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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0교구 은해사 요약정보 및 구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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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페이지 http://www.eunhae-sa.org/
  주소 경북 영천시 청통면 청통로 951
   경북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479 은해사
   951, Cheongtong-ro, Cheongtong-myeon, Yeongcheon-si, Gyeongsangbuk-do
Tag 전통사찰
  • 상품 정보

    상세설명

    은해사는 조선 31본산, 경북 5대 본산,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본사의 자리를 지키는 경북의 대표적 사찰입니다. 그리고 교구 본사 중 본존불로 아미타불을 모시는 미타도량으로도 유명합니다. 신라 41대 헌덕왕 1년(809년) 혜철국사가 해안평에 창건한 사찰이 해안사인데 이로부터 은해사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현존하는 암자만도 여덟 개가 있고 말사 숫자가 50여개에 이릅니다.

    1546년 명종 원년에 나라에서 하사한 보조금으로 천교화상이 지금의 장소로 법당을 옮겨 새로 절을 지었습니다. 이 때 법당과 비석을 건립하여 인종의 태실을 봉하고, 황실 사찰로서 자리매김하며 '은해사'라고 이름을 짓게 되었습니다.

    신라 시대에는 우리나라 불교의 새 장을 여신 화쟁국사 원효스님과 해동 화엄종의 초조이신 의상스님이 있었고, 고려 시대에는 현재 조계종의 종조이신 불일 보조국사 지눌스님, 삼국유사를 저술하신 보각국사 일연스님 등이 있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홍진국사가 머무른 뒤부터 선교양종의 총본산으로 사격이 고양되었고, 화엄학의 대강백이신 영파 성규 스님이 이곳을 중창한 뒤로는 화엄교학의 본산으로서 그 명성이 높았습니다. 추사 김정희는 경상감사로 부임한 그 생부 김노경 공을 따라서 경상도 일원의 명승지를 여행하며 쓰신 글씨, 즉 문 위의 편액인 은해사, 불당의 대웅전, 종각의 보화루, 불광, 노전의 일로향각 이 다섯 점의 글씨는 은해사의 자랑이자 소중한 문화재입니다.

    은해사는 최근에도 향곡, 운봉, 성철스님 등 수많은 선지식을 배출했습니다. 현재에는 비구 선방 운부암, 기기암과 비구니 선방 백흥암 등에서 100여분의 스님들이 수행하고 계십니다.

    은해사 템플스테이관은 2014년 9월에 650평형 2층 건물로 새로 건립되었으며, 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방사 2개 등 총 20개의 방사를 갖추고 있다. 은해사는 수많은 고승의 발자취가 남아있으며 천 년의 불교문화유산을 간직한 대사찰입니다. 팔공산 자락에서 대중 포교 사업에도 능동적으로 참여하며, 평화통일을 앞당기기 위한 통일 운동에도 앞장서고 있습니다.

    부처님, 보살, 나한 등이 중중무진으로 계신 것처럼 웅장한 모습이 마치 은빛 바다가 춤추는 극락정토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 은해사입니다. 은해사 주변에 안개가 끼고 구름이 피어날 때면 그 광경이 은빛 바다가 물결치는 듯하다고 해서 은해사라고도 합니다. 은해사 아미타부처님의 세계에 들어서면 깨어있는 현재가 곧 극락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를 두고 신라 진표율사는 관견(觀見)이라는 시에서 '한 길 은색 세계가 마치 바다처럼 겹겹이 펼쳐져 있다'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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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개·새소식

    소개글

    총 5 건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0교구 은해사 소개
    1. 은해사 가람 배치도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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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극락보전(대웅전)
      2 보화루
      3 설선당
      4 단서각
      5 산신각
      6 심검당
      7 종각
      8 우향각
      9 지장전
      10 호연당
      11 도선당
      12 청풍당 (종무소, 원주실)
      13 후원(식당)
      14 성보박물관
      15 학예관실
      16 요사
      17 불이문
      18 조사전
      19 세면장
      20 오층석탑

