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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군 경천면 가천리 1078번지 불명산(佛明山)의 남쪽 중턱에 자리한 화암사(花唵寺)는 오래된 역사와 풍부한 성보문화재를 지닌 사찰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우화루와 극락전은 조선 초기 건축물을 대표하는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 불화 연구에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자료도 상당수 소장되어 있다. 화암사의 정확한 창건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화암사 중창비」의 다음 내용을 통해 어느 정도 유추가 가능한데, 먼저 중창기 일부 내용을 옮겨 보도록 하겠다.
옛날 신라의 원효와 의상 두 조사(祖師)께서 중국 땅에 유학을 갔다가 도를 얻고 귀국하여 이곳에 주석하였다. (두 분은) 사찰을 짓고 머물렀는데, 절 법당의 주불인 수월자용(水月姿容) 보살은 의상 스님께서 도솔산에 수행하러 갔다가 친견하였던 지용과 등신(等身)으로 조성한 원불(願佛)이었다. 절의 동쪽 고개에는 원효대(元曉臺)라는 법당이 있으며, 절의 남쪽 고개에는 의상암(義湘庵)이라는 암자가 있으니 모두 두 분 조사께서 수행하시던 곳이다.
「화암사 중창비」의 내용은 성달생(成達生, 1376-1444)이 1425년(세종 7)에 이곳을 중창하고 그를 기념하기 위해 1441년(세종 23)에 써놓은 글이다. 그 후 130여 년이 지난 1572년(선조 5)에 비가 건립되었다. 비의 앞면은 자신이 화암사를 중창하게 된 경위를 상세히 기록하였다. 성달생은 절을 중창하여 자신의 원찰로 삼고자 하였고, 당시 불사를 주관한 분은 해총(海聰) 스님 등이었다. 1417년(태종 17) 평안도관찰사를 역임하기도 했던 성달생은 조선 초의 문인으로서 좋은 절터를 찾던 중 1425년 당시 터만 남아 있던 이곳에 절을 중건하였다는 것이다. 비의 후면에는 위에서 인용한 원효ㆍ의상 스님의 창건 실화가 실려 있다. 위의 표현대로 화암사는 원효와 의상 스님의 수행처로 알려져 있었으며, 이를 입증하듯 사찰 동쪽과 남쪽 고개에 원효대와 의상암이라는 암자가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지만, 화암사는 이미 7세기 후반 무렵에 사격을 갖추고 있던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또한 성달생에 의한 중창도 뚜렷한 역사적 사실로 보이는데, 최근 극락전 보수 도중에 발견된 상량문 등이 자료가 이를 입증한다. 다만 성달생의 중창이 대덕년간(大德年間, 1297~1308)에 이루어졌다는 상량문의 표현은 시기를 잘못 이해한 결과로 보인다. 아무튼 1711년(숙종 37)에 이르기까지 진행된 중창불사를 정리해 놓은 이 상량문은 화암사의 역사를 정리하는데 있어 매우 소중한 자료임이 분명하다.
가느다란 잎사귀에 털이 더수룩한 나무가 있어 허리띠처럼 어지럽게 드리웠는데. 푸른빛이 구경할 만하며, 다른 군(郡)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세속에서는 전단목(栴檀木)이라고 부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위의 내용은 「화암사 중창비」의 내용을 옮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중창비의 내용은 이 전단목을 의상 스님이 서역(西域)에서 구해 온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어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원래의 자료가 다소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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