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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설명
한국천주교회 발상지이자 뿌리인 천진암성지
천진암성지는 세계교회 역사에 유례없이 평신도들이 스스로 진리를 탐구하여 천주교 신앙을 깨닫고, 열성적으로 전하여 교회를 세우며, 끝까지 목숨을 바쳐 천주의 존재를 증거하기 위해 순교하신 창립선조들의 유해를 모신 한국천주교회의 발상지입니다.
500권이나 되는 저서를 남긴 대학자로서 천진암강학에 참여하였던 다산 정약용 선생은 『여유당전서』 권철신 묘지명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그 옛날 기해년(1779년) 겨울에 천진암에서 강학이 있었는데 이벽이 설중에 주어사에서 도착하여 촛불을 밝히고 경서를 담론하였다(昔在己亥冬講學于天眞菴走漁寺李檗雪中夜 至張燭談經).” 한편, 페레올 고 주교와 김대건 신부와 함께 조선에 들어와서 비밀리에 20년 이상 선교활동을 했던 제5대 다블뤼 안 주교는 『조선순교사비망록』에서 “조선천주교회의 진정한 기원은 이벽의 강학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천진암강학은 본래 녹암 권철신 선생이 주도하여 성현들의 경서를 공부하며 심신을 수양하는 유교 선비들의 모임이었습니다. 광암 이벽 성조께서 1779년 한 겨울밤에 찾아와서, 중국에서 들어 온 천학 서적을 통해 깨달았던 우주만물의 기원에 대한 진리를 소개하였고, 바야흐로 천주교 신앙의 싹이 움트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선비들은 한국에서 처음 천주교 신앙을 전하며 교회를 세우고 마침내 순교하였으므로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들이라고 일컬어 지고 있습니다.
천진암에 자주 찾아왔던 다산 정약용 선생은 훗날 “절은 허물어져 옛 모습이 없어졌다(寺破無舊)”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렇게 천진암 암자는 없어졌고, 동네 농부들은 그곳을 논으로 만들었으며 역사에서 완전히 잊혀졌습니다.
1960년대에 남종삼 성인의 후손인 남상철 회장은 다산의 기록에서 천진암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불교 사찰 목록을 조사하여 마침내 동네 노인들의 증언을 통해서 천진암 터를 발견하였습니다. 이러한 역사 기록을 토대로, 변기영 몬시뇰은 1978년부터 천진암 터 토지를 매입하여 성역화사업을 시작하였고, 옛날 천주교 신앙 진리를 찾고 실천했던 그 자리에 비로소 한국천주교 창립선조들의 묘역을 조성하였습니다.
한국천주교 창립선조 묘역에 모셔진 5위 순교자들은 하느님의 종 광암 이벽 요한 세례자(1979년 포천에서 이장), 녹암 권철신 암브로시오, 직암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981년 양평에서 이장), 만천 이승훈 베드로(1981년 인천에서 이장), 복자 선암 정약종 아우구스티노(1981년 화성에서 이장) 등이며, 한국 교회는 신앙을 증거하기 위하여 거룩하게 순교한 이분들의 시성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또한 조선교구설립자 묘역에는 정하상 바오로 성인과 유진길 아우구티노 성인, 정철상 가롤로 복자의 묘를 모시고 있습니다. 그 옆에는 한국천주교 창립선조 가족들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성지 개방 시간
개방시간 10:00 ~ 17:00
입장마감 16:00까지(오후 4시)
미사시간
주일 : 12:00
월~토요일 : 12:00(첫 토요일 18:00 성모신심미사)
한국천주교회창립기념미사는 매년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11시 미사
천진회(후원회)을 위한 미사는 매월 마지막 날 12시 미사
고해성사 미사 시작 30분 전
신심행사 안내
촛불기도회 - 매월 첫 토요일
17:00 - 묵주기도 10단 / 18:00 - 성모신심미사
예비자1일 피정 - 수시 접수
강의, 미사, 식사, 묘역참배
묵주기도 피정 - 매월 첫 월요일
10:00~16:00
이벽(李檗, 1754- 787)
조선후기의 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덕조(德操). 호는 광암(曠菴). 세례명은 요한세자. 경기도 포천출신.