    2. 은해사 역사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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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년 고찰 팔공산 은해사
      은해사는 조선 31본산, 경북 5대 본산,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의 자리를 지키는 경북지방의 대표적 사찰이다.
      그리고 교구 본사중 본존불로 아미타불을 모시는 미타도량으로도 유명하다. 신라 41대 헌덕왕 1년(809년) 혜철국사가 해안평에 창건한 사찰이 해안사인데 이 해안사로부터 은해사의 역사가 시작된다. 현존하는 암자만도 여덟 개가 있고 말사 숫자가 50여 개에 이르고 한국 불교의 강백들을 양성, 교육하는 "종립 은해사 승가대학원"이 있는 사찰이기도 하다.
      불, 보살, 나한 등이 중중무진으로 계신 것처럼 웅장한 모습이 마치 은빛 바다가 춤추는 극락정토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 은해사이다.
      또 은해사 주변에 안개가 끼고 구름이 피어 날 때면 그 광경이 은빛 바다가 물결치는 듯 하다고 해서 은해사라고도 한다. 신라의 진표율사는 한 길 은색 세계가 마치 바다처럼 겹겹이 펼쳐져 있다. (一道銀色世界 如海重重) 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은해사는 현재 말사 39개소, 포교당 5개소, 부속암자 8개소를 관장하고 있는 대본사이다.
      1943년까지만 하더라도 은해사에는 건물이 35동 245칸에 이르러 대사찰의 위용을 자랑했지만, 현재 은해사 본사 내에는 19개 건물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은해사의 가람
      은해사는 조선시대 대부분의 산지가람처럼 단탑단금당식(單塔單金堂式)으로 가람배치가 되어있다.
      대웅전 앞에 있던 오층석탑은 최근 보존을 위해서 부도전으로 이전하였다. 대웅전 앞에는 보화루가 있고 보화루 좌우로 심검당과 설선당이 있으며 그 가운데 장방형의 정원이 있는 중정식 가람배치 구조이다. 중정은 장방형이지만 중간부분에 계단으로 축대를 만들어 놓아서 보화루로 들어오는 참배객이 볼 때
      정방형에 가깝게 보여서 대웅전이 더 웅장하게 다가오는 느낌을 준다.

      역사 속의 은해사 출신 스님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수와 불사를 거듭한 은해사는 한국을 빛낸 여러 고승을 배출하였다.
      신라시대에는 우리나라 불교의 새 장을 여신 화쟁국사 원효스님과 해동 화엄종의 초조이신 의상스님이 있고, 고려시대에는 현재 조계종의 종조이신 불일 보조국사 지눌스님, 삼국유사를 저술하신 보각국사 일연스님 등이 있다.(일연스님과 원효스님의 추모 다례제가 매년 열리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홍진국사가 머무른 뒤부터 선교양종의 총본산으로 사격이 고양되었고 화엄학의 대강백이신 영파성규 스님이 이곳을 중창한 뒤로는 화엄교학의 본산으로서 그 명성이 높았다. 최근에도 향곡, 운봉, 성철스님 등 수많은 선지식을 배출하였다. 현재에는 비구 선방 운부암, 기기암과 비구니 선방 백흥암 등에서 100여 분의 스님들이 수행하고 계신다. 또한 한국불교 최고의 경율론 삼장법사과정인 대한불교 조계종 은해사 승가대학원에서 10여 분의 석학들이 정진 수학중이시다.

      은해사 역사

      신라 41대 헌덕왕이 즉위한 809년에 해철국사가 해안평에 창건한 사찰이 해안사인데 이 해안사로부터 은해사의 역사가 시작된다.

      헌덕왕은 조카인 40대 애장왕을 폐위시키고 즉위했다. 당시 정쟁의 피바람 속에서 숨진 원혼을 달래며 왕의 참회를 돕고 나아가 나라와 백성의 안녕을 위해서 창건한 사찰이 은해사의 시초가 되는 해안사이다.

      운부암에 가는 길 부근인 해안평이 그 해안사 절터이니 운부암을 가는 길에 한번 관심있게 살펴보기 바란다. 해안사 창건후 고려시대 1270년(원종 11년)에 홍진국사가 중창하였고, 1275년 충렬왕 때 원참스님이 중건하였다. 조선시대에도 1485년 성종 16년에 죽청스님과 의찬스님이 묘봉암을 중창하였으나 1545년 인종 원년에 큰 화재가 발생해 사찰이 전소되었다.

      이듬해 1546년 명종 원년에 나라에서 하사한 보조금으로 천교화상이 지금의 장소로 법당을 옮겨 새로 절을 지었다. 이 때 법당과 비석을 건립하여 인종의 태실을 봉하고 은해사라고 이름을 짓게 되었다. 1563년 화재로 소실되고 이듬해에 묘진 스님이 중건하였으며, 1589년 선조 22년에 법영대사가 법당을 현재의 자리에 크게 중창하고 사찰의 규모를 확장하는 일대 불사를 이루어 내었다.

