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0교구 은해사 > 경상북도 Gyeongsangbuk-do, 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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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0교구 은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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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청통로 951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479 은해사

951, Cheongtong-ro, Cheongtong-myeon, Yeongcheon-si, Gyeongsangbuk-do

전통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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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해사는 809년(신라 헌덕왕 1년)에 혜철국사가 해안평에 창건한 사찰로서, 처음에는 해안사라 하였다. 그 뒤 1270년(고려 원종 11년)에 홍진국사가 중창하였고, 1275년(고려 충렬왕 1년)에는 원참이 중건하였으며, 1485년(조선 성종 16년)에는 죽청과 의찬이 묘봉암을 중창하였다. 1543년(조선 중종 38년)에는 보주 등이 중 수하였으며, 1546년(조선 명종 1년)에는 천교가 지금의 장소로 법당을 옮겨 새로 절을 지었다. 그때 법당과 비석을 건립하여 인종의 태실을 봉하고 은해사라 하였다. 은해사라는 절 이름은 은해사 주변의 산세와 풍과이 불, 보살, 나한 등이 중중무진으로 나투어 계신 것처럼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어 마치 은빛 바다가 춤을 추는 극락정토 같다하여 부텽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주변에 안개가 끼고 구름이 피어 날 때면 그 모습이 마치 은빛 바다가 물 결치는 듯 하다고 해서 은해사라 했다고도 한다.

창건 이후 1563년의 화재로 소실되자 이듬해에 묘진이 중건하였고, 1589년(조선 선조 22년)에는 법당의 사방에 새로 건물을 세우고 단청하였다. 1651년(조선 효종 2년)에는 백흥암과 명부전을 신축하였으며, 1667년 (현종 8)에는 백흥암과 명부전을 중수하였다. 1712년(숙종 38년)에는 은해사를 종친부에 귀속시켰고, 1714년에는 절 문 일대의 땅을 매입하여 소나무를 심었으며, 1730년(조선 영조 6년)에는 백흥암의 보화루를 중건하였 다. 1737년에는 법당ㆍ누각ㆍ천왕문 등을 단청하였고, 1759년에는 백흥암과 명부전을 중건하였으며, 1761년에는 천왕문을 세웠다. 1767년에는 백흥암의 영산전을, 1772년에는 설화등이 백흥암의 동대를 쌓았고, 자암 은 대웅전 불상을 개금하였으며, 도봉은 영산전과 시왕전의 불상을 개분하였다. 1780년(조선 정조 4년)에는 혜옥ㆍ서징ㆍ덕윤ㆍ체주등이 묘봉암을 중창하였고, 1785년에는 쾌민이 거조암을, 1797년에는 경옥ㆍ석린ㆍ 해운ㆍ유화ㆍ승수등이 법당과 누각을 중수하고 단청하였다. 1801년(순조 1)에는 기기암을 중창하였는데 기기암의 원래 이름은 안흥사였다. 1817년에는 기봉ㆍ유성등이 서운암등 30여곳에 다리를 놓았고, 1823년에 기기 암을 중수하였고, 1833년에는 보봉ㆍ응암등이 서운암을 중창하였으며, 1834년에는 우일ㆍ유엽등이 중암암을 중수하였다.

신라 제41대 흥덕왕의 셋째아들로 태어난 심지는 중악에서 수도하던 중, 속리산 길상사에서 영심이 그의 스승 진표로부터 계법을 전해받고 점찰법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으나, 때가 늦어 당에 올라가서 참례할 수 없었으므로 땅에 엎드려서 참례하였다. 법회 7일 만에 진눈깨비가 심하게 내렸는데 심지의 둘레 10자에는 눈이내리지 않았으므로 모두들 신기하게 여겨 당으로 안내하였다. 여기서 그는 열심히 수도하여 영심으로부터 법통 을 계승하는 간자를 받았다. 그 뒤 팔공산으로 돌아와 산꼭대기에서 간자를 날려 떨어진 곳에 절을 짓고 간자를 모셔 동화사의 개조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극달의 창건연대인 493년은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기 이전의 시기이 므로 공인되기 전에 법상종의 성격을 띤 유가사라는 사명이 붙여졌을 까닭이 없다는 이유로 심지가 창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도 많다.

그러나 1847년(헌종 13)에는 은해사 창건이래 가장 큰불이 나서 1,000여칸의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다. 같은해 팔봉등이 주관하여 사방 아홉칸의 법당과 향실, 심검당ㆍ설현당ㆍ청풍당등을 새로 지었고, 이듬해에 보화루 를, 그 다음해에는 옹호문ㆍ안양전ㆍ동별실ㆍ만월당ㆍ향적각등을 세웠다. 1849년에는 백흥암의 중료를 중창하였고, 1858년(철종 9)에는 청봉등이 백흥암의 영산전을 중수하였으며, 1860년에는 운부암이 소실되었다. 그 해 응허ㆍ침운등이 운부암을 중건하여 법전ㆍ설선당ㆍ조실ㆍ영각ㆍ노전등을 세웠다. 1869년(고종 6)에는 백흥암의 명부전을 중수하였고, 1876년에는 백흥암에 나한전 및 석조를 만들었으며, 1878년에는 백흥암의 보 화루를 중건하였다. 1900년에는 운부암의 보화루를 중건하였고 1920년에는 삼당ㆍ일루ㆍ고방ㆍ주지실ㆍ요사 4동과 대문등을 중수하였다.

현재 이 절은 말사 39개소, 포교당 5개소, 부속암자 8개소를 관장하고 있는 대본사이다. 1943년까지만 하여도 이 절은 논 46만4000어평, 밭 2만8000여평, 임야 920정보를 가지고 있었고, 2,484평에 세워진 건물은 35동 245칸에 이르렀으나, 현재는 논 2만4000여평, 밭 1만7000여평, 임야 851정보, 건물 19동, 승려 50여명이 수도하고 있다. 이 절은 동화사와 더불어 팔공산의 대표적인 사찰로서 지눌이 거조암에서 신행결사를 도모한이래 주목을 받게 되었다. 특히, 홍진국사가 머무른 뒤에는 선교양종의 총본산으로서 사격이 고양되었고, 조선 후기의 고승 영파가 이곳을 중창한 뒤로는 화엄교학의 본산으로서 그 명성을 드날렸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설선당ㆍ심검당ㆍ종루ㆍ보화루ㆍ독성각ㆍ승당ㆍ요사채ㆍ객실등이 있다. 대웅전과 보화루의 현판은 추사의 글씨하고 전하여지며, 대웅전안에 봉안되어 있었던 극락구품회탱은 1750년에 성청과 옥련이 그린 뛰어난 작품이나 수년 전의 도난사건 이후 따로 보관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절과 부속암자에는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3점의 문화재와 기타 60여점의 사중보물, 24동의 건물이 있다. 지정문화재 로는 중국식 건축양식을 본뜬 국보 제14호의 거조암 영산전, 보물 제486호인 백흥암 극락전 수미단, 보물 제514호인 운부암청동보살좌상등이 있고, 산내암자로는 운부암ㆍ거조암ㆍ기기암ㆍ백흥암ㆍ묘봉암ㆍ중암암ㆍ 백련암ㆍ서운암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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