정약용(丁若鏞)의 맏형 정약현은 이벽의 누이와 혼인. 이익(李瀷)을 스승으로 하는 남인학자의 일원이었으며 일찍부터 주자학의 모순을 깨달아 새로운 사상을 모색하던 중, 사신들을 통하여 청나라로부터 유입된 서학서(西學書)를 열독하였다. 1784년 이승훈이 중국에 서장관으로 가서 세례를 받고 오자 그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일어나자, 배교(背敎)하지 않으면 목을 매어 죽겠다는 아버지의 천주교신앙에 대한 결사적인 반대에 부딪쳐 고민하다가 열병을 얻어 1785년 봄에 33세로 요절하였다. 《성교요지(聖敎要旨)》가 전한다.
권철신(權哲身, 1736-1801)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기명(旣明), 호는 녹암(鹿庵), 세례명은 암브로시오(Ambrosius). 실세한 남인 가문에 태어나 일찍이 과거를 포기하였다. 천진암 강학회를 주도한 최연장자로 김원성(金源星)·정약전(丁若銓)·정약용(丁若鏞)·이벽(李蘗)·이윤하(李潤夏) 등 남인계 학자들과 강학회를 열어 서학을 연구하고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1801년 체포되어 정약종·홍낙민(洪樂敏)·이승훈·홍교만(洪敎萬)·최필공(崔必恭)·최관천(崔冠泉) 등과 같이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러나 형 집행에 앞서 옥중에서 장독으로 죽었다.
권일신(權日身, 1741-1791)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오(省吾), 호는 직암(稷庵). 세례명은 프란시스 하비에르(Fran-cis Xavier). 갈산 출신. 권철신의 아우이며 안정복의 사위이다.
남인계의 학자로 1782년(정조 6) 이벽(李檗)의 권유로 천주교 입교, 이승훈(李承薰)에게 를 받았다.이승훈과 함께 포교에 전력해 충청도 내포(內浦)의 이존창(李存倉, 혹은 李端源)을 입교시키고, 또 전주의 유항검(柳恒儉)을 개종시켰다. 가성직자단(假聖職者團) 주교(主敎)가 되어 견고한 교회의 건설을 위해 교계제도(敎階制度)를 세웠다.
1791년에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자 체포되어 제주도 유배령을 받았다가 근거리인 예산으로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80노모로 인해 교회에 대한 소신을 약간 굽힌 것으로 추정되며 유배지로 가는 도중 장독 후유증으로 죽었다.
이승훈(李承薰, 1756-1801)
본관은 평창(平昌). 자는 자술(子述), 호는 만천(蔓川). 세례명은 베드로. 아버지는 참판 동욱(東郁)이며, 어머니는 이가환(李家煥)의 누이이다. 한국천주교회 창설자의 한 사람으로 한국교회 최초의 영세자이다. 1801년 신유박해로 이가환·정약종·홍낙민(洪樂民) 등과 함께 체포되어 4월 8일 서대문 밖 형장에서 대역죄로 참수되었다.
그의 가문은 4대에 걸쳐 순교자를 내었다. 즉, 1868년(고종 5)에 아들 신규(身逵)와 손자 재의(在誼)가 순교하고, 1871년에 증손인 연구(蓮龜)·균구(筠龜)가 제물포에서 순교하였다.
정약종(丁若鍾, 1760-1801)
본관은 나주(羅州).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경기도 광주(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출신. 진주목사 재원(載遠)의 아들이며, 약현(若鉉)·약전(若銓)·약용(若鏞)의 4형제 중 셋째이다. 정하상이 그의 아들이다.
