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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설명
백련사의 본래 이름은 만덕산 백련사(萬德山 白蓮寺)이며 조선후기에 만덕사로 불리우다가 현재는 백련사로 부르고 있으며 신라말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고려명종(1170년)때 원묘국사 요세에 의해 중창되었다. 고려 후기에 8국사를 배출하였고 조선 후기에는 8대사가 머물렀던 도량이며 고종 19년(1232년) 에 원묘국사 3세가 이곳에서 보현도량을 개설하고 백련결사를 일으킨 유서 깊은 명찰이다. 대웅전은 조선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집으로 겹처마인 다포식 건물이다. 내부에는 목조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 하고 있다. 이 삼존불은 중앙 본존불이 석가여래이기 때문에 당연히 좌우의 불상은 보살상이 배치 되어야 하는데도 여래상을 안치한 점이 특이하다. 조선 후기에 몇 차례의 중수가 이루어졌으며, 현재는 대웅전, 응진당, 명부전, 칠성각 등의 건물이 남아있다.
남도답사일번지 강진 백련사(白蓮寺)의 템플스테이는 천연기념물 151호인 동백숲 명상과 다산 선생과 혜장선사의 우정의오솔길을 새벽 산책으로 옛선인들의 숨결을 느끼고 천일각에서 일출을 보며, 달빛 좋은밤이면 육화당에서 금빛물결 일렁이는 구강포를 굽어보면서 주지스님과의 다담이 마련되어 있으며, 계절별로 다산의 찻잎를 채취해 발효차(자하차)만들기와 찻씨줍기, 동백씨앗 주워서 단주 만들기 등이 마련되어 있다. 단체일 경우 문화해설사를 초빙해서 남도 문화답사의 좋은 추억도 만들 수 있다.
소개·새소식
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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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련사 용혈암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6-07
용혈암은 백련사의 암자로, 4명의 국사가 살다가 떠난 불교의 성지 가운데 하나이다. 백련사를 중창해서 백련거사를 일으켰던 원묘국사 역시 이곳에서 지내시다가 입적했으며, 당시에는 흙으로 빚어 구운 청자 불상이 안치되어 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진정, 정명, 최자 등의 스님이 용혈암을 말년의 처소로 삼으셨다.
강진군 도암면 석문리 덕룡산의 남동쪽 산자락에 위치하는 용혈암지(강진군 향토문화유산 제47호)는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 백련사(백련결사) 1세 원묘국사 요세(1163~1245년)가 1245년 4월에 용혈암에 기거했다는 기록이 있어 1245년 이전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용혈암은 2세 정명국사 천인(1205~1248년)를 거쳐, 4세 진정국사 천책(1206-1294년), 7세 진감국사 무외가 기거하였으며 원묘국사와 정명국사는 이곳에서 입적하였다. 그리고 용혈암은 백련사 소속 암자인데, 백련사는 고려시대 8명의 국사를 배출하였던 매우 유서 깊은 대사찰로 당시 백련사와 용혈암의 위상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출토유물은 기와를 비롯하여 청자와 분청자 등이 출토되었는데, 무엇보다 고려시대 대표적인 청자 생산지였던 강진의 위상을 대변하듯 청자 불상편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주목되고 있다. 청자 불상은 이전에도 많은 수량이 출토되었으나 정식적인 학술조사를 통해 확인된 예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용혈암지 시굴조사에서도 비록 편으로 출토되었으나 불상의 머리와 몸통 부분 등 많은 수량이 출토되어 국사가 주석하였던 용혈암의 위상과 고려청자의 성지(聖地) 강진의 중요성을 알려주고 있다.
강진군 박석환 문화관광과장은 “이번 시굴조사를 통해 그동안 문헌상으로만 일부 알려져 왔던 용혈암의 성격, 유적의 중요성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앞으로 문화재청․ 전라남도와 협의하여 보다 정밀한 발굴조사를 시행하여 용혈암의 역사적 규모와 성격을 밝히고 향후 체계적인 정비 복원을 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
- 백련사 차(茶) 이야기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6-07
차는 타닌을 비롯해 인체 건강에 이로운 성분을 다량으로 함유하고 있다는 물리적 요인과 더불어 이를 만들어서 마시는 과정 자체를 ‘명선(茗禪‘)’, ‘다선일여(茶禪一如)’라고 할 만큼 불교적 수행과 동일시되어 왔다. 때문에 국교가 불교였던 고려시대 때에는 전국 각지에 ‘다방(茶房)’이 있을 정도로 크게 유행했었다. 그러다 조선조 초기에는 잠시 주춤했다가 중기 이후부터 다시 성행했고, 조선조 말기부터 차는 건강과 심신수련의 대명사가 되었다.
