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사 낭원대사 탑비(塔碑)
보현사에 있는 고려 초기 승려 개청(開淸)의 탑비(塔碑)로 보물 192호로 지정되어 있다.
비의 원명은 ‘고려국명주보현산지장선원낭원대사오진탑비'
(高麗國溟洲普賢山地藏禪院朗圓大師悟眞塔碑)이다.
개청은 930년 9월 24일에 96세로 세상을 마감하였다.
입적한 지 5일 뒤인 28일에 보현사에서 300보쯤 떨어진 서봉(西峰) 석실(石室)에 장사를 지냈다. 신경(神鏡)·총정(聰靜) 등의 제자와 많은 사람들이 스님의 가르침을 사모하여 여러 번 표(表)를 올려 시호와 탑호를 내려줄 것과 비문을 찬(撰)해 달라고 조정에 아뢰었다.
10년 뒤 태조가 삼한(三韓)을 평정한 뒤에 시호와 탑호를 내리고 탑비를 세우도록 허락하면서 최언위(崔彦撝)에게 비문을 찬하도록 하였다. 글씨는 명서예가인 구족달(仇足達)이 썼으며, 각자(刻字)는 임문윤(任文尹)이 하였다.
비석의 귀부는 네모난 대석(臺石) 위에 놓여 있는데, 머리는 용머리 같이 조각하였다.
귀갑(龜甲)은 6각형의 벌집모양으로 표현되었다. 등 중앙에 구름무늬로 장식한 높은 비좌(碑座)를 마련하고 비신(碑身)을 세웠다. 비신의 상단(上端)에는 앙련(仰蓮) 받침이 있고, 이수(螭首)는 구름 가운데 쌍룡(雙龍)이 여의주(如意珠)를 다투는 모습인데 실감나게 투각(透刻)하였다.
이수 중앙에 편구형(扁球形) 복발(覆鉢)과 1단의 보륜(寶輪)을 갖추고 그 위에 화염(火焰)에 쌓인 모양의 보주(寶珠)를 얹었다.
비신(碑身)에는 개청의 행적(行蹟)과 보현사의 중장과정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개청은 835년에 지방세력가의 아들로 태어나 25세에 화엄사(華嚴寺)에 출가해 교학(敎學)을 익혔다. 26세에 엄천사(嚴川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후 굴산문(掘山門)의 개조(開祖)인 범일(梵日)의 제자가 되었다.
범일이 입적한 후 굴산사(掘山寺)를 지켰으나 자주 초구(草寇)들의 침입을 받았다. 이때 알찬(閼飡) 민규(閔規)의 도움으로 보현산사(普賢山寺)로 옮겼다. 지명주군주사(知溟州軍州事)인 왕순식(王順式)의 협조도 받았고, 경애왕(景哀王)이 국사의 예(禮)를 표하였다. 930년 보현사에서 입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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