1786년경 중형인 정약전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천성이 곧고 모든 일에 정성을 다 하는 성품을 지녀, 서학서(西學書)를 접하게 되자 이에 심취하여 가톨릭 교리를 연구함으로써 당대에서 가장 교리지식이 뛰어났다. 1791년(정조 15) 천주교박해로 형제와 친척, 친구들이 모두 배교 또는 멀리 하여도,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1801년 2월에 체포되었고, 대역죄인으로 다스려져, 2월 26일 이승훈(李承薰)·최창현(崔昌顯)·홍낙민(洪樂民) 등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부인 유선임, 아들 철상, 하상, 딸 정혜 등 가족 모두 순교했다. 한글 교리서 《주교요지(主敎要旨)》를 지었다.
성 정하상(丁夏祥) 바오로(1795∼1839)
정약종(丁若鐘)의 둘째 아들로 그는 범 라우렌시오(앵베르) 주교에게 신학생으로 뽑혀 라틴어와 신학 공부까지 하였으나 성품(聖品)을 받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는 7세 때인 1801년 신유박해로 아버지가 순교하자 숙부인 정약용의 집에 기거하다가 1813년 홀로 상경하여 교리를 배우고 교회 일을 도우며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전개하여 조신철, 유진길 등과 함께 9차례나 북경을 왕래하여 유방제(劉方濟) 신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앵베르 주교 등 네 분의 외국 신부들을 영입하는 데 성공하였다.기해박해가 일어난 1839년 7월 모친 유선임(柳仙任) 체칠리아, 동생 정정혜 엘리사벳과 함께 체포된 정하상은 곧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지어 재상에게 올렸는데 이 글은 한국 최초의 호교문(護敎文)이다. 유진길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그 때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성 유진길(劉進吉) 아우구스티노(1791∼1839)
순교 당시 정3품 당상 역관의 높은 벼슬에 있었던 유진길은 서울의 유명한 역관 집안에서 태어났다. 1824년 동지사(冬至使)의 수석 역관으로 북경에 가서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 뒤 유진길은 북경 교회와 연락을 담당하며 8차례에 걸쳐 북경을 왕래하면서 정하상, 조신철과 함께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전개하였다. 마침내는 교황에게 성직자의 파견을 간청하는 편지를 북경 주교에게 전달하였고 그 결과 네 분의 외국인 신부들이 입국하게 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7월 17일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주교와 신부들의 은신처를 대라며 매우 가혹한 형벌을 받았으나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정하상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49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복자 정철상(丁喆祥) 카롤로(? -1801)
아버지는 1801년에 순교한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이고, 어머니는 한산이씨. 세례명은 카롤로이다. 경기도 광주의 마재(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있는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839년에 순교한 유선임 체칠리아 성녀는 그의 계모이며, 같은 해에 순교한 정하상 바오로 성인과 정정혜 엘리사벳 성녀는 그의 이복 동생들이다. 신유박해시 20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2014년 시복되어 그해 정하상의 묘 옆에 의묘(擬墓)가 조성되었다. 의묘(擬墓)는 가묘, 허묘라고도 하는데 시신이나 유골이 없는 묘다.
한국교회 창설자의 가족묘
정지해(1712-1756) 정약용의 조부
풍산홍씨 정약용의 조모. 홍유한의 친척 홍길보의 딸
정재원(1730-1792) 정약용의 아버지. 이부만의 사돈
의령남씨(1729-1753) 정재원의 전부인. 정약현의 어머니
해남윤씨(1728-1770) 정재원의 후처. 정약전, 약종, 약용의 어머니. 이승훈의 장모
정약전(1758-1816) 정약용의 둘째형, 흑산도 유배 《자산어보》지음 우이도에서 선종
풍산김씨(1758-1825) 정약전의 부인, 을사박해(1785)와 신유박해(1801)로 수난
이부만(1727-1817) 이벽의 아버지
청주한씨(1724-1809)이벽의 어머니
이석(1727-1817) 이벽의 동생
양천허씨(1757-1821)이석의 부인
경주이씨(1750-1780) 이벽의 누이이며, 정약현의 부인이고 황사영의 장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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