백련사가 있는 강진에서는 고려시대 때부터 무위사와 월남사지가 있는 월출산 일대를 중심으로 차가 재배되고 있었다. 근래 월남사지 지표 발굴조사에서 ‘차맷돌’이 발굴된 것이 이를 증명해준다. 또 백련결사 당시에는 차가 스님들이 애호했던 수행의 방편이었다. 백련결사의 스님들이었던 정명국사 천인, 진정국사 천책, 무외국사 목암스님의 기록에는 차에 관한 시가 있다. 뒤로 이것은 조선조 초기의 대공덕주 효령대군과 행호선사에게 이어지고, 후기에는 소요대사 태능, 설봉대사 희정에게 이어졌다.
조선후기 차문화의 부흥에서 백련사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와 지내던 때(1801-1818), 대흥사 강백을 지냈던 아암 혜장선사(兒巖 惠藏禪師)와의 나이와 종교를 초월한 교유는 차(茶山)를 매개로 한 것이다.
특히 조선조 차문화의 중흥조로 알려진 대흥사 일지암의 초의선사(草衣禪師)는 아암 혜장선사의 소개로 다산초당에서 정약용 선생을 만나 차의 기능, 유래, 효능, 제작방법 등 여러 의견들을 나누고 이를 발전시켰다. 다산이 초의선사에게 차를 만들어 보내주길 권한 ‘걸명소(乞茗訴)’가 유명하다. 훗날 초의선사는 조선후기 차문화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추사 김정희 선생이 제주도에서 귀양생활을 했을 때에 막역하게 교류했다. 모두 차를 매개로 한 교류였다. 또 혜장선사의 제자인 철경응언, 기어자굉, 침교법훈, 철선혜즙과 같은 스님들 역시 차와 더불어 다산과 교류했다.
지금은 백련사에 깃든 이런 역사적 전통을 잇기 위해 혜암스님의 문하로 다솔사의 효당 최범술스님께 차를 공부한 효서 여연(曉誓 如然)스님께서 차문화의 진작을 위해 노력중이다. -
- 백련사 대웅보전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6-07
대웅보전(전라남도 유형문화제 제 136호) Main Buddha Hall
1760년 큰 불이 일어나 대웅보전이 소실되자 월인당 총신 스님은 왈찰(曰刹), 지정(智正), 혜철(惠哲), 태화(太和), 신증(愼證), 규연(圭演), 찰연(察演), 윤철(閏哲), 연징(蓮澄), 붕관(鵬寬) 스님 등과 함께 대웅보전 중건을 서원하고 시주를 모아 이듬해 4월 8일 불사를 시작해서 1762년 4월 13일 대웅보전을 완성합니다. 새로운 법당에 모셔진 삼존불(아미타불, 석가모니불, 약사여래불)은 1710년 목조로 조성된 부처님으로 얼굴에 드러난 온화한 미소는 당시 불상을 조각했던 조선사람들의 순박하고 지극한 마음을 시대를 넘어 느길 수 있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법당 내부에는 아름다운 벽화와 조각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어 옛 선조들의 아름다운 신앙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대웅보전 벽화 Wall Painting of the Buddha Hall
묘법연화경에 보면 영축산에서 부처님께서 설법하실 때 하늘에서는 만다라, 만수사 꽃비가 내리고 하늘의 노래를 좋아하는 긴나라와 하늘의 음악을 담당하는 건달바 등이 천상의 음악을 연주하며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제자인 아라한들과 하늘 신, 보살, 사부대중들이 이전에 없었던 일에 기뻐 합장하며 한마음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으며 기뻐했다고 합니다. 백련사 대웅보전의 아름다움 벽화는 묘법연화경에 나오는 이러한 내용을 근거로 스님들이 직접 그린 것으로 추정됩니다.
16나한
묘법연화경에 보면 아라한들은 모든 허물이 사라지고 공부를 이루어 번뇌가 없고 자유로운 마음을 가지셨다고 합니다. 법주기라는 경에서 부처님께서는 미륵보살이 부처로 다시 이 세상에 오시기 전까지 16분의 나한들에게 이 세상에 머물면서 불법을 보호하고 불자들에게 복을 주라는 명령을 내리셔서 아직 이 세상에 현존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삼존불
백련사 대웅보전에 모셔진 삼존불과 똑같이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약사여래불이 순서대로 그려져 있고 부처님의 상수제자인 가섭존자와 아난존자께서 이 세 분의 부처님을 보시고 있습니다.
