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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설명
용주사는 본래 신라 말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제2세였던 염거화상이 854년(신라 문성왕 16년)에 창건한 갈양사의 옛 터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는 970년(고려 광종21년) 혜거국사가 머물며 수행했고 고려 왕실의 원찰이 되어 국가적 지원을 받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절의 명맥은 유지되었으나 병자호란 때 소실된 후 폐사되었다. 조선 정조는 비운에 숨진 아버지 사도 세자의 능을 양주 배봉산(현 서울 전농동)에서 수원 화산으로 옮기고 그 이름을 현융원이라 했는데 그 이듬해인 1790년에 능을 수호하고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능침사찰로 용주사를 길양사의 옛터에 창건하였다. 용주사 낙성식 날 저녁에 정조가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어 절 이름을 용주사라 하였다고 한다.
용주사의 실질적인 창건주는 정조임금이라 할 수 있지만, 실질적인 창건불사는 봉경당 사일스님이 담당했다. 사일스님은 장흥 보림사에 머물 당시 절에 들른 정조에게 불설대부모은중경을 전했는데 정조가 그 경을 읽고 크게 감화받았다고 전한다. 이처럼 보경스님은 정조의 불심을 일으키게 한 장본인으로 정조와는 매우 돈독한 관계에 있었으며, 용주사 창건을 위한 팔도도화주와 초대 주지를 맡아 초기 용주사의 기초와 전통을 세우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창건 직후부터 용주사에는 도총섭이 상주하는 절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도총섭은 승려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 승풍을 규찰하는 기구인 규정소의 우두머리를 말한다. 그리고 일제시대에는 30본산의 하나가 되어 경기남부의 49개 절과 암자를 관할하는 본사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니, 조선후기와 일제시대에 매우 비중이 큰 사찰로서의 명맥을 지켜왔음을 알 수 있다.
1960년 이후에 전강스님, 관응스님 등이 주석하면서 용주사는 새로운 전기를 맞았으며, 특히 전강스님은 중앙선원을 개설하여 인재양성에 주력하기도 하였다.이밖에도 대광보전 마루에는 나무껍질로 만든 30평 정도의 삿자리가 있다. 이 자리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효심의 본찰인 용주사의 상징적인 유물은 부모은중경판이다. 부모은중경은 보모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깊은가를 "어머니 품에 품고 지켜준 은혜, 해산 때 고통을 이기시는 은혜, 자식을 낳고 근심을 잊는 은혜, 쓴 것을 삼키고 단것을 뱉어 먹이는 은혜, 진자리 마른자리 가려 누이는 은혜, 젖을 먹여 기르는 은혜, 손발이 닳도록 깨끗이 씻어주시는 은혜, 먼길을 떠났을 때 걱정해 주시는 은혜, 자식을 위하여 나쁜 일까지 감당하는 은혜, 끝까지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 주시는 은혜"의 열가지로 나누어 설명한 경전이다. 용주사에 전해오는 부모은중경목판은 정조가 절을 새로 건립한 6년 후인 1796년에 당해 최고 화가인 김홍도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여 조성한 것으로 목판 42매를 비롯하여 1802년에 원래의 목판을 바탕으로 제작한 석판 24매, 동판 7매 등으로 모두 73매이다. -
소개·새소식
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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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주사 가람 배치도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4-22
용주사는 불교가 정치적·사회적으로 억압을 당하고 있던 당시에 국가적 관심을 기울여 세웠다는 점에 역사적 의미를 갖습니다. 조선전기에는 고려의 전통을 이어, 왕이나 왕실의 무덤을 수호하고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한 사찰이 간혹 세워지기는 하였으나, 조선후기에 와서 사림세력이 부각되고 성리학이 성행하면서 왕실에서의 사찰건립이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용주사를 마지막으로 하여 조선왕조에서의 왕실의 원찰은 더 이상 세워지지 못했으며 이처럼 사회적 여건이 좋지 못하던 시대에 거대한 왕실의 원찰이 세워지게 되었던 연유는 정조의 지극한 효성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용주사는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수호하고 그의 명복을 비는 것이 가장 중요한 기능 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용주사는 창건이후 지금까지 가람의 구조가 크게 변모되지 않고, 창건당시의 상량문을 비롯하여 발원문등 용주사의 창건과 관련된 문헌 자료들이 많이 남아 있는 편입니다.
