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품 정보
상세설명
용문사는 870년 (신라 경문왕 10년) 두운 선사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전해옵니다. 고려 태조 왕건이 신라를 정벌하러 내려가다 이 사찰을 찾았으나 운무가 자욱하여 지척을 분간치 못했는데, 어디선가 청룡 두 마리가 나타나 길을 인도하였다 하여 용문사라 불렀다고 합니다.
고려 명종 때 ‘용문사 창기사’로 개명했으나 조선 세종대왕의 비 소헌왕후의 태실을 봉안하고 ‘성불사 용문사’로 다시 고쳤고, 정조 때 문효세자의 태실을 이곳에 쓰고 ‘소백산 용문사’로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임진왜란 시 승병들의 지휘소로 이용되었던 자운루가 용문사에 아직도 남아있어 호국불교의 기풍을 후손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윤장대(보물 684호)를 비롯해 성보문화재 10여점이 현존하며, 조선 숙종 때 조성된 목각탱화(보물 89호)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팔만대장경판을 보관한 윤장대를 돌리면 번뇌가 소멸되고 공덕이 쌓여 소원이 성취된다고 해 예로부터 참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
소개·새소식
소개글
-
- 용문사 전각 대장전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5-01
대장전은 용문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이다. 용문사의 주불전인 보광명전과 나란히 서 있는 대장전은 경전을 봉인하는 전각으로, 안에 안치된 2좌의 윤장대로 더욱 유명하다. 대장전은 초창부터 중창까지 기록이 잘 남아있다. 이 건물의 이력을 알려주는 기록으로는 <중수 용문사기>(1185)와 「속용문사적기」(1688), <예천용문산창기사대장전중수상량문>(1767, 이하 <중수상량문>) 등이 있다. 이중 <중수상량문>은 기록이 현존하지 않고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간행한『한국의 고건축』에서 확인할 수 있다.
<중수용문사기>를 보면, 1173년에 2좌 윤장대를 안치할 3칸까지 건물을 지었다고 하나, 현 건물의 모습은 초창 당시의 건물이 아니고 조선시대에 중수가 거듭되어 새롭게 지어진 건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1767년 대장전 중수 때 적은 상량문에는 1173년의 초창뿐만 아니라 1467년, 1534년, 1597년, 1665년의 중수 연대가 순차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중 1665년 중수 기록을 「속용문사적기」에서는 1670년으로 적고 있어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는 옮기는 과정에서 생긴 착오라기 보다 1665년과 1670년에 거듭된 보수의 기록으로 추정된다. 「속용문사적기」에서 당시 대장전 수리 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와 같은 표현은 적묵당의 '構' 범종루의 '建', 광명전의 '立', 지장전의 '作', 응향각의 '成', 삼강당의 '設', 만월당의 '起' 등 과는 엄연히 다른 표현으로 건물 전체의 중수가 아니라 부분적인 수리를 의미한다. 두 기록에 무게를 둔다면, 1665년에 대대적인중수를 하고 나서 1670년에 기와의 이완으로 빗물이 들어가서 서까래를 교체하고 기와를 고르는 수준의 공사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까지 대장전은 「속용문사적기」의 수리 기록에 근거해 정교하고 수준 높은 치목과 장엄, 그리고 내부에 봉안된 아미타삼존불과 목각탱의 조성시기인 1684년과 연결해 17세기 건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세부 부재를 살펴보면, 공포의 쇠서가 유연하게 올라가기 시작하고, 공포를 비롯해 건물의 내·외부에 연꽃의 장식요소가 강조되었으며, 측면의 칸수와 고주의 처리가 후대에 주로 쓰이는 수법이라는 점에서 18세기에 조성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본 아미타삼존불과 목각탱이 1683년에 세워진 금당에 봉안하기 위해 제작되었다는 사실이 새로 밝혀져, 불상과 연계한 조성시기 추정은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2001~2004년도 해체수리과정에서 시도된 연륜연대조사방법에 의하면, 19세기에도 보수가 있었다. 또한 기단 공사를 위한 간이시굴조사 중 현 기단 속에서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이 노출되었는데, 창건당시의 대장전 유구일 가능성이 높다.
대장전은 윤장대와 건축적 수법 외에도 건물 외·내부의 용과 물고기 장식이 눈길을 끈다. 용과 물고기는 물과 관련된 상징물로, 이는 "일찍이 서역의 구담씨가 팔만대장경 전장을 용궁에 안치하였는데 이로 인해 대장전이 세워졌다."는 <중수상량문> 내용과 상통한다.
건물의 현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전형적인 다포계 맛배집으로 처마는 겹처마이다. 측면의 칸수도 2칸으로 계획된 것으로 보면, 1767년 중수시 완성된 형태로 보인다. 공포는 내·외로 2출목이고 삼분변작에 가까운 건물이다.(洪)
-
- 용문사 전각 보광명전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5-01
보광명전 내부 중앙에는 높은 수미단 위에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삼존불은 지권인을 결한 본존인 진리의 법신불(法身佛)인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서방 극락정토의 주존불인 아미타불(阿彌陀佛)과 동방유리광세계의 주존불인 약사불(藥師佛)을 함께 모셨다. 보광명전에 봉안된 세 부처님 중 아미타불상에서는 1515년에 중수한 발원문이 발견되었다.
