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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 정보
상세설명
박해시대 한국교회의 심장 황새바위순교성지
황새바위 : 충청남도 지정문화재 제178호
공주에 있는 황새바위 순교성지는 조선 천주교회 박해 역사 100년 동안 가장 많은 순교자들이 처형된 장소로 이름이 확인된 순교자가 337위에 이르고, 무명 순교자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공주는 조선시대에 충청감영이 있던 중심 도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충청도 전역의 신자들이 체포되어 배교하지 않으면 공주로 압송되어 최종 문초 고문 판결 처형되었고, 다른 지역의 신자들도 공주로 보내 최종 형을 집행 하였다.
황새바위 순교성지에서 기려야 할 순교자로는 병인박해 때 향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한 손자선 토마스 성인이 있고, 신유박해 때 참수 치명한 내포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 순교자가 있다. 또한 124위 복자 이국승 바오로, 김원중 스테파노, 청양 정산에서 순교한 이도기 바오로가 있다.
황새바위 순교성지는 충청남도 문화재 제178호로 지정되어 있다. 성지 안에 성당과 성체조배실이 있고, 언덕을 오르면 십자가의 길, 성모동산, 순교탑, 무덤경당, 부활경당, 묵주기도의 길이 있다.
또한 맞은편에는 둘러서서 순교자들의 처형 장면을 지켜보던 공산성이 있는데, 백제 왕도의 성곽인 공산성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성지 미사
주일: 오전 11시
평일: 오전 11시(월요일은 오전 9시 30분)
피정·식사 가능(사전 예약 필요)
순례자의 집 이용안내
황새바위순교성지 안에 자리한 순례자의 집은 하느님과의 만남을 갈망하는 모든 분들이 고요 안 에서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를 통해 영혼의 쉼을 얻도록 마련된 집입니다.
시설 : 방 3, 거실, 주방, 화장실 1(욕실겸용)
인원 : 개인, 가족, 그룹 등 10명 이내
이용요금 : 전화 문의 바람
순례코스1(짧은코스)
1코스: 01.성전 → 02.기념관 → 03.순교자광장 → 04빛의길 → 05부활경당 → 06십자가의 길2 → 07 부활광장
순례코스2(긴코스)
01성전 → 02십자가의길1 → 03순교자광장 → 04묵주기도의길 → 05부활광장 → 06부활경당
성지 순례
예수성심상
성지를 찾아오는 순례자들은 두 팔 벌려 맞이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 성심상은 사랑의 근원이신 예수님께서 인류를 사랑하시는 마음의 표현이며, 인간의 응답을 바라시는 예수님의 원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돌문
돌문은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태 20,28)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나 자신을 낮추며 기도의 준비를 하고, 기도를 마치고 다시 세상을 향해 나갈 때는 머리를 숙이는 겸손된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돌문의 이름은 특별히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바늘귀 문이라, 또 어떤 이들은 천국의 문이라 부릅니다. 순례하시는 각자의 느낌이 바로 돌문의 이름이 될 것입니다.
순교탑
순교탑은 순교자들이 처형당할 때 사용되었던 칼을 서로 맞대어 놓은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개의 칼이 상징하는 것은 세상에 대한 칼과 부활의 삶을 살아가는데 우리에게 다가오는 수많은 유혹의 칼입니다. 세상과 나를 향한 두 개의 칼날이 무뎌지지 않고 날카롭게 서 있을 때, 참된 생명의 삶을 살아갈 수 있으며, 그 속에서 하늘로 향하는 계단을 한걸음 디딜 수 있을 것입니다.
열두개의 빛돌
이 돌들은 열 두 사도를 상징하며 동시에 이곳에서 순교하신 337명과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비석입니다. 그래서 아무 이름도 쓰여 있지 않으며 투박하고 거친 모습 그대로 서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주춧돌인 열두 사도와 한국 천주교회의 주춧돌인 순교자들의 모습이 이 돌 안에 담겨 있습니다. 또한 투박하고 거친 돌덩어리의 모습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열두개의 빛돌을 바라보면서 우리를 지어내신 하느님 아버지께 조금 더 다듬어 주시기를, 단련시키며 정화시켜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해 봅니다.