      그 후 1592년 임진왜란이 있었지만 1651년 효종 2년에 각 전각들이 단청 불사를 시행한 기록으로 보아 왜란을 격으면서도 큰 피해는 입지 않은 듯 하다. 1712년 숙종 38년에는 은해사를 종친부에 귀속시켰고, 1714년에는 사찰 입구 일대의 땅을 매입하여 소나무를 심었다. 지금의 은해사 앞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그때에 심어진 것으로, 300년 가까운 세월동안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소나무들이다.

      1761년 천왕문을 세우고 1772년에는 자암스님이 대웅전 불상을 개금하였으며 도봉스님이 영산전과 시왕전의 불상을 개분했다. 영조는 왕자시절에 이 은해사를 잘 수호하라는 완문을 지어 보낸 일이 있었다. 이것은 영조 등극후에 어제완문이라 하여 이절을 수호하는데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하지만 1847년 헌종 13년에 은해사 창건이래 가장 큰불이 났다. 이때의 화재는 너무 가혹한 것이어서 극락전을 제외한 천여 칸의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다. 그러자 인종의 태실 수호사찰이며 영조의 어제수호 완문을 보관하고 있는 사찰인 은해사를 중창하고자 당시 영천 군수 김기철이 300궤미의 돈을 박봉에서 털어내 시주했으며, 대구감영과 서울 왕실의 시주가 계속 답지하였다.

      그리하여 수만냥의 재원을 확보하여 3년여간의 불사 끝에 헌종 15년 1849년에 중창불사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이 때 지어진 건물이 대웅전, 향실, 고간, 심검당, 설선당, 청풍료, 보화루, 옹호문, 안양전, 동별당, 만월당, 향적각, 공객주 등인데 이 중에서 대웅전과 보화루, 불광의 삼대 편액이 김정희의 글씨로 채워졌다.

      그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은해사는 말사 39개소, 포교당 5개소, 부속암자 8개소를 관장하고 있는 대본사이다. 1943년까지만 하더라도 은해사에는 건물이 35동 245칸에 이르러 대사찰의 위용을 자랑했지만, 현재 은해사 본사 내에는 19개 건물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은해사와 추사의 인연

      조선조 왕조와 정조시대에 은해사는 영파성규 대사가 주석하면서 화엄종지를 크게 드날리고 있었다.

      이 때 추사는 경상감사로 부임한 그 생부 김노경 공을 따라서 경상도 일원의 명승지를 여행하면서 이 은해사 일대도 들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헌종 13년의 대 화재 뒤 헌종 15년에 마무리 지은 불사때 지어진 건물 중에서 대웅전, 보화루, 불광의 삼대 편액이 김정희의 글씨라서 마치 화엄루각과 같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 뒤 고종 16년(1879)에 영천군수 이학래가 다시 쓴 '은해사 연혁변'에서는 '문액의 은해사와 불당의 대웅전, 정각의 보화루가 모두 추사 김시랑의 글씨이고 노전을 일로향각이라 했는데 역시 추사의 예서체이다'라고 하고 있다.

      추사 선생은 안동 김씨와의 세도 다툼에 패하여 55세 되던 헌종 6년(1840) 9월 2일에 제주도로 유배되어 9년 세월을 보낸 다음 헌종 14년(1848) 방면되어 다음해 봄에 64세의 노인으로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 유배중에 불교에 더욱 깊이 귀의하게 된 추사 선생은 영파대사의 옛터이며 또 자신의 진 외고조인 영조대왕의 어제 수호완문을 보장하고 있는 묵은 인연이 있음을 생각하고 현판과 문액을 기꺼이 써 주기로 작정하였던 것 같다.

      이렇듯 거듭되는 인연에 제주도 유배기간 동안 갈고 닦은 기량을 최고로 발휘한 추사의 글씨가 새로 지은 전각들의 편액을 장식함으로써 과연 화엄루각의 장엄을 이루게 되었다. 1851년 추사는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 건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다시 유배의 길에 오르게 된다. 불과 2년 남짓의 짧은 서울 생활 동안에 쓰여진 것으로 추측되는 추사의 글씨가 다섯점이나 은해사에 전해지고 있는 것은 그만큼 은해사와 추사의 인연이 깊기 때문일 것이다.

      간송 미술관의 최완수 선생은 추사선생 글씨 중 “은해사”의 글씨를 이렇게 평했다.

