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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군 운주면 완창리 26번지 대둔산(大芚山) 자락에 자리한 안심사(安心寺)는 그야말로 세월의 무상함을 한껏 느끼게 해주는 고찰이다. 안심사는 1950년의 한국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무려 30여 채의 전각과 13개의 암자가 세워져 있던 거찰(巨刹)이었는데, 이제 그 번성했던 사찰의 위용은 찾아볼 수 없고 불에 타다 남은 석재들만 여기저기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특히 658판의 한글경판이 한국전쟁으로 인해 모두 불타버렸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하지만 근래 들어 옛 대웅전 건물을 중수하는 등의 중창 불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적광전과 요사는 얼마 전 신축되었다.
안심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조구(祖求)라는 스님이 창건하였다는 설과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慈欌律師)가 창건하였다는 설이 그것인데, 이 두 가지 설이 모두 「안심사 사적비」라는 동일한 자료에 수록된 내용이어서 약간의 혼돈이 따른다. 즉 「안심사 사적비」는 처음 김석주(金錫冑 1634~·1684)에 의해 비문 내용이 편찬되었으나 비가 세워지지 못하고 있다가 1759년(영조 35)에 이르러서야 경내에 건립되었다. 비를 건립하면서 원래의 내용에 새로운 사항이 추가됨으로써 창건 역사에 대한 혼돈이 초래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비문 내용을 먼저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본래의 비는 ‘사찰을 창건한 분은 조구 스님이고 비문의 글을 부탁했던 분은 처능(處能) 스님이다. 이것은 명능(明能) 스님의 뜻을 받아 한 일이었다’고 되어 있다. 조구 스님은 고려 태조 때의 고승이다. 옛 기록에는 당나라 정관(貞觀) 연간에 자장 율사가 처음 사찰을 창건하였으며, 역시 당나라 건부(乾符) 연간에 도선 대사가 창건하였고, 세 번째 중창이 곧 조구 스님의 일이라고 되어있는데, 그 정확한 내용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위에서 인용한 자료는 「안심사 사적비」의 후반부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여기서 표현한 ‘본래의 비’라는 것은 전반부에 수록된 김석주가 편찬해 놓았던 것을 의미하는데 실제로 이 비의 전반부에 수록된 김석주의 글에서는 조구 스님을 창건주로 조구 스님에서 자장율사로 변화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후반부의 글은 비문의 지은이가 ‘옛 기록’에 의존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지만 그것이 과연 어떤 기록인지는 알 수 없다.
이 사적비 후반부의 내용으로 인해 지금 사찰 안내 자료를 비롯한 각종 자료에서는 자장 율사를 창건주로 인식하고 있다. 아울러 자장 율사와 관계된 창건담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실제로 지금 안심사 앞산의 형상은 부처님 열반상과 너무나 흡사하다. 안심사의 정확한 창건 시기에 대해서는 앞으로 유적 유물조사를 비롯한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하겠으나, ‘조구’라는 스님에 대해서는 보다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안심사사적비」에 나타나는 조구 스님은 신라 말 고려 초 또는 고려 태조 때 활동한 인물로 설명되고 있는데, 이 시기에 활동한 스님으로 조구라는 이름을 가진 분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비문을 지은 사람들도 조구 스님의 활동 시기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은 내용이라는 전제를 달고 있기도 하다. 혹시 시기 차이가 나긴 하지만 여기서 언급된 조구(祖求) 스님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도왔던 인물로 1394년(태조 3)에 국사(國師)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던 조구 스님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대표적 고승인데. 당시 불교계에 대한 영항력이나 법명의 유사성으로 보아 이 스님이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커보이기 때문이다. 창건주에 대한 문제와 함께 조구 스님에 대한 연구도 앞으로 반드시 병행해나가야 할 과제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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