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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 갑사는 420년(백제 구이신왕 원년)에 창건되었습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화엄십찰이 되어 국중대찰(國中大刹)로 번창했으며, 고려시대에도 이어졌습니다. 조선시대 정유재란(1597) 때 사찰이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으나, 1604년(선조37)을 시작으로 1654년(효종5) 크게 중창하였으며,1875년(고종12) 다시 중건하여 오늘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계룡산은 통일신라시대에는 오악(五嶽) 중 서악(西嶽)으로 제를 올려 왔고, 조선 시대에는 묘향산의 상악단(上嶽壇), 지리산의 하악단(下嶽壇)과 함께 이 산에 중악단(中嶽壇)을 설치하고 국가에서 산신제를 올렸습니다. 이처럼 예로부터 국가의 중요한 명산으로 자리를 잡은 계룡산은 1968년 12월 31일자로 경주·한려해상과 함께 두 번째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계룡산은 1392년 조선을 건국하였을 때, 새 도읍을 정하려고 준비 중인 태조 이성계는 왕사(王師) 무학대사와 이곳에 들려 국가의 수도로 점찍었던 지역입니다. 무학대사는 계룡산이 수태극(水太極) 산태극(山太極)의 형상이라 도읍으로 정할 것을 주장하였다고 전해집니다. (결국 한양, 지금의 서울로 수도를 정함.)
산 이름은 주봉인 천황봉(天皇峯, 846.5m)에서 연천봉(連天峯, 739m)·삼불봉(三佛峯, 775m)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마치 닭 볏을 쓴 용의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라고 전해지는데(금계포란형, 비룡승천형), 이곳에 사는 동식물 분포는 식물이 860종, 포유류 25종, 조류가 52종, 곤충류가 1,184종, 양서·파충류 16종, 담수어 25종 등으로 약 2,100여 종의 동식물이 사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국립공원 계룡산은 8종류의 천연기념물과 3곳의 전통사찰이 위치하고 있으며, 그곳에는 국보 2점(갑사, 신원사), 보물 12점(갑사, 신원사, 동학사)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갑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입니다. 예로부터 이곳은 계룡갑사(鷄龍甲寺)·갑사(岬寺)·갑사사(甲士寺)·계룡사(鷄龍寺)라고도 하였습니다. 갑사는 420년에 계룡산 천진보탑을 보고 아도가 창건하였다는 설과 556년(진흥왕 17)에 혜명이 창건하였다는 설, 아도가 창건하고 혜명이 중창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679년(문무왕 9) 의상대사(義湘)가 갑사를 중수하여 ‘화엄대학지소 (華嚴大學之所)’로 삼았으며, 이때부터 신라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가 되었습니다(최치원 「당대천복사고사주번경대덕법장화상전」, 904). 이후 고려를 거쳐 조선 초기 숭유억불정책 와중에도 선종 18개 사찰로 이름을 올리면서 사세가 확장되기도 하였습니다. (「세종실록 24권」, 세종 6년 4월 5일 경술기사). 이후 1597년 정유재란으로 사찰이 소실되기도 하였으나, 1604년 (선조 37)을 시작으로 1654년(효종5) 사정·신휘·경환·일행·정화·상균 등의 승려가 관찰사 강백년의 도움을 얻어 갑사를 크게 중창하였습니다. 1659년에는 여주목사 이지천이 지은 계룡산 갑사사적비명을 건립하였고, 1875년(고종 12)에 중수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한편, 계룡산 갑사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장 기허당 영규대사와 승병들의 숨결이 있는 곳으로 호국불교의 중심에 서 있으며, 현재 국보 1점, 보물 8점 등 수많은 문화재가 있는 전통사찰입니다. 현존하는 부속 산내암자로는 신흥암, 대자암, 내원암, 대성암이 위치하고 있고, 봄에는 마곡사, 가을에는 갑사가 아름답다고하여 춘마곡 추갑사라고 불리는 관광명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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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새소식
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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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사 개산대재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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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사 괴목대신재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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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사 전통산사문화재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5-26
전통산사 문화유산활용 프로그램이란?
국가유산청에서 후원하는 전통산사문화유산 활용 프로그램은 ‘문화유산에 대한 최고의 보존은 활용이다.’라는 가치 아래 전통산사 문화유산에 깃든 의미를 재해석하고 그 가치를 공유함으로써 국민들의 삶에 도움이 되고자 기획되었습니다.
우리 갑사는 월인석보판목(보물 제 582호)을 중심으로 문화유산을 향유하는 프로그램을 준비했습니다. 세종대왕, 목판인쇄술, 훈민정음, 월인천강지곡등 문화유산에 내재된 의미와 가치를 살펴 세종대왕의 애민했던 마음을 기리고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합니다.
달은 깨어있음이요, 천강은 우리의 여러 갈래 마음입니다.
“분별 때문에 생겨나는 수천가지 내 감정을 알아차리고, 그대로 깨어있으면 모든 것이 그저 다 그러한 인연임을 알게 되어 자유롭고 평화로워진다“ 라는 이야기를 프로그램에 담았습니다. -
- 갑사 전각 배치도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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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사 대웅전(甲寺 大雄殿)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5-26
보물 제2120호 갑사 대웅전
갑사는 계룡산 아래에 있는 절로 백제 구이신왕 1년(420년)에 아도화상이 지었다는 설과 556년에 혜명이 지었다는 설이 있다. 679년에 의상이 수리해서 화엄종의 도량으로 삼으면서 신라 화엄 10찰의 하나가 되었다.
859년·889년에 새로 지었으나 정유재란(1597)으로 인해 건물이 모두 불타 버린 것을 선조 37년(1604)에 중건되고 효종 5년(1654)에 가람이 전면적으로 개축 중수되었으며 고종 12년(1875)에 다시 중수되었다고 전한다.
갑사 대웅전은 절의 중심에 있는 법당으로 원래는 현재 대적전이 있는 근처에 있던 것으로 보이며, 다시 지을 때 이곳에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앞면 5칸·옆면 4칸으로 1층이며, 옆면이 사람인(人)자 모양으로 맞배지붕 건물이다. 기둥 위에서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다. 가운데 3칸은 기둥 간격을 양 끝칸 보다 넓게 잡아 가운데는 공포를 2개씩, 끝칸에는 1개씩 배치하였다. 내부는 우물천장으로 되어있고, 불단을 만들어 석가여래불상을 모시고 있다. 그 위에는 화려한 닫집을 설치하였다.
갑사 대웅전은 조선시대 중기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는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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