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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원효사 요약정보 및 구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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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사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21교구 송광사
대표전화 062-266-0326
   062-266-0322, 010-3926-0389
이메일 wonhyosa@gmail.com
홈페이지 https://wonhyosa.org/
  주소 광주 북구 무등로 1514-35
   광주 북구 금곡동 846 원효사
   1514-35 Mudeung-ro, Buk-gu, Gwangju
Tag 전통사찰, 무등산원효사
  • 상품 정보

    상세설명

    무등산 원효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송광사 말사로서, 원효봉을 뒤로하고 원효계곡을 아래로, 무등산 정상 서석대를 바라보는 수려한 경치를 지니고 있다. 원효대사는 661년(문무왕 1년) 의상스님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가던 길에 어느날 한 무덤가에서 잠이 들었다. 잠결에 목이 말라 달게 마신 물이 다음날 아침에 깨어나 다시 보니 해골바가지에 담긴 더러운 물이었음을 알고 급히 토하다가 '일체유심조'의 진리를 깨달아 유학을 포기한다.

    이 깨달음을 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대중불교를 위해 노력하던 원효대사는 6세기 초에서 중반 무렵인 신라의 지증왕, 법흥왕 때, 산자수려함을 사랑하여 이곳에 머무르면서 수행하셨다고 한다. 이에 암자를 개축한 후 원효사·원효암·원효당 등으로 불렸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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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개·새소식

    소개글

    총 2 건

    대한불교조계종 원효사 소개
    1. 무등산원효사 창건과 연혁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6-05

      원효사의 창건설로는
      ① 신라 법흥왕에서 지증왕 (500~540) 사이
      ② 원효국사(617~686)
      ③ 통일신라 말기
      ④ 고려 충숙왕대(1314~1339)의 창건과 중건설 등이 있습니다.

      원효사의 창건내력을 자세하게 적은 기록으로는 1637년(인조 15년)의 『불상기(佛像記)』, 1641년(인조 19년)의 「법당중창기」, 1847년(헌종 13년)의 「원효암중건기」, 1894년(고종 31)의 「원효암중수상량문(元曉庵重修上梁文)」 등에 비교적 자세한 내용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조선사찰사료」에 전하는 원효암중건기에 「瑞石山之北 有元曉庵 新羅國師元曉 愛其山明水麗築庵 而居乃 以其名之 始創年代 雖未可攷要 在於法興智證 兩朝之間 而瑞石爲湖南之明山 元曉爲瑞石之舊刹也...」라 전합니다.

      풀이하면 서석산(무등산의 옛 이름)의 북쪽에 원효암이 있는데, 신라국사 원효가 그 산자수려함을 사랑하여 이곳에 암자를 짓고 살았으므로 그 (사찰)이름이 되었다. 창건 년대는 그러나 법흥왕과 지증왕 양조의 사이에 (이미 사찰이) 있었으므로 상고하여 보면 가하지가 않다. 서석산이 호남의 명산이므로 원효를 서석의 구찰(원찰)로 삼은 것이라. 즉, 원효사는 신라 지증왕(재위 500–514), 법흥왕(재위 514-540), 양대에 이름모를 조그만 암자로 세워져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훗날 원효성사가 이곳에서 머물면서 수행정진 하였고 성사의 덕을 추모하여 개창조로 모시고 원효암으로 개명한 것으로 보입니다.

      원효사의 신라 창건설이 담긴 문헌기록에 대해 일부 부정적인 주장이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1980년 5월에 국립광주박물관에서 대웅전을 해체복원하기 위하여 실시한 발굴조사 결과 신라 때 조성한 금동불과 기와조각 등 보물급 유물들이 쏟아져 나와 학계의 큰 관심을 모은 바 있으며, 이들을 근거로 신라 때 창건한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즉 원효대사에 의한 창건을 뒷받침할 수 있는 고증자료가 될 만한 옛터나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통일신라시대의 금동불, 기와조각이 발견되었고, 그 밖에 고려시대 말, 조선 초기로 추정되는 부도와 조선 후기에 조성된 부도, 그리고 강희년명(康熙年銘)의 범종 그 밖에 석탑조각 등이 여기저기에 보이고 있습니다. 이로써 원효사는 천년고찰의 역사를 다시한번 자랑하게 되었으며, 이 때 출토된 유물들은 유형문화재 8호로 지정되어 광주국립박물관에 보관, 전시 하다가 현재는 송광사 박물관에 보관되어지고 있습니다.

      이밖에도 고승 대덕을 추앙한 나머지 화엄종의 한 명승이 고려 충숙왕(1314 - 1339) 때에 무등산을 찾아 여기에 절을 짓고 원효대사의 이름을 따서 원효암이라 하였다는 ④설도 있으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출토된 유물 등에 비추어보면 근거가 약합니다. 한편 1980년 6월에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 등을 근거로 하여 창건시기를 ③ 통일신라시대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원효사는 통일신라 말기에 소규모 암자로 세워졌다가 고려 충숙왕 때에 대규모의 사찰로 중건된 것으로 봅니다. 이 설은 문헌에 전해오는 사료보다는 출토된 유물에만 의존한 설입니다.