      무르익을대로 익어 모두가 허술한 듯한데 어디에서도 빈틈을 찾을 수가 없다.
      둥글둥글 원만한 필획이건만 마치 철근을 구부려 놓은 듯한 힘이 있고
      뭉툭뭉툭 아무렇게나 붓을 대고 뗀 것 같은데 기수의 법칙에서 벗어난 곳이 없다.
      얼핏 결구에 무관심한 듯하지만 필획의 태세 변화와 공간배분이 그렇게 절묘할 수가 없다.

      문 위의 편액인 은해사, 불당의 대웅전, 종각의 보화루, 불광각, 노전의 일로향각 이 다섯점의 추사 글씨는 은해사의 자랑이자 소중한 문화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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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은해사 원효성사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29

      원효는 서기 617년 압량군 불지촌(현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지역)에서 담날(談捺)의 아들로 태어났다.
      원효의 속가 성은 설씨이다. 설씨는 신라의 6두품에 해당하는 신분계급이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가 원효를 잉태할 때 유성이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으며, 그를 낳을 때는 오색의 구름이 땅을 덮었다고 한다. 원효의 아명은 서당(誓幢)이라 하였다.

      서당은 ‘첫새벽’을 뜻하는데 그의 의미 그대로 비단 한국의 불교사상만이 아니라 철학사상 일반에 있어서도 큰 새벽을 연 밝은 별이었다. 원효는 사라수 라는 밤나무 아래서 태어났다고 삼국유사에 전해진다.
      이는 석가모니와 같은 출신배경이라 관심이 가져진다.

      출가
      원효는 15세 나이로 출가를 결심한다. 불지촌에서 성장한 15세 소년 서당이 무슨 생각과 계기로 출가를 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주는 분명한 기록은 없다. 그 중 가장 신빙성이 있는 두 가지를 살펴보겠다.
      한가지는 출가 이전에 화랑으로 상정되어 전쟁에 출전했던 그가 동료의 죽음을 목격하고, 유한적 존재의 극한을 경험함으로써 죽음 저편의 무한을 추구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그러나 이 추측에 대한 근거는 미약하다. 진골의 신분이라야 가능하던 화랑이 되기에는 원효의 신분에 현실적으로 제약이 따랐을 것이다.
      또 다른 한가지는 불교의 신앙 속에서 골품의 신분적 차별을 초월하는 높은 경지를 체득하려 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그것이다. 당시 중앙 고위의 관직에는 나아가기 어려운 출신 신분상의 제약을 받고 있던 6두품 출신들이 대체로 종교나 학문적인 면으로 진출했음을 유의 해볼 때, 오히려 이설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구도의 길
      원효는 진평왕대(579~631) 말기에 그의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7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이때는 통일 전야로 신라의 젊은이들의 활동이 그 어느 시대보다도 왕성했다.
      이들은 목숨을 던져 정의를 지키고, 꽃다운 이름과 아름다운 행동을 본받기를 기꺼이 했다.
      이와 같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 원효 또한 누구보다도 가슴속에 큰 불덩이를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원효성사 관련 이미지
      경산시 자인면 북사리 소재 제석 입구에 서있는 것으로 이 지역 사람들은 이곳을 원효스님의 탄생지라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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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은해사 일연국사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29

      1206년 일연은 아버지 김언필과 어머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김언필은 밝은 해를 보고 태어났다 하여 아기의 이름을 현명이라고 지었다 합니다.

      어릴 때부터 영특하고 총명했던 일연은 스님을 무척좋아했고 따라 다녔습니다. 그후 승려가 될것을 결심한 현명은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절에 들어가게 되었는데요. 이 때 그의 나이는 13세였습니다.

      이 때부터 '현명' 이라는 이름 대신 '일연'이라는 법명을 사용한 그는 학문에 남달라서 배욱고 익혀 고종 13년(1227년) 승과에 응시하여 최고의 영예인 상상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고종 22년 몽고의 3번째 침입으로 고려는 계속 어려움에 처했고 이 때 일연은 조국과 백성을 위하여 마음을 다 쏟아 기도하였습니다.

      또한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방방곡곡을 다니며 설법을 펼쳤습니다.
      사람들은 일연의 설법을 듣고 전쟁으로 인한 불안을 씻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고종은 이러한 일연의 애국심을 치하하여 '선사' 의 칭호를 내렸고 이어 고종46년(1259년)에는 '대선사'란 칭호를 받았습니다.