무덤경당
예수님의 돌무덤을 형상화한 무덤경당은 죽음과 부활이 함께 공존하는 곳입니다. 돌무덤은 죽음이라는 종말과 부활이라는 새로운 시작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로마 6,8)라는 성경 말씀처럼 순교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그분과 함께 살아계시는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경당입니다.
부활경당
부활경당은 단순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으로 영원한 부활의 진리를 노래하는 경당입니다. 경당 안에는 4000여점의 백자 도자기 평판 벽화 작품들이 모여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저 흙에 지나지 않았던 것들이 색을 입고, 색을 입은 흙이 1,250도의 뜨거운 불에 의해 재탄생되어 각각의 의미를 담으며 환희의 찬가를 부르는 순교자들과 신앙인들의 마음이 생생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야외제대(337위호칭기도)
부활 광장에는 큰 돌 제대와 12개의 거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제대 돌은 다듬지 않은 자연석으로서 황새바위의 가치를 기리기 위해 옮겨 놓았습니다. 그리고 12개의 거석들은 12사도와 순교자들을 상징합니다. 거석 뒤에는 337위의 순교자들의 이름을 새겨 놓았습니다.
성모동산
1846년 11월 2일 한국교회의 제3대 교구장이신 페레올 주교님과 다블뤼 안 안토니오 신부님은 공주시 신풍면 봉갑리 작은 오두막집에서 몇 명의 신자들을 모아 ‘성모성심회’를 조직하고, 나흘 뒤 그 본부가 있는 프랑스 파리 승리의 성모 대성당 주임 신부(성모성심회 창설자)에게 보고를 하여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성모성심회’라는 신심 단체가 창설되게 됩니다. 또한 1861년 당시 공주에서 사목하던 조안노(P.JOANNO, 오 베드로) 신부님은 공주 전 지역을 성모영보(예수 탄생 예고) 구역으로 선포합니다. 성모님의 특별한 보호아래 성모님께 대한 신심을 키운 곳이 바로 공주입니다. 한국 땅에서 처음으로 성모님께 우리의 마음을 봉헌해 드린 특별한 곳에서 어머니께 간절한 도움을 청한다면 그 모든 것을 헤아려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성전
신앙선조들의 순교신앙을 본받고 기리기 위해 조성된 성지에 2001년에 축성된 성전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성전 안에는 예수님의 가시관과 순교자들이 받은 칼날을 상징하는 원형의 스테인드글라스와 십자가의 길이 마련되어 있으며, 목숨을 바쳐 순교한 신앙의 여정을 기도하고 묵상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십자가의 길(순교자 언덕)
주님께서는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하신 말씀으로 저희도 주님을 따라 이 길을 가도록 초대하셨습니다. 삶의 순간순간마다 마음을 다하여 주님께서 가신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청하며 '목숨을 버림 으로써 참된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는 사랑의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황새바위기념관
황새바위기념관은 천주교 유적지로서의 역사성과 신앙선조들의 순교정신을 알릴 수 있는 성물(聖物)과 고서(古書), 형구(刑具) 등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황새바위기념관은 황새바위순교성지와 순교자들에 대한 기억을 지속적이고 인상적으로 간직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도움을 주기 위한 공간입니다.
축복하는 예수님
성부(손), 성자, 성령(비둘기)께서 함께 하고 계시는 일체 구도로 중앙에는 박해와 순교의 험난한 길 가운데서 굳건한 믿음을 지켜내셨던 황새바위 순교자들을 축복하고 계시는 예수님께서 구름 위에서 계십니다.
