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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설명
해인사는 신라 시대에 그 도도한 화엄종의 정신적인 기반을 확충하고 선양한다는 기치 아래, 이른바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로 세워진 가람입니다.
화엄종의 근본 경전인 화엄경은 4세기 무렵에 중앙아시아에서 성립된 대승 경전의 최고봉으로서, 그 본디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며 동양문화의 정수라고 일컬어집니다. 이 경전에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해인사 이름은 바로 이 '해인삼매'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해인삼매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한없이 깊고 넓은 큰 바다에 비유하여, 거친 파도, 곧 중생의 번뇌 망상이 비로소 멈출 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海) 속에 비치는(印) 경지를 말합니다.
이렇게 여실(如實)한 세계가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모습이요, 우리 중생의 본디 모습이니, 이것이 곧 해인삼매의 가르침입니다.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해인사는 해동 화엄종의 초조(初祖)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의 법손인 순응(順應) 화상과 그 제자인 이정(理貞) 화상이 신라 제40대 임금 애장왕 3년인 서기 802년 10월16일,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지금의 대적광전에 자리에 창건하였습니다. 이리하여 화엄종은 개화기를 맞던 신라시대를 거쳐, 해인사를 중심으로, 희랑(希朗) 대사를 위시하여 균여(均如), 의천(義天)과 같은 빼어난 학승들을 배출하기에 이릅니다.
해인사는 한국불교의 성지이며 또한 세계문화유산 및 국보 보물 등 70여 점의 유물이 산재해 있습니다. 국내 최대 사찰로, 명산인 가야산 자락에 위치하여, 가야산을 뒤로하고 매화산을 앞에 두고 있어 그 웅장한 모습과 주변 경관이 어우러져 경이로울 뿐 아니라 송림과 산사가 어우러져 연출하는 설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경에 젖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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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새소식
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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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인사 전각 배치도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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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인사 전각 일주문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5-03
큰 절에 들어설 때마다 처음 만나는 것이 일주문이다.
절의 어귀에 서있는 제일문으로서 절의 위용을 한눈에 느끼게 해 주는 일주문은, 곧 모든 중생이 성불의 세계로 나아가는 길의 첫 관문을 상징하니 초발심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일주문은 기둥이 양쪽에 하나씩 세워져 문을 지탱하고 있는 건축구조에서 그 이름이 비롯되었다. 해인사의 일주문은 홍하문이라고도 하며, 그 소박한 아름다움과 주위 경치와의 어우러짐이 일품인 까닭에 일주문 가운데에서도 가장 이름이 나 있다.
신라시대에 절을 처음 세울 때부터 일주문은 지금의 자리에 있었겠지만, 조선시대 세조3년 봄에 중수하여 그 뒤로 지금까지 다섯차례에 걸쳐 중수하였다는 기록만이 전해 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건축 양식은 조선시대 초기의 양식인 듯하다.
마지막 중건은 1940년에 있었다.
일주문 정면에 있는 현판의 글씨 "가야산 해인사"는 근대 서가의 대가인 해강 김규진의 글씨로서 산문의 격을 한층 더 높여 준다. -
- 해인사 전각 봉황문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5-03
일주문으로 들어서서, 수문장처럼 버티어 서 있는 천년 노목의 가로수를 따라 그 정취에 취해 걷다 보면 두번째 문인 봉황문이 나타난다.
이 봉황문은 천왕문이라고도 불린다.
큰 절은 으레 천왕문이나 사천왕문 또는 금강문 따위로도 불리는 문을 갖고 있기 마련인데, 이 안에는 돌이나 나무 등으로 조각되거나 탱화에 그려진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다.
사천왕은 본디 욕계 육천 가운데 사왕천에 머물면서 천상으로 들어오는 여러 착한 사람을 보호하는 선신으로 수미산의 동서남북에 위치하여 악한 것을 멸하고 불법을 옹호하려는 서원을 세웠으므로, 산문 입구에 봉안하여 수문역과 도량 수호역을 맡게 하였다. 이러한 신중들은 대부분 힌두교의 영향이며, 불교가 대중화하는 가운데 인도의 민간 신앙과 함께 접합될 때 생긴 사상이다. -
- 해인사 전각 해탈문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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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인사 전각 우화당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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