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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등사(遠燈寺)는 완주군 소양면 해월리 1번지 청량산(淸凉山)에 자리 잡고 있다. 청량산은 원등산이라고도 한다. 절의 창건은 신라 때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 804~880)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신라 말에 중창되었다고 한다. 창건 당시 체징 스님이 나무로 만든 물오리를 날려 보내니 바로 이곳에 내려앉았고, 여기에 절을 지어 이름을 목부암(木鳧唵)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어 신라 말 도선 국사가 중창하였다고 하는데, 이러한 창건과 중창의 역사는 모두 구전하는 이야기 이다. 고려시대에서는 진각국사 혜심(慧諶, 1178~1234)이 원등사를 찾아와 읊은 「원등난야(轅燈蘭若)」라는 시가 『무의자시집(無衣子詩潗)』에 수록되어 있다.
신성한 암국 고요히 바위 속에 뚫렸고,
용천(龍泉)은 시원스레 바위틈에 솟구친다.
높다란 이 절, 기이해서 새삼스레 가슴이 설레는데
나는 듯 위태로운 용마루와 처마는 은하수에 맞닿는다.
들녘의 물줄기는 흩어진 거울 마냥 조각조각 반짝이고
내 덮인 산마루는 늘어선 소라처럼 푸르고도 아름답다.
구름 너머 또다시 만경창파 있거늘
한 번 바라봄에 모두가 이 암자로 드는 듯
이를 통해 적어도 13세기 무렵에는 원등사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원등사의 존재를 알 수 있는 기록은 현재로서는 이 시가 유일하다. 혜심 스님은 호가 무의자로서 순천 송광사의 제2대 주지를 지냈던 분이다. 어떤 인연으로 시를 남겼는지는 모르나 이 무렵 절에 잠시나마 머물렀던 것은 분명하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진묵 일옥(震黙一玉 1562~1633) 스님이 중창하면서 오백나한을 봉안하였다. 스님은 당시 부안 월명암에 있었는데, 수도 중 멀리서 등불이 보였다. 불빛을 따라 와보니 청량산이었고 나한들이 모여 장난하고 있으므로 이곳에 절을 짓고 이름을 지금의 원등사로 하였다고 한다. 절에는 진묵 스님과 관련된 전설이 여러 편 전한다. 절 부근의 원암리 앞에 방죽이 있는데, 언제인가 스님이 그 곳을 지나다가 물고기를 나눠 먹자면서 솥에 있는 물고기를 다 먹어버렸다. 사람들은 스님이 물고기를 먹는다고 질책했는데, 스님은 태연히 냇가로 가서는 용변을 보았다. 그러자 배설물 속에 물고기들이 살아 나와서는 유유히 헤엄쳐 갔다.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은 놀라 스님에게 다시는 살생을 안 하겠노라고 백배 사죄하였다고 한다. 또한 원등사의 나한상과 얽힌 이야기도 있다. 스님은 평소 나한전에 봉안된 오백나한들과 장난하며 놀곤 했는데, 한 번은 한 나한이 스님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자 스님은 그 나한의 이마를 쳤는데 그 이후로 그 나한상의 머리에 혹이 생겼다고 한다. 조선 중기 이후 절의 역사는 공백으로 남는다. 오랜 세월동안 쇠락되어 법등만이 근근히 유지되었던 것 같다.
근래에는 1945년 무렵에 중창하였으나 한국전쟁으로 다시 불타 없어졌다. 전쟁 직후 움막 같은 관음전만 간신히 남아 참선당으로 사용되었다. 현재도 이 관음전은 절 아래쪽에 남아 있으나 너무 퇴락하였으므로 곧 철거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 뒤 1980년 무렵 요사를 관음전 부근에 지었으나 낙성되던 날 화재로 없어졌으며, 근래에는 1984년 수련 보살의 원력과 신심, 그리고 문일, 보광 스님의 동참으로 절을 중창하며 오늘에 이르렀으며, 현재도 불사가 진행 중에 있다. 최근 불사의 내용을 살펴보면, 1989년에 전부터 있던 굴법당을 확장, 중수하였고 1991년에 인법당을 새로 지었다. 이 인법당은 1997년 4월에 지금의 요사를 지으면서 철거되었다. 굴법당은 그 뒤로도 세 차례 더 보수 했는데, 과거 진묵 스님이 오백나한을 모신 인연에 따라 1991년에 새롭게 오백나한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1992년에 명부전과 요사를 새로 짓고 1996년에는 도로를 확장하였다. 현재 사찰 주변 정화작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대웅전과 참선당 등이 새로 새워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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