묵주기도의 길
삶과 죽음과 부활로써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마련해주신 하느님의 외아드님의 삶을 복되신 동정마리아와 함께 묵상하며 묵주기도의 길을 따라 기도합니다.
황새바위 십자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형상이 음각부조의 형태로 십자가 정면에 새겨져 있고, 그 아래로는 아담의 해골이 작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십자가 앞으로는 오상을 입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온화한 미소로 우리를 맞이하며 서 계십니다. 십자가 뒷면에는 한국교회 초기 공동체 신앙인들의 터전과 감영과 향옥, 제민천변에서 순교하신 순교자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으며 그 위로는 순교한 영혼들이 천사들과 함께 천상의 세계로 올라가는 모습이 보입니다.근접 도보순례 가능 성지
공주지역 순교터 6곳
황새바위성지 → 충청감영터(포정사) → 향옥터(교동성당) → 진영터 → 중동성당 → 장깃대나루황새바위의 순교자
손자선 토마스 (1844-1866)
충청도 홍주 거더리 마을에서 3대째 천주교를 믿으며 순교자를 배출한 열심한 신앙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고 며칠 후, 포졸들이 거더리 마을에 들어와 신자 집을 샅샅이 뒤져 많은 물건을 빼앗아 가면서, “손씨 집안에서 누구든 사람을 보내 몰수된 물건을 찾아가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를 받고 손 토마스가 자진하여 덕산 관가에 나갔다가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관가에서는 갖은 고문으로 그의 의지를 꺾으려고 애썼으나 모두 허사였고, 곤장을 치다 못해 다리를 묶어 거꾸로 매달았다. 그리고는 토마스의 입에 여러 가지 쓰레기를 쏟아 부으면서 조롱하였지만 토마스가 굴하지 않자 덕산 관장은 그를 해미로 압송하였다. 그는 해미에서 두 다리가 부러질 만큼 더 심한 형벌을 받았으나 신앙을 지켰다. 그는 말했다.
"나도 솔직히 죽는 것을 몹시 무서워합니다. 그러나 죽는 것보다 몇 천배 더 무서워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나의 주님이시오,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저버리는 일입니다."
마침내 공주 감영으로 압송되었다. 공주에서 관장은 “네가 배교하지 않는다는 증표로써 이빨로 너의 손 살점을 물어뜯어 보아라.”고 하자, 토마스는 즉시 자신의 양팔을 물어뜯어 피가 흐르게 하였다. 결국 토마스는 공주 감영으로 압송되어 1866년 3월 31일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존창 루도비코 (李存昌, 1752-1801)
충청남도 예산의 농민 출신의 학자로, 초기 천주교회 창설자의 한 사람인 권일신(權日身)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 뒤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하에 신부가 되어 충청도 지방을 맡아 전교에 힘쓴 결과 ‘호남의 사도’ 유항검과 같이 ‘내포(內浦)의 사도’로 불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가성직제도가 교리에 어긋남을 알고는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하여 윤유일(尹有一)에게 여비를 주어 중국 북경에 보냄으로써 마침내 주문모(周文謨)신부를 맞아들일 수 있게 하였다.
1791년(정조 15) 신해박해 때 체포되어 혹심한 고문에 못 이겨 한 때 배교하여 홍산 (鴻山, 부여지역)으로 이사 갔으나, 전날의 배교를 뉘우치고는 더욱 열심히 전교함으로써, 내포와 그 인근지방은 다른 어느 고장보다도 천주교가 가장 성하였다.
그의 조카딸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金大建)의 할머니였고, 최양업(崔良業)신부는 그의 생질의 손자가 되는 등, 조선 말기의 신자 중 대부분이 그가 입교시킨 신자들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으리만큼 그의 전교상 공헌은 지대하였다.
1795년 말에 그는 다시 체포되어 고향인 천안으로 옮겨져 6년 동안 연금생활을 하던 중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다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4월 8일 정약종(丁若鍾) 등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아 공주감영으로 이송되어 참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