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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련사는 신라 흥덕왕 2년(827년)에 서울시 성동구 하왕십리동 종남산에 창건되었다. 창건 당시는 ‘안정사 (安靜寺 혹은 安定寺)’로 불렸으며 백성을 편안히 하여 나라를 굳건히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조선 태조 4년(1395년), 왕사(王師)였던 무학대사가 주석하면서 중창하였으며 중창을 위한 기도 회향 시 법 당 앞 연못에서 푸른 연꽃이 피어나 그 서기방광(瑞氣放光)함을 보고 무학대사가 ‘청련사’란 사명(寺名)을 사용 하게 되었다. 무학대사의 중창(重創) 이후, 청련사에서는 여러 차례의 건물 중건(重建)과 경전판각 및 불화조성이 있었으 며, 현대에 이르러 1950년 한국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청련사를 덕봉화상이 가람을 재정비하고 후학을 지도하 면서 호국사찰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2000년대 초, 당시 주지인 백우스님은 고려 말 태고보우국사의 법손(法孫)으로 한국불교의 법맥을 잇고 무 학대사의 유지를 전승하기 위해 사찰을 이건하기로 결심하고 절터를 물색한 끝에 지금의 자리인 양주시 장흥 면 개명산 자락에 터를 잡고 2010년 완공하여, 창건 이후 여덟 번째 중창인 개명산 청련사 가람을 창건하게 되 었다. 백우대사는 후학 양성을 위하여 2010년 4월에 안정불교대학을 설립하였으며, 2010년 6월에는 청련사 범음 범패보존회를 창립, 2014년 2월 보존회 명칭을 청련사 예수시왕생칠재보존회로 변경하여 상주권공, 예수재 과 정 등을 수료한 이수자들에게 이수증을 발급하고 있다.또한 백우대사는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시고자 발원을 하고 끊임없이 기도 정진 하던 중 스리랑카의 마힌다 라자팍샤 대통령으로부터 미리사 웨띠야 탑에 봉안되어 있던 진신사리를 기증 하겠다는 뜻을 전달받고 청련사 호국삼층보탑을 건립하여 진신사리를 모시니 명실상부한 적멸보궁이자 호국사찰이 되었다. 창건 이후 역대 선·조사의 원력으로 중건, 중수되어온 청련사 가람을 후세에 길이 남기기 위하여 2017년 12 월 재단법인 천년고찰 청련사를 창립하고 초대 이사장에는 상진스님께서 취임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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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새소식
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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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련사 소개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6-11
창건 당시의 신라 불교가 국가와 민족을 위호하는 호국사상에 근본바탕을 두었듯이 안정사 창건 연기 자체도 중생교화와 호국기원 사찰로서 창건되었음은 중창불사 권선문이 명백히 밝혀주고 있다. 불•보살님의 가피를 빌어 외침으로부터 국가의 안위를 기원하고 부처님의 진리를 만민에게 전법하여 욕망과 번뇌가 가득한 정신세계를 정화시킴으로서 국가는 태평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안정된 생활을 영위케 하고자 했음은 안정사라는 사명 또한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뜻 깊은 창건의 의미를 지닌 아정사는 조선시대에 와서 태조의 왕사이며 당시 최고 스승이셨던 무학대사께서 주석하시면서 사찰을 중창하셨고이곳을 병화 불침지의 성역임을 선포하셨다.
특히, 풍수지리에 통달한 무학대사는 왕궁 터 선정의 왕명을 받고 대웅전 뒤편 석벽 아래에서 7일 동안 인등을 밝히고 기도를 드려 관음보살님의 화현신을 접하고 지금의 경복궁 터를 선정하였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는 영험의 도량이기도 하다. 오늘날에도 이곳에는 많은 불자들이 인등을 밝히고 부처님의 가피를 입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사가 사찰을 중창할 당시 푸른 연꽃의 서기가 나타났다 해서 청련사 라는 이명이 생겨났던 사실로 보아 예사로운 사지가 아님이 분명하다. 1395년(조선 태조 4) 무학대사 자초(自超)가 중창하였다는 설이 전하는데, 당시 뒤뜰에 핀 푸른 연꽃에 상서로운 기운이 서린 것을 보고 사찰 이름도 청련사(靑蓮寺)로 바꾸었다고 한다. 무학대사가 조선의 도읍을 정하기 위하여 이 절의 석벽 아래서 7일 동안 기도하면서 관세음보살의 화신(化身)을 접하고 경복궁 터를 잡았다는 설화도 전한다. 또 무학대사는 무학봉 뒤에 큰 물이 고이면 절이 크게 번창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는데, 실제로 조선 말기에 상수도 보급을 위하여 대현산배수지가 생긴 이래 절이 번창하였다.
1726년(영조 2) 경림(敬林)이, 1801년(순조 1) 가선(嘉善)과 후정(厚淨)이 각각 중수 또는 중창하였다. 1849년(현종 15)에 종원(宗元)과 석총(釋摠) 등이 큰방과 요사를 세우며 중창하였고, 1854년(철종 5) 종원과 두총(斗摠)이 법당을 중건하였다. 1887년(고종 24) 칠성각을 중수하였고, 1924년 주지 윤영상(尹永相)이 큰방과 시왕전을 중창하였다. 1942년에 주지 학봉(學鳳)이 법당을 중창하였으나, 1950년 6·25전쟁으로 소실되었고, 이후 1965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대웅전, 삼성전을 건립하여 불교중흥의 요람처로서 발전의 계기로 삼고자 했을 즈음 안정사는 근대 우리 민족사의 가장 큰 슬픔으요, 암울했던 일제 치하에서 아픈 상처를 입게 된다. 이는 독립투사 김상옥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쫓기던 김상옥 투사가 안정사로 은신했고 그 탈출을 도와준 것이 화근이 되어 모든 스님이 연행되어 무수한 고문이 스님들의 성체에 가해졌고 대중스님 가운데 성암스님이 고문으로 인하여 끝내 이승을 하직하는 시련이었다.
생을 버려야 하는 고통 속에서도 국가를 위하여 주권을 당당히 주장했던 스님들의 꿋꿋한 자세에서 청안 고승의 기개와 사시 청청한 죽절의 면모를 볼 수 있음은 호국사찰의 후예다운 일이다. 이러한 가운데서 일본의 패망과 해방, 동족상잔인 한국전쟁의 상처가 아물거 갈 무렵 불교계에서는 천추에 한을 버릴 수 없는 사항이 있었으니 1954년도에 발생된 불교 분규이다. 불교정화라는 미명 아래 정교분리가 헌법에도 명백함에도 당시 이승만 대통력의 불법유시는 불교에 대한 탄압이었으나 마침내 단일종으로 맥을 계승하던 유구한 역사의 한국불교가 양분되었고 1970년 종조 태고국사의 원융통화의 종풍과 호국사상, 원효사상의 화쟁이념과 무애의 보살도 실천, 한용운 선사의 불교유신과 자주성신의 뜻을 받들어 불교의 현대화, 대중화, 생활화의 가치를 높이 들고 보살불교 건설을 위해 용맹정진 할 것을 굳게 서원하며 등록한 한국불교 태고종이 한국불교의 전통 종단임을 재확인하고 안정사는 태고종단에 사찰등록 900호로 등록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계종과 태고종의 분규 사찰로 토지가 매각되어 2008년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산80번지로 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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