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당사 金塘寺
금당사(金塘寺)는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41번지 마이산(馬耳山)에 자리 잡고 있다. 절의 창건은 650년(백제 의자왕 10) 고구려에서 백제로 건너온 보덕(普德) 스님의 11제자 가운데 한 분인 무상(無上) 스님이 그의 제자인 금취(金趣) 등과 함께 세웠다고 전한다. 그리고 『삼국유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보이는 보덕 스님의 행장을 통해 절의 창건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보덕 스님은 고구려 후기의 스님으로서 고구려에서 열반종을 널리 알인 개조(開祖)이기도 하다. 그러나 고구려 보장왕(재위 642~668)이 중국에서 도교를 들여와 받들 뿐 불교를 신봉하지 않자 왕에게 도교만 믿고 불교를 멀리하면 나라가 위태해질 것임을 여러 차례 건의하였다. 그러나 왕이 끝내 그의 말을 듣지 않자 스님은 650년(보장왕 9) 제자 11명과 함께 백제의 완산주(完山州)로 내려와 고대산(孤大山)에 경복사를 지어 『열반경』을 강의하였고, 함께 온 11명의 제자 역시 절을 짓고 포교하였다고 한다.
금당사의 창건주인 무상 스님 역시 그 11명의 제자 가운데 한 분인데, 나머지 제자 중 적멸(寂滅)과 의융(義融)은 지금의 임실에 진구사(珍丘寺)를, 지수(智數)는 경상북도 문경 사불산에 대승사(大乘寺)를, 대원(大原)ㆍ일승(一乘)ㆍ심정(心正)은 전주 모악산에 대원사(大原寺)를, 수정(水淨)은 정읍 칠보에 유마사(維摩寺)를, 사대(四大)는 제자인 계육(契肉)과 함께 진안 성수산에 중대사(中臺寺)를, 개원(開原)은 충청북도 단양 금수산에 개원사(開原寺)를, 명덕(明德)은 연구사(燕口寺)를 각각 지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창건된 당시의 절은 지금의 위치에서 약 1.5㎞ 가량 떨어진 곳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예전 자리를 고금당(古金塘), 혹은 자연동굴을 법당으로 삼았으므로 혈암사(穴巖寺) 또는 금동사(金洞寺)로 불렀다. 절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것은 1675년(숙종 1)의 일이다. 한편 또 다른 창건설로는 814년(현덕왕 6) 또는 876년(헌강왕 2)에 중국인 혜감(慧鑑) 스님이 창건하였다는 말도 전하는데, 문헌의 기록이 없어 확인하기 어렵다. 절은 창건 후 고려시대 말에 이르기까지 완주에 자리한 경복사(景福寺)를 중심으로 한 열반종(涅槃宗) 사찰로서 발전하였다. 그리고 한때 나옹 혜근(懶翁惠勤, 1320~1376) 스님도 이 절에 머물며 수도해 도를 얻었다고 전한다.
조선에서는 억불정책으로 사세가 많이 위축된 데다가 임진왜란ㆍ병자호란 등을 겪으면서 쇠락하였으나 1675년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새로운 기운을 얻어 중창을 이루게 되었다. 절 이름도 고금당에 있을 때의 옛 이름인 금동사에서 유래된 금당사(金塘寺)로 바뀌었는데, 혹은 ‘金塘寺’로 쓰기도 하였다. 현재 경내 왼쪽의 미륵입상 앞에 연못이 있어 절 이름 그대로 금당(金塘)을 이루고 있다. 1682년(숙종 8) 괘불을 조성하였는데 이후의 조선 후기 역사는 공백으로 남는다. 1914년에는 칠성탱화를 봉안하였고, 최근에 들어와서는 1976년 금당을 비롯한 여러 건물이 퇴락되어 각 전각에 대한 중건불사를 하였다. 요사의 신축을 시작으로 1978년 명부전, 1987년 산신각, 그리고 1990년에 극락 보전을 새로 지었다. 또한 1985년 미륵입상을 조성하였고, 1991년 산신탱화와 용왕탱화를 봉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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