공소는 1935년 6월 15일 신설된 황리본당에 소속되어 있던 중 1939년 5월 14일 드디어 본당으로 승격하게 되었다.
부산본당을 위시하여 50년 동안 모본당이 여섯 번이나 바뀌는 변화무쌍한 가운데서도 고성지방의 신앙은 더욱 성장하여 그 뿌리가 깊숙이 내리게 되었다.
이와 같은 변화는 경남지방 특히 고성지방 교세가 날로 급증하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기월리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자 황리본당은 고성본당의 공소로 격하되었다.
본당 승격 후 경북 안동본당 주임으로 있던 서정도(베르나르도) 신부가 고성본당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재임기간 : 1939.5.- 1942.5.). 교세도 확장되고 신자 수도 나날이 늘었다.
공소로 사용하던 목조건물은 성당으로 사용하기엔 너무 협소하여 성당을 옮겨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리하여 고성읍 송학동 양잠학교를 경영하던 곳을 물색하여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시작하였다.
대구교구청의 지원으로 송학동에 성당을 마련했고, 교우들의 희사로 사제관과 성전 내부공사를 했다.
3) 새성전의 건립 초대 주임 서정도 신부 이후 부임한 제2대 주임 장병용(요한) 신부, 제3대 주임 최민순(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 그리고 제4대 주임 정 에밀리오 신부가 재임하던 시기는 일제 탄압과 패망에 즈음한 매우 어수선한 격동기였다.
이러한 어려운 시기를 보낸 후 부임한 제5대 주임 이중현(요한) 신부 때에는 6.25동란으로 교회가 수난을 당하였다.
북한 공산군은 파죽지세로 진주, 사천을 점령하고 고성군 상리면에 진입했다.
이 소식을 들은 청년들은 성당 내의 십자고상, 성작, 성반, 14처와 그밖의 비품과 도서, 제의 일체는 물론 제대까지도 기월리에 있는 교우 허화영의 뒷산에 매몰하였다.
고성읍내는 북한 공산군에 점령당하고 성당은 북한군의 의무본부로 사용되었다.
북한군이 물러 간 후에 매몰했던 성물을 발굴했으나 십자고상과 14처만 보존되었고 다른 성물은 부식되어 사용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이중현(요한) 신부가 부임할 때까지 6년 동안 상주하는 주임신부의 부재로 말미암아 선교의 침체가 불가피하였다.
이 기간 중에는 서울에서 피난온 임충신, 정수길, 박동준 신부가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지도하였다.
1954년에 들어서자 교우들은 북한군에 의해 파괴된 성당을 읍내의 중심지로 이전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신부가 없어서 교우들은 장병용(요한) 신부를 찾아나서게 되었고 장 신부의 소개장을 들고 대구교구 성서국장을 하던 서정도(베르나르도) 신부를 찾아가 교구장 면담을 하였다.
그래서 1954년 5월 제5대 주임 신부로 이중현(요한) 신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본당은 다시 활력을 되찾게 되고 교구 지원금과 송학동 성당부지와 건물을 매각한 돈으로 동의동에 대지와 건물을 매입하게 되었다.
새로 마련한 건물은 일본사람이 경영하던 병원자리였는데 나환자 진료소였다고 하여 신자들이 거부감을 나타내어 본당사목과 전교활동에 지장이 있었다.
이에 이중현 신부는 다른 곳으로 대지를 물색하는 한편, 새성전건립 계획을 세우고 신자와 신부의 노력으로 벽돌을 찍게 되었다.
당시 이중현 신부는 지병(폐결핵)으로 각혈까지 하면서도 성전 건립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고, 전쟁 후라 호구지책에 어려움이 있기에 신자들의 모금으로 성전을 건립하는 계획에 차질이 생기고 빚더미에 앉을 무렵, 부산교구 장병화(요셉) 신부의 주선으로 부산교구청의 지원을 받아 드디어 1957년 6월 16일 건평 109평의 성당과 건평 92평의 사제관을 완공하였다.수녀회 : 예수 성심 시녀회
주보 : 성 미카엘 대천사
신자수 : 2,846
공소수 : 3 -
새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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