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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 정보
상세설명
회암사는 ‘하늘이 내린 보배’라는 뜻의 천보산 자락에 위치한 아름다운 사찰입니다. 회암사는 고려 충숙왕 15년(1328) 인도의 고승 지공 화상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명종 4년(1174), 충선왕 4년(1313)에도 회암사 이름의 기록이 있어 정확한 창건연대와 창건주는 알 수 없습니다. 지공 화상 창건 이후 우왕 2년(1376) 세조비 정희왕후의 명으로 삼창하였습니다. 왕후가 죽고 나라의 정책이 억불정책으로 변하면서 명종 20년(1565)에 절이 불태워져 폐사되게 됩니다.
번성기 때에는 전각이 총 262간이었고, 모셔진 불상이 7구가 있었습니다. 고려말에는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었으며 거주하는 승려의 수가 3,000명에 이르기까지 했습니다. 이어 조선시대 초까지 전국에서 가장 큰 사찰이었습니다. 당시 회암사는 크고 웅장하며 아름답기가 동국 제일로서 이런 절은 중국에서도 많이 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특히, 회암사는 태조 이성계가 왕위를 태종 이방원에게 선위하고 난 뒤 수도 생활을 한 사찰로 유명한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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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새소식
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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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암사 삼대화상 부도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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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주 회암사지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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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암사 보물로 지정된 양각선사비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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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5-23
보물 제387호
지정일 : 1963.09.02
소재지 : 경기 양주시 회암동 산8 회암사 (불교중앙박물관 보관)
시대 : 고려시대
회암사터에 서 있었던 비석으로, 고려말의 승려인 나옹화상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나옹(1320∼1376)은 1344년에 회암사로 들어가 불교에 입문하였다. 1358년 원나라에서 돌아와 왕의 부름을 사양하고 구월산과 금강산 등에서 은거하다가 회암사로 다시 돌아와 절을 크게 새로 지어올렸다. 신륵사에서 57세로 입적할 때까지 불법만을 행하였으며, 입적한 후 시호를 ‘선각’이라 하고 그 이듬해에 비를 세웠다.
비의 모습은 당나라의 형식을 닮은 복고풍으로, 비의 머릿돌을 따로 얹지 않았다. 즉 비의 몸돌 윗부분에 두 마리의 용을 새긴 후 그 중앙에 비명칭을 새기는 공간을 두었다. 비를 지고 있는 돌거북은 큰 돌을 단순한 조각기법으로 새겨 다소 추상적으로 다루어 놓았으나, 비머릿돌에 새겨진 용의 조각은 정갈하면서도 역동적이다.
비문의 글은 이색이 짓고, 글씨는 권중화가 쓴 것으로, 나옹화상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비의 글씨는 예서체로서,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와 중원고구려비 이후 고려말에 와서 처음이다. 이는 당시의 예서 연구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게 해주는 한 예이다.
1997년 보호각이 불에 타 비의 몸돌이 파손되어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보존처리를 실시한 후 보존관리상 2001년도에 경기도박물관에 위탁 보관하고 있다. 비가 있었던 원래의 자리에는 비 받침돌인 귀부가 그대로 있으며, 원형을 본따 만든 비가 세워져 있다.
출처 : 문화재청 및 양주시청 -
- 회암사 무학대사 홍융탑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5-23
보물 제388호
지정일 : 1963.09.02
소재지 : 경기 양주시 회암동 산8 회암사
시대 : 조선시대
회암사는 고려 충숙왕(1328)때 지공(指空)이 창건하여 조선 순조 때인 1800년대에 폐사된 사찰이다. 조선 전기 왕실의 보호를 받던 절로서 태조 이성계가 늙은 후에 머무르면서 수도하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절터의 북쪽 능선 위에 지공, 나옹의 승탑과 함께 서있는 이 부도는 무학대사의 묘탑이다. 둘레에는 탑을 보호하기 위한 난간이 둘러져 있다.
회암사의 주지이기도 했던 무학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활약한 승려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의 관계로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이성계의 꿈을 풀이하여 왕이 될 것을 예언한 이야기와 한양천도와 관련된 설화 등은 특히 유명하다.
부도의 형태는 구름무늬를 조각한 8각의 바닥돌 위에 받침부분인 기단이 놓이고 탑신과 머리장식부분이 포개져 있는 모습이다.
기단의 아래·윗돌은 연꽃모양의 돌이고 가운데돌은 배가 불룩한 8각의 북모양으로 각 면에는 모양이 서로 다른 꽃조각이 도드라져 있다. 탑신은 몸돌이 둥근 모양으로 표면에 용과 구름이 가득 새겨져 시선을 모은다. 용의 머리와 몸, 비늘 등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생동감있게 보이고 구름무늬가 한층 운동감을 느끼게 한다. 지붕돌은 8각으로 처마부분에는 목조건축을 흉내낸 모양들이 새겨져 있다. 경사는 급하며 추녀끝은 가볍게 들려있다.
지붕 꼭대기에는 둥근 돌 하나만 올려놓아 간소화된 형태를 보인다.
조선 전기의 양식을 보여주는 이 부도는 규모가 웅대하고 모양도 가지런하다. 무학대사묘비의 기록으로 미루어 1407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 문화재청 및 양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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