하늘 부처님
석가모니 부처님의 법문을 듣기 위해 도리천에서 하늘 부처님들이 내려오십니다. 이 부처님들은 신통이 자유자재하다고 전해지고 대웅보전에 그려진 부처님들은 특이하게 조선 사람들의 복장을 하고 있습니다.
건달바와 긴나라
천상에서 음악을 담당하는 신으로 ‘건달바’와 노래를 담당하는 신으로 ‘긴나라’가 있습니다. 건달바는 향기를 먹고 살며 부처님이 설법하는 곳에 나타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찬탄하고 부처님의 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아미타 부처님
연잎 위에서 선정에 드신 부처님으로 대웅보전에는 18분의 부처님, 각기 다른 수인을 맺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원교의 대웅보전과 김생의 만덕산 백련
신라시대 명필 김생의 글씨를 집자한 만덕산 백련사(萬德山 白蓮社) 현판과 원교 이광사가 쓴 대웅보전, 만경루 현판 등은 서예가들에게 서체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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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련사 사적비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6-07
다산 정약용이 편집한 <만덕사지>에 이 사적비를 가리키며 “옛 비는 유실되어 그 소재를 알 수 없고 귀부만 남았는데, 탄기 스님이 다른 돌로 비를 세우면서 옛날 비석의 귀부를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뤄보면, 이전에 비석이 세워졌으나 유실된 후 1681년 탄기 스님이 이를 재건한 것으로 보인다.
귀부와 비석의 양식을 보더라도 건립 연대가 다른 것을 명확히 알 수 있는데, 귀부의 보존 상태는 매우 양호하며 조각 기법도 뛰어나 고려 전기의 작풍이 고스란이 드러난다. 비석은 전형적인 조선 시대 석비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적비 전면에는 백련사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고, 뒷면에는 당시 불사(佛事)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으며, 양 측면에는 아름다운 초화문이 양각되어 있다. 또한 비석 정상에는 등을 맞댄 채 서로 반대 방향을 보고 있는 두 마리의 용이 매우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현재 보물 제1396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 때, 원묘국사가 두류에서 찾아와 백련사의 유지를 둘러보니 처세와 기승이 좋아 그의 문도이던 원형, 지담, 법안 등에게 중수할 책임을 맡기니, 중수는 금 대안 3년 신미 1211년에 시작하여 정우 4년 1216년에 마무리하였는데 세운 건물은 모두 80여 채였다.
그리고 문인과 천인 등에게 설법과 담경을 하게 하니 전국 각지에서 승려들이 몰려와 섬기기를 앞다투고, 공경과 목수들은 그의 풍격과 성망을 흠모하여 결사에 함께 한 자가 300명이나 되었다. 고려의 왕도 이 사실을 듣고 정유년(1237년)에 선사(禪師)라 사호하고, 여러 차례 포지를 내리고 세시마다 사뢰한 것이아주 많았다. 이러고부터 본 사찰은 '동방 제일의 도량이 되었다.
11사에게 전발하여 무외국사에 이르렀고, 그도 백련사에서 지냈으며 그의 의발을 전해주고 도법을 드러내 밝혀서 널리 퍼지게 했다. 그러므로 지역과 사람이 함께 세상에서 높임을 받는다는 말처럼 사람들이 이곳 백련사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다른 곳의 산사에 견줄 바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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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련사 명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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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24-06-07
명(冥) 이란 보고 들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명부란 저승 세계를 말하며, 명부전은 세상 모든 중생들의 아픔을 아파하며 지옥의 중생들까지 구제하겠다는 뜻을 품은 지장보살을 모신 전각이다. 한국에서는 죽은 이들의 넋을 인도하여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지장보살에 대한 신앙이 성행했으며, 이 전각에는 지옥의 심판관인 시왕을 비롯해 권속으로 무독귀왕, 도명존자, 판관, 녹사, 인왕 등이 모셔져 있다.
백련사의 명부전 안에는 1775년에 정암 즉원(晶麙 卽圓, 1738~1794) 스님이 쓴 <시왕전중수기> 현판이 함께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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