-
- 용문사 전각 명부전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5-01
이 건물은 대장전의 동쪽에 있으며, 남서향을 하고 있다. 용문사의 배치축과 일정한 배치관계는 없이 지형의영향으로 대장전에서 적당히 떨어진 위치에 놓인 것으로 보인다.「 속용문사적기續龍門事蹟記」에 의하면 1649년에 보광전의 동쪽에 지장전을 짓고, 1682년에 다시 시왕전을 지었다고 하는데 그 위치는 적혀 있지 않다. 다만 실적(實籍)과 신경대사(神鏡大師)가 판불과 함께 시왕상十王像을 조성하는데 힘을 썼다는 기록이 있어 현존하는 명부전이 1682년에 지은 시왕전임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명부전은 조성 이후 이렇다 할 중수기록이 없다. 현재 명부전 내부에걸려 있는 <용문사명부전개채여단확기>(1884)를 통해서 조선말의 현황은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개채(改綵)와 단확은 단순히 지장 및 시왕상의 색을 다시 칠하고 건물에 단청공사를 다시 한 것뿐만이 아니라 건물의 흙벽을 다시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벽을 헐고 미장공사를 다시 하는 수준의 보수공사였다. 한식 건축의 특성상 미장 공사를 한다는 것은 흙벽의 뼈대역할을 하는 깃과 외를 손보는 공사이므로 벽선 등의 수장재까지 손보는 공사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에 보수공사는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다.
명부전은 존상의 개수가 많기 때문에 측면과 후면에 문을 설치하는 예가 드문데 만약 문을 설치하게 되면 기둥에 장부구멍이 생긴다. 그러나 이 건물의 경우 측면과 후면의 기둥에서 장부구멍의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계획 당시부터 지장삼존과 명부 시왕을 봉안하기 위한 건물로 볼 수 있으며, 조상시기와 건물의 결구 수법 등을 비교해 볼 때에도 상을 조정했을 당시에 세워진 건물로 생각된다.
현재 명부전은 전면과 후면의 공포양식에 큰 차이를 보이는데, 전면의 공포는 조선 말기의 공포인 반면에 후면은 쇠서의 곡서의 곡선이 완만한 주삼포식(柱三包式)의 공포로 전면에 비해 세련된 조형미를 가지고 있어 조성시기를 17세기 후반까지 올려볼 수 있다. 특히 측면에 고주가 직접 종보를 받치는 수법은 측면의 고주가 대들보를 받치고 있는 대장전의 가구수법보다 선행하는 수법으로 17세기 후반에 중창되어 가구법의 기본형식을 그대로 유지한 채 현전하는 것으로 보인다.(洪)
-
- 용문사 전각 응진전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5-01
대장전 서편 위쪽에 위치한 응진전은 16나한상을 모신 전각으로 십육전(十六殿)이라고도 한다.「 속용문사적기續龍門事蹟記」에 의하면, 이 전각은 17세기 중엽 학문(學文)에 의해 건립되었다. 응진전은 1785년에는 자하루와 함께 중창되었고, 1884년에는 명부전과 함께 보수되었다. 이에 관한 기록은 <예천용문산창기사응진전상량문醴泉龍門山寺昌基寺應眞殿上樑文>(1785)과 <용문사십육전개채여단확기>(1884)에서 찾을 수 있다.
응진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으로, 어칸에 분합문(分閤門)으로만 출입이 가능하다. 건물 내부의 삼면에는 많은 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를 위해 측면에 문을 내지 않고 들창을 설치 한 것으로 생각된다. 들창은 채광과 환기를 위한 것이다. 수서와 앙서가 한 쌍을 이루고, 연봉과 봉두로 장식된 전형적인 주삼포(柱三包) 건물로 기둥 사이의 공포대에는 화반이 놓였
으며 뒤뿌리가 짧은 부연을 달았다. 투박한 익공의 초가지 표현이나 나지막한 천정, 소규모 평면에 맞는 가구 처리 등에서 19세기 후반 혹은 이보다 늦은 시기에 중수 과정이 있었음을 알수있다.(洪)
-
- 용문사 전각 영남제일강원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5-01
漢武玉堂塵已沒 한무옥당진이몰
石崇金谷水空流 석숭금곡수공류
光陰乍曉仍還夕 광음사효잉환석
草木?春卽到秋 초목재춘즉도추
處世若無毫末善 처세약무호말선
死將何物答冥侯 사장하물답명후
한무제의 궁궐은 이미 티끌이 되었고
석숭의 별장에도 쓸쓸히 물만 흐르네
세월은 빨라 새벽이다 싶으면 이내 곧 저녁이 되고
초목은 겨우 봄인 듯했는 데 어느덧 가을이 되고마니
세상을 살면서 털끝만한 선행도 못하면
죽어서 염라대왕에게 무엇으로 대답하리.
처음엔 띠가 들쑥날쑥 자라난 것일거라 말했는데 불이 나서 다 타고 보니 원래 땅바닥이 고르지 않았구나.
-
-
변경/수정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