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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사의 창건 설화는 가야불교의 인도 직수입설(불교남방전래설)에서 유래합니다.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 왕의 부인 허황후가 인도 아유타국에서 오면서 함께 온 사촌오빠 장유화상(허보옥)이 머물 수 있도록 김수로왕께서 창건했다는 것입니다. 성주사는 가야시대 고찰로서, 임금이 지은 절이라 하여 '금(金)절'이라 불렸으며, 특히 '김수로 왕과 왕비 허왕옥 사이에 난 아들 10명 중 일곱 명이 모두 불모산으로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뤄볼 때 가야시대 당시 창건됐다는 김수로 왕 창건설이 유력하게 전해집니다.
지금도 성주사에는 이런 설화를 뒷받침하는 '어수각'이라는 우물이 전해져오고 있습니다. 심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이 우물은, 김수로 왕이 출가한 일곱 왕자가 보고 싶어 절을 찾아 왔을 때 물을 마셨던 우물이란 뜻으로, '임금이 마신 우물'이란 어수각(御水閣)이란 이름이 붙었습니다. 성주사에는 인도에서 모시고 온 불상이 있었는데 일본으로 모시고 갈려다가 풍랑으로 마산 바다에 빠뜨렸고, 대중들이 천신만고 끝에 관음전에 다시 관음보살상을 모셨다는 설이 있습니다.
중창 설화는 827년(신라 흥덕왕 2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동쪽으로부터 왜구가 바다를 메우듯 병선을 이끌고 침범하자 왕이 왜적을 격퇴할 방안을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나 서로 결론을 못한 채 토론만 이어가던 5일째 되는 날 밤, 어떤 신인이 왕께 현몽하여 말하기를 "지리산에 무염이란 화상이 있으니 화상을 불러 격퇴방안을 문의하면 왜적을 격퇴가기가 어렵지 않다"고 했습니다. 왕은 곧 사자를 보내 무염화상을 모셔 격퇴계책을 물었습니다. 이에 무염화상이 석장을 산 위에 세우고 왼손으로 배를 치니 그 소리에 천지가 진동함과 동시에 철갑을 한 병사가 나타나 산의 주위에 둘러쌓였습니다. 그러자 왜구가 이를 보고 크게 놀라 도주했습니다. 왕은 이에 크게 기뻐하며 무염화상을 왕사로 모시고 사은을 갚은 뜻으로 밭 360결과 노비 100호를 내려서 금(金)절을 크게 중창하게 했으며, 이때부터 '성인이 상주하는 절'이라며 금절(金寺)에서 '성주사'로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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