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寺傳)하는 봉곡사중수사적비명(鳳谷寺重修事蹟碑銘)(1698년,靈休 撰)에 의하면 그 개창이 신라 고찰이라 하였다.
즉, 신라시대 자장 대덕(慈藏大德) 이 도량을 개기(開基) 하고 이어서 고려초 도선 국사가 중수했다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영휴 대사에 의하여 기록된봉곡사사적(1685년)에는, 동상실(東上室) 화재시(1717년) 습득한 상량문을 인용하여 고려 태조 천수(天授) 5년(922) 도선 국사의 개창이라 하였으므로 그 개기(開基) 에 혼란이 있다. 그러나 영휴 대사는 사적을 편찬하고 나서 13년 후 사승(寺僧) 현윤 대사(玄胤大師) 의 간청으로 사적기를 다시 재록(再錄) 하면서 자장 법사 당시의 개창으로 규정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들 사적을 의지한다면 봉곡사는 자장 법사의 개기후 고려초 도선 국사에 의하여 개창되었다고 보는 것이 무난하리라 본다.
봉곡사사적에는 봉곡사봉곡사(鳳谷寺)가 가장 왕성하였던 1700년대만 하여도 18전각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은 대웅전, 명부전을 위시하여 동상실(東上室)과 2동의 요사만이 전해진다.
봉곡사사적에 따르면 봉곡사는 초창(草創)으로부터 제3창까지의 연대를 알지 못한다고 하였고, 다만 인조 20년(1624) 제4창의 연대를 자세히 기록하였다. 이에 따르면 화주(化主), 정오(淨悟), 별좌(別座) 덕환(德環), 수장(修莊) 신호(信湖), 단청(丹靑) 도웅(道雄) 이라 하였으며, 1642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3년만인 1644년에 완공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단청은 무려 20여년이 지난 현종 4년(1663) 여름에 완공되었다고 하였다.
이 이후에도 필시 중건. 중수가 있었으리라 짐작되나 잘 알 수 없고, 근세에는 1916년에 중수하여 단청하였으며, 현재의 건물은 주지 지우 화상(至牛和尙) 에 의하여 1990년에 중건되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간의 팔작지붕, 총 20평이다
봉곡사중수사적 및 상량문에 따르면, 명부전(冥府殿)은 숙종 16년(1690년) 에 건립되었다고 하였으며, 또 명부전 양간록(樣間錄) 에는 순조 5년(1805) 월송 대사(月松大師) 가 중건하였다고 하였다. 그후 고종 4년(1867) 다시 중수를 거쳤고, 현 건물은 주지 지우 화상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정면 3간, 측면 2간의 맞배지붕, 총 20평이다.
동상실(東上室)의 초창은 알 수 없고, 인조 2년(1624년) 석희 화상(釋熙和尙) 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그후 숙종 43년(1717) 화재 후 중수되었다고 하였는데, 이때 동상실 상량문의 기록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건물이 전소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근래 해체 . 복원 당시에도 발견된 상량문에 따르면, 그후 영조 40년(1764) 에 중건되었음을 알 수 있고, 현재의 건물은 주지 최한수 화상에 의하여 중건되었으며, 정면 6간, 측면 2간의 팔작지붕, 총 24평이다.
현존하는 일주문은 1968년 지우 화상에 의하여 건립되었고, 서요사(西寮舍) 역시 지우 화상에 의하여 1987년 건립되었으며, 정면 4간, 측면 1간, 총 15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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