이와같이 칠성각과 제각, 대웅보전, 승당과 선당, 천보루와 외삼문을 중심골격으로 하여 가람이 구성되었고, 각 전각의 내용에 따른 의미를 살펴본다면, 먼저 절이 중심이 되는 건물을 대웅보전으로 하고 거기에는 석가여래를 주존으로 하여 좌우에 아미타여래와 약사여래를 모셔놓았습니다. 대영웅 석가모니불과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아미타불, 그리고 무병장수를 발원하는 약사여래불을 모신 것은 당시의 보편적인 일이었기에 용주사가 능사이기는 하나 여타의 사찰과 특별히 다른 점은 없습니다.
대웅보전은 전면 3칸, 측면 3칸이 18세기 전형적인 양식적 특징을 보이고 수미단의 화려한 장식, 본존불 상부의 용두 조각, 닫집 주변의 비천상 조각 등은 세련미와 장엄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단부, 즉 기단과 초석은 장대석 기단에 방형과 원형이 이중초석으로 되어있어, 당시 일반사찰이 잡석 기단에 자연석 주초를 쓰고 있는 점과 크게 대조됩니다. 보통 장대석 기단과 이중초석은 관청건축에서도 비교적 격이 높은 건물에만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그밖에 기단 상면을 전돌로 깔았고, 지붕의 취두와 용두, 학과 용을 새긴 막새기와 등에서 관 건축의 특성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건물은 사원 건축으로서의 일반적 보편성과 아울러 궁궐건축의 특수성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대웅보전의 왼편에는 6칸의 칠성각과 12칸의 향로전이 있었고, 오른편에는 6칸의 제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칠성각은 시방칠등각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향로전은 언젠가 소실된 후 본래 12칸이던 건물 규모를 6칸으로 축소하여 봉향각으로 다시 세웠다가 1993년에는 천불전으로 고쳐 지어졌습니다. 향로전은 노전(爐殿)이라고도 하는 불전의 부속건물로 불전의 일상예불과 주요 불교신앙행사의 준비를 하는 곳이며, 이러한 일상예불은 노전스님이 담당합니다. 대웅보전 오른편에 제각은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셨던 곳으로 추측되는 건물이나, 한국전쟁때 불타 없어졌고, 지금은 서고로 쓰이는 새로운 건물이 세워졌으며 호성전, 또는 축성전으로 불리우던 이 제각의 소실은 용주사의 창건의미를 감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다만 현재 대웅보전에 있는 목조감실이 위패를 모셔놓았던 것으로 생각되어 그 자취를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두 번째 단에는 천보루와 승당 및 선당이 위치하고 있으며, 천보루는 아래층을 모두 돌기둥으로 쓰고 있으며, 누각의 2층은 삼면을 난간으로 돌리고 4각으로 반듯하게 다듬은 장초석과 지붕위의 용두 등은 조선시대 사찰건축에서 보기 어려운 요소로 관 건축의 취향을 느낄 수 있으며 누각건물 자체는 일반사찰의 누각과 그 유형을 같이하여 사찰건축과 관 건축의 모습이 절충된 외관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승당과 선당은 천보루의 좌우에 위치하여 대웅보전 앞 중정을 구획짓고 있으며, 천보루의 양옆에서 각각 통할 수 있는 행각과 문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절의 중앙부에 □모양의 건축구조로 쌍둥이처럼 대칭을 이루어 지어진 두 건물은 각각 39칸이나 되고 있어서 용주사가 선종사찰로서 적지않은 승려가 이곳에 거주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승당과 선당은 지금 나유타료와 만수리실로 불리웁니다.아랫단의 삼문은 좌우로 줄행랑이 달려 있어 일반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를취하고 있는데, 이는 육상궁과 같은 별묘(別廟)의 삼문형태입니다. 또한 용주사의 가람구조는 조선시대에 유사한 기능을 갖고 있던 능사로서 봉선사와 봉은사의 구조와 흡사한 부분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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