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의 석축산성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축산성으로 평가되며 신라 자비마립간 13년(470) 축성을 시작한지 3년만에 완성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보은 삼년산성 (報恩 三年山城)
사적 제235호
지정일 : 1973.05.25
면적 : 232,655㎡
시대 : 삼국시대
잘 생긴 성 삼년산성
어느 지역을 여행하면서 잘 생긴 산성에 올라 거닐 수 있다면 그 자체가 복이다. 보은 삼년산성이 그랬다. 생김새가 잘나 보여 잘생긴 것이 아니라, 생겨야 할 곳에 생겨 잘 생겼다는 이야기지만 막상 성을 가보니 그 생김새도 웅장하다. 산성에 전망대가 있다하여 올라보니 성 자체가 전망대이자 그 전망 막힘이 없다. 둘러볼수록 참 잘 생긴 성이란 생각이 드는 삼년산성이다. 성벽위로 만들어 놓은 전망대 두 곳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성의 남쪽 성벽의 전망대에 올라 서쪽을 바라보니 보은 시가지와 보은의 곡창, 너른 들녘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너머 남청주-상주간 고속도로가 지나며 보은IC를 만들어 놓으니 보은의 교통사정은 더 좋아졌다. 정남쪽은 앞의 봉우리가 시야를 가려 그 왼쪽으로 시선을 옮겨본다. 속리산IC에서 속리산으로 접어드는 길목 장내리가 멀리로 조망된다. 시선이 여기에 미치자 동학도들이 모여 함께 살았던 땅이자 그들이 최후를 맞이한 땅 보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Photo #01 삼년산성 어귀의 문화재 안내판. 이 산성은 사적 제235호로 공식명칭은 보은 삼년산성이다. 면적은 232,655㎡로 1973년 5월 25일 지정되었다.
Photo #02 서문지 북쪽 성벽에서 바라본 삼년산성. 사진의 남쪽산성은 보수가 끝났고, 현재 북쪽 성벽은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성벽 바깥으로 반원형의 옹성을 만들어 방어력을 높이는 수법은 신라의 성 축조에 있어 기능적 특징이다.
Photo #03 남쪽 성벽의 전망대. 멀리 장안면 일대가 조망된다. 전망대에 설치된 안내판은 보은 대야리고분군에 관해 알리고 있다. 대야리고분군은 신라 최대의 고분군으로 신라의 묘제와 신라 지방문화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있다한다.
Photo #04 북쪽 성벽의 전망대. 동쪽을 바라보면 속리산으로 넘어가는 길목 말티재가 조망되며 동학농민혁명군 전적지가 조망된다. 사진의 왼쪽이 전적지이다.
동학농민혁명지 보은, 그 역사의 현장을 조망하다
장내리는 동학의 2대교주 최시형이 조선정부의 탄압을 피해 몸을 숨긴 채 동학을 전파했던 중요한 근거지이자 교세를 떨쳤던 약속의 땅이었다. 이 마을에 동학대도소를 설치하여 운영하던 때, 마을 민가 외에도 400여 채의 초막이 있을 정도로 동학도들이 모여 살았다. 그러나 1894년 북접 동학농민혁명군이 마을로 집결한 후 우금치 전투를 위해 마을을 떠난 다음 이두황이 이끄는 조선 관군이 마을로 들이닥쳐 400여 채의 초막과 민가를 불살라 마을을 초토화시킨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성의 북쪽 전망대에 오르면 북접 동학농민혁명군이 최후를 맞은 통한의 전적지가 조망된다. 전봉준이 이끄는 남접 동학농민혁명군과 논산에서 합세하여 벌인 우금치전투에서 패한 북접동학농민혁명군은 집결지였던 장내리로 되돌아오지만, 철저하게 파괴된 마을에서 머물 수 없었다. 망연자실 전쟁에 패하고 근거지마저 잃은 북접농민군은 장내리에서 북쪽으로 8km 떨어져있는 북실에서 밤을 보내게 되지만, 이들을 뒤쫓던 관군과 일본군의 새벽 기습에 모두 학살당하는 비운을 겪는다.
보은의 동학대도소를 중심으로 전국에 전개된 동학농민혁명은 우리나라 근대사의 민족적 민중항쟁이다.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반외세, 반봉건의 기치를 전면에 내걸었던 이 혁명은 18살에 동학접주가 되어 이듬해 황해도 동학농민군의 선봉장에 선 것을 시작으로 일본인 밀정 살해, 신민희 및 상해임시정부 활동, 광복군 조직 등 민족지도자의 길을 올곧게 걸어온 백범 김구선생의 생애를 통해서도 그 정신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은 현대에 전개된 4.19의거,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의 정신적 본령을 이룬다.
Photo #05 널리 농경지가 발달한 분지의 왼쪽 산자락이 장내리이다.
Photo #06 사진의 왼쪽 작은 산 사이 농경지가 있는 곳이 북실이다. 사건 당시 12개의 마을로 이루어져있었다. 북실 오른쪽 길 건너에 동학농민혁명군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Photo #07 남쪽 전망대에서 바라본 성의 서쪽 풍광이다. 보은군 시가지가 오른쪽으로 보이고 완쪽으로 보은의 곡창지대가 보인다.