      이상의 여러 설에서 공통되는 것은 오랜 역사이며 원효성사의 업적을 숭상하고 이어가려고 하였다는 점입니다. 특히 발굴조사를 통해 얻어진 통일신라에서 고려․조선시대에 걸치는 와당과 “원효사”명이 보이는 조선초의 명문 기와 등과 같은 유물자료들이 이러한 기록에 의한 사력을 물증으로써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원효사 연혁
      원효사의 확실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습니다. 신라 지증, 법흥왕대(AD 500~539)라는 설이 있으나 불확실하며, 『조선사찰사료』 원효사 중건기에 의하면, 원효성사(AD 617~686)가 산명수려한 서석산을 좋아하여 암자를 지었으므로 그 이름이 원효사가 되었다 합니다. 이상 사료들을 종합하여 원효사의 창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추정해 봅니다. 원효사는 신라 지증왕(재위 500–514), 법흥왕(재위 514-540), 양대에 이름모를 조그만 암자로 세워져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훗날 원효성사가 이곳에서 머물면서 수행정진 하였고 성사의 덕을 추모하여 개창조로 모시고 원효암으로 개명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시대 화엄학의 대강당이었음.
      조선시대 宣祖代(1568~1608)에 의승장이었던 騎虛堂 영규대사가 주석.
      1597년 정유재란시 화신(火燼)됨.
      1609년 을유년에 증심사를 중창한 석경대사(釋經大師)가 복원.
      1636년 인조 14년에 신원대사(信元大師)가 중수.
      1637년 인조 15년에 옥견대사(玉堅大師)가 32불상을 조성봉안, 중수.
      1639년 중종 34년 사찰혁파시 동국여지승람 광산현조(光山縣條)에 원효사(元曉寺)가 기록.
      1685년 숙종11년 신옥(信玉), 정식대사(淨式大師)가 중수.
      1789년 정조 13년 회운대사(會雲大師)가 선방을 지음.
      1802년 순조 2년 회운대사(會雲大師)가 대웅전을 지음.
      1831년 순조 31년에 내원(乃圓) 의관대사(義寬大師)가 중수, 단청까지 마침.
      1847년 헌종 13년 내원대사가 칠성각을 신축.
      1894년 함명 태선(1824~1902)스님의 〈무진주 무등산원효암중수상량문〉에 의하면 학산대사가 관청에 호소해 100금의 재력을 시주받고 고을의 유지들의 도움으로 사찰을 중건.
      1927년 원담대사(圓潭大師)가 중수.
      1930년 이 지방 토호였던 지응현(池應鉉), 김정명월(金淨明月)등이 주가 되어 칠성각, 시왕전 등의 대중수.
      1938년 정응담(鄭應潭) 대사(大師)가 중수.
      1944년 주지 김동성(金東成) 대사(大師), 일학대사(一鶴大師), 지응현(池應鉉) 거사, 김정명월(金淨明月) 보살 등이 중심이 되어 석가탑, 관음탑을 만들고 사우들을 보수.
      1950년 6.25 전화(戰火)로 전소(全燒)됨.
      1954년~1960년 주지 김인곡(金麟谷)과 총무 김금파사(金錦波師), 지응현(池應鉉) 거사, 김명정월(金淨明月) 보살, 옥천 지창선(池昌宣) 거사 등이 대시주가 되어 사우 일부를 옛 규모보다 축소하여 복구함.
      1974년 정지우사(鄭智牛師)가 주지로 취임하여 소유권 문제로 3년간의 재판 끝에 정화를 매듭짓고 복원불사계획을 수립하여 일부 착수하였으며, 축대를 쌓고 헌 건물을 철거함.
      1980년 법타(法陀)스님이 대웅전 요사채 명부전을 신축복원하고, 칠성각을 보수하였다. 또한 무등산 도립공원 원효사 주차장을 만들어 장래의 원효사 수입원을 확보함.
      1992년 현지(玄旨)스님에 의해 성산각, 개산조당, 요사, 종각, 누각 등의 건물을 세움.

    2. 무등산원효사 소개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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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효스님 진영


      송광사 말사인 원효사는 무등산 북쪽 기슭의 원효계곡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광주시내에서 약 12㎞거리이며 무등산 집단시설지구의 중심이기도 합니다. 계곡을 건너 의상봉(해발 546.6m)이 마주하고, 그 좌우로는 윤필봉(404.4m), 투구봉(465.2m)과 멀리는 천왕봉(1187m)을 마주하고 있으며, 원효사 뒷편으로는 원효봉(567m)이 든든하게 뒤를 받쳐주고 있습니다.

      행정구역은 광주광역시 북구(北區) 무등로(금곡동金谷洞) 무등산(無等山) 원효 계곡에 소재하며,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입니다.