      그 후 원종 2년에는 왕명을 받아 서울 선월사의 주지가 되었고 당시 왕은 일연의 모습을 보지 않고서는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일연은 72세가 되던 해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읽은 후 마지막 결심을 하게 되었고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설화나 민속, 민담등을 모아 <삼국유사>를엮었습니다. 한편 일연은 83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효심 또한 지극했다고도 합니다.

      일연국사 저서
      <어록(語錄)>, <게송잡서(偈頌雜書)>, <조동오위(曹洞五位)>, <조도(祖圖)>, <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 <제승법수(諸乘法數)>, <조정사원(祖庭事苑)>

      일연국사

      428호 인각사보각국사탑및비(麟角寺普覺國師塔및碑)
      고려 충렬왕 15년(1289)에 입적한 보각국사 일연의 사리탑과 그의 행적을 기록해 놓은 탑비이다.
      일연은 『삼국유사』를 저술하는 등 많은 업적을 이룬 승려인데, 노년에 인각사에서 늙으신 어머니를 지극히 봉양하였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아침에 해가 뜰 때 이 탑에서 광채가 나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일연스님 어머니의 묘를 비추었다고 한다.
      탑은 자연석으로 된 바닥돌 위에 8각의 아래받침돌을 놓았는데 윗면이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가운데받침돌 역시 8각으로, 동물을 조각하였으나 뚜렷하지 않다. 윗받침돌은 8각이지만 원형에 가깝고, 단조롭고 소박한 연꽃이 새겨져 있다. 탑몸도 8각으로 정면에는 ‘보각국사정조지탑’이란 탑이름이 있고, 뒷면에는 문모양의 조각이 있으며 남은 6면에는 사천왕입상(四天王立像)과, 연꽃 위에 서있는 보살상(菩薩像)을 새겼다.
      지붕의 두꺼운 추녀 밑은 위로 느리게 들려 있고, 낙수면은 급한 편이며 지붕선 끝부분에 꽃장식이 달려 있다.
      지붕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이 큼직하게 올려져 있다. 탑비는 국사의 제자인 법진에 의하여 세워졌다.
      비문은 당시의 문장가인 민지가 왕명을 받들어 지었으며, 글씨는 진나라까지 가서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만들었다. 지금은 비의 형체가 많이 훼손되었으나 다행히 비문은 오대산 월정사에 사본이 남아있다.
      비문에 의하면 비를 세운 시기가 충렬왕 21년(1295)이므로, 부도탑의 건립 역시 일연이 입적한 해인 1289년에서 1295년 사이의 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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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은해사 설총대사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29

      신라 경덕왕 때 학자, 자는 총지, 원효가 아버지였고, 요석공주가 어머니이다.
      6두품 출신인 듯 하고 관직은 한림에 이르렀다. 신라십현의 한사람이다.
      <증보문헌비고>에 경주설씨의 시조로 기록되어 있다.
      출생시기는 태종무열왕대인 654 ~ 660년 사이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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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총은 나면서부터 재주가 많았고, 경사(經史)에 박통하였으며 신라말로 구경(九經)을 읽고 후생을 가르쳐 유학의 종주가 되었다. 강수(强首)·최치원(崔致遠)과 함께 신라삼문장(新羅三文章)으로 꼽혔다.

      설총이 향찰(鄕札;이두)을 고안하였다는 <설총이두창제설(薛聰吏諸創製說)>은 잘못된 것으로, 향가 표기식 방법인 향찰은, 설총 이전인 568년(진흥왕 29) 북한산 비봉(碑峰)에 세운 진흥왕순수비문에 나타나 있고 또 향찰표기 작품인 《서동요(薯童謠)》 《혜성가(彗星歌)》가 진평왕 때, 《풍요(風謠)》가 선덕여왕 때 이미 있었다.

      설총은 향찰을 집대성, 정리하였는데, 육경(六經)을 읽고 새기는 방법을 발명하여 한문을 국어화하고 유학 등 한학의 연구를 발전시키는 데 공이 컸다. 또 신문왕 때의 국학(國學) 설립에 주동적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설총의 문적(文蹟)으로는 우화적 단편산문인 《화왕계(花王戒)》가 당시 신문왕을 풍간(諷諫)하였다는 일화로서 《삼국사기》 <설총열전>에 실려 있다. 고려 현종 때 홍유후(弘儒侯)의 시호를 추증받았다. 문묘 동무에 최치원과 함께 종향(從享)되었고,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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