Photo #08 북쪽 전망대에서 바라본 성의 북서부 풍광. 남쪽 곡창지대의 연장선상 곡창지대다. 남에서 북으로 길게 분지가 조성되어 있는 것이 보은의 지형이다.
Photo #09 북쪽 전망대에서 바라본 성의 동부. 멀리 보이는 산이 말티재가 지나는 산이다. 재 너머 산이 봉우리를 내밀고 있는 지점이 말티재다.
Photo #10 성의 서북쪽 북실전적지 길 건너편에 조성되어있는 동학농민혁명군위령탑 전경. 북실이 바라다보이는 자리에 탑은 위치하고 있다.
신라 교통의 요지 보은의 군사전략적 요충 삼년산성
554년 신라와 백제의 격전은 주목할 만하다.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맺은 신라·백제의 120년 나제동맹이 깨지는 역사의 회오리에서 신라가 대승을 거두는 중심에 삼년산성이 있었다. 신라가 동맹관계인 백제의 땅 한강 하류를 점령하자, 신라의 배신에 격분한 백제의 성왕이 대군을 일으켜 옥천에 있는 신라의 관산성을 침공한 사건에서였다. 관산성 전투의 처음은 백제가 우세했으나 보은 삼년산성에 주둔하고 있던 신라의 장수 고간과 도도가 관산성으로 출병하여 성왕을 죽임으로 전세는 역전된다. 이후 백제장수를 포함한 3만의 백제군이 전사한다. 928년에 이르러서는 삼국통일 위업을 이룬 고려 태조 왕건(918∼943)을 크게 물리친 전력도 이 산성은 갖고 있다.
충주 단양의 북부지역, 청주, 진천, 괴산 등의 중부지역, 옥천, 영동의 남부지역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 보은의 길목 모두가 조망되는 지점에 자리 잡은 삼년산성은, 신라가 백제·고구려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역할을 하기에 충분했다. 성의 입지와 성의 축조기술, 삼국통일을 노리는 신라의 군사적 전략 등 삼박자가 잘 맞아떨어진 삼년산성은 삼국시대를 통 털어 단 한 번도 점령당하지 않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Photo #11 삼년산성 서쪽벽. 보기에도 웅장한 이 성이 축조이후 정복당한 적이 없는 철옹성이라는 것을 눈으로 느낄 수 있다.
Photo #12 성벽에서 바라본 보은읍 일대. 멀리 보은 시가지가 보인다.
Photo #13 반원옹성에 올라 바라본 서쪽 성벽. 서벽의 북부는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Photo #14 반원옹성에서 바라본 성벽 외곽. 앞에 보이는 부분은 보수이력이 없는 벽으로 1500년 세월이 묻어난다.
Photo #15 남문지 인근에서 바라본 서문지 풍경.
Photo #16 동문지 전경. 문 밖은 절벽을 이루고 있다. 땅의 바닥이 아니라 성을 쌓아올리고 창을 내듯 성문을 낸 특징을 갖고 있다. 남문도 같은 형식이다.
Photo #17 동문지 풍경. 성밖을 살피기에 좋은 위치에 성문이 나있다.
Photo #18 북문지 전경.
Photo #19 북문지 근경. 문 밖으로 공간을 마련해놓은 이곳을 오르려면 성 밖에서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야하는 구조다.
Photo #20 서쪽 성벽 남부의 모습.
천혜의 성지에 일군 삼년산성 1500년 세월을 넘다.
삼년산성이 있는 곳은 보은의 오정산이다. 보은군 최대의 곡창지대 복판에 솟아있는 오정산은 해발 325m이지만, 보은 분지 자체가 200m가량의 고지여서 125m 언덕정도의 낮은 산세를 이룬다. 남·동·북 방향은 능선으로 이어져있고 서쪽으로는 트인 지형의 산이다. 물이 흐르는 산의 가운데는 분지가 발달하여 사람이 지내기에 더없는 자연적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산의 능선에 올라서면 동·서·남·북 방향 모두 보은 분지가 조망된다. 천혜의 성지인 셈이다.
오정산이 군사·지리적 천혜의 성지인 만큼 신라는 성 쌓기에 국력을 쏟아 붓는다. 성벽 두께 8~10m, 성벽위로 2차선 도로를 여유 있게 낼만큼의 넓이이다. 높이 13~20m의 성벽은 내외벽 안에 흙을 넣지 않고 돌을 사용해 견고함을 더했다. 신라 자비왕 13년(470)에 3년의 공사 끝에 쌓아 ‘삼년산성’이라 했다는 이 성은, 소지왕 8년(486)에 3000명의 인부를 징발하여 고쳐 세웠을 정도로 웅장함을 과시한다. 1500년을 너끈히 버티어 오늘에 이른 이유다.
Photo #21 천오백년 세월을 그대로, 남쪽 성벽.
Photo #22 천오백년 세월을 그대로, 동쪽 성벽 원경.
Photo #23 천오백년 세월을 그대로, 동쪽 성벽 근경.
Photo #24 천오백년 세월을 그대로, 동쪽 성벽 근경.
Photo #25 천오백년 세월을 그대로, 북쪽 성벽 원경.
Photo #26 천오백년 세월을 그대로, 북쪽 성벽 근경.
Photo #27 천오백년 세월을 그대로, 북쪽 성벽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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