      원효사의 창건연대는 6세기 초에서 중반 무렵인 신라의 지증왕, 법흥왕 때로 추측될 뿐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원효대사가 산자수려함을 사랑하여 이곳에 머무르면서 암자를 개축한 후부터 원효사·원효암·원효당 등으로 불렸다고 전해오며, 고려 충숙왕 때인 14세기 전반에 당시 이름 있는 승려가 절을 창건하고 원효를 사모하는 마음에서 원효사라고 했다고도 하는데, 1980년대에 통일신라유물들이 다수 출토되었기 때문에 고려시대 창건설화는 잘못된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조선 명종 때 문정왕후가 섭정하면서 불교가 진흥하자 이 원효사에도 많은 승려들이 모여 들었으며, 후일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었던 영규(靈圭)대사가 이곳에서 수행하셨습니다. 정유재란 때 불탄 것을 석경(釋經)스님이 다시 중창하였고,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가 이루어졌습니다. 육당 최남선은 1925년 봄에 국토순례할때 이곳 원효사를 탐방한 바 있습니다. 그 때 천년고찰로서 원효사의 모습을 『심춘순례』에 다음과 같이 자세히 전하였습니다.

      법당(法堂)과 범절(凡節)이 당당한 사찰의 풍모를 갖추었다. 본존인 석가여래상이 거룩하시고 사자의 등에 지운 대법고(大法鼓)는 다른 데서는 못 보던 것이다. 대웅전 오른편에 있는 영자전(影子殿)에는 정면에 달마로부터 원효(元曉), 청허(淸虛) 내지 서월(瑞月)까지의 대정(大幀)을 걸고 따로 1774년(영조 50)에 담양 서봉사에서 옮겨오신 원효화정(元曉畵幀)을 걸었다. 나한전(羅漢殿), 명부전(冥府殿), 선방(禪房), 칠성각(七星閣) 같은 것은 다 있고, 불상도 볼만하니 그래도 원효의 창사 이래 오랫동안 명찰(名刹)이던 자취가 남아 있다.

      6·25전쟁 때 다시 소실되었는데, 1954년부터 당시 주지 인곡스님과 신도들이 중건에 착수하여 사우 일부를 옛 규모보다 축소하여 복구하였습니다. 1980년 5월 대웅전을 해체 복원하기 위하여 그 터를 정리하는 공사를 하였습니다. 이 공사때 절터에서 통일신라시대의 금동불상 6점, 고려시대의 철불두상(鐵佛頭像)·고려자기 토기불두(土器佛頭) 및 고려와 조선시대에 만든 기와 와당 도자기 등이 출토되어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끈 바 있습니다. 이들 출토 유물 32점은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절 주변에는 하대석과 옥개석편(屋蓋石片)만 남은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재(石燈材)와, 화강암으로 된 고려시대 3층 석탑, 조선 중기의 회운당부도(會雲堂浮屠 : 원효사부도) 등이 산재해 있으며, 부근에 선심폭포·풍암정·장운사·의상대 등이 있습니다. 원효봉 한 기슭에 있는 원효사 동부도는 (지방유형문화재 제7호) 현존하는 부도중 조각기법이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사면에 동물모양의 해학적 모습이 특이합니다.

      1980년 법타스님이 대웅전, 요사채, 명부전을 신축복원하였고, 1989년부터 현지스님에 의해 성산각, 개산조당, 요사, 종각, 누각 등의 건물이 세워져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2018년 현재 주요 전각으로는 대웅전과 약사전, 성산각, 지장전과 개산조당(開山祖堂), 무등선원, 요사채, 회암루 등이 있습니다. 이중 대웅전은 전형적인 정면 3칸, 측면2칸의 다포양식이며, 팔작지붕입니다. 개산조당에는 원효사 범종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원효계곡의 원효사 바로 아래에는 관음암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관음암은 원효사에 속한 암자였으나, 1975년 성호(性昊)스님에 의해 별개의 사찰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관음암의 주요 건물로는 대웅전과 극락보전, 요사채가 있습니다. 대웅전 좌측의 자연암반에 새겨진 미륵불이 있고 경내에 삼층석탑과 석등이 있는데, 이들은 근래에 부가된 것들입니다. 극락보전 촤측에는 자승당 단암선사(慈昇堂 檀庵禪師)의 사리탑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관음암과 원효사로 올라가는 도로변에는 어사 민달용(閔達鏞)과 관련된 어사바위가, 그리고 이에 대한 전설이 남아 있습니다.

      무등산 원효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송광사 말사로서, 원효봉을 뒤로하고 원효계곡을 아래로, 무등산 정상 서석대를 바라보는 수려한 경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원효대사는 661년(문무왕 1년) 의상스님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가던 길에 어느날 한 무덤가에서 잠이 들었는데 잠결에 목이 말라 달게 마신 물이 다음날 아침에 깨어나 다시 보니 해골바가지에 담긴 더러운 물이었음을 알고 급히 토하다가 '일체유심조'의 진리를 깨달아 유학을 포기한 일화가 있습니다. 이 깨달음을 중생들에게 알리기 위해 노력하던 원효대사는 6세기 초에서 중반 무렵인 신라의 지증왕, 법흥왕 때, 산자수려함을 사랑하여 이곳에 머무르면서 수행하셨다고 전해집니다. 이곳은 그후 원효사·원효암·원효당 등으로 불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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