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세정보
상세설명
이성례 마리아 (1801~1839)
하느님의 종순교자 이성례 마리아는 내포지방의 사도로 불리는 순교자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의 집안사람으로 1801년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남성처럼 씩씩하고 괄괄한 성격을 지녔던 순교자는 17세에 같은 날 체포되어 자신보다 먼저 장하 순교로서 신앙을 증거하고 성인 반열에 오른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혼인하여 홍주 다락골의 새터(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서 살면서 1821년에 조선의 제 2대 방인 사제이며 땀의 순교자로서 조선 방방곡곡을 다니시며 교우들을 보살피다 하느님 품으로 가신 장남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을 낳았다.
순교자는 언제나 집안일을 지혜롭게 꾸려나갔고, 일가친척들이 불화 없이 지내도록 하는 데 노력하였다. 또 나이가 어린 남편을 공경하고 그의 말에 순종하면서 가정을 화목하게 이끌어나갔다. 그러다가 얼마 후에는 남편의 뜻에 따라 가족과 함께 한양으로 이주하였으며, 박해의 위험이 있자 다시 강원도를 거쳐 경기도 부평, 수리산 뒤뜸이(현 경기도 안양시 안양 3동)로 이주하여 교우촌을 이루어 살게 되었다. 장남 최양업 토마스는 공소 방문을 오신 모방 베드로 신부님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로 떠나보냈다. 순교자는 오로지 천주의 뜻을 따라 기도와 묵상에 전념하며 애덕을 실천하며 살고자 애쓰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향과 재산을 버리면서까지 낯선 곳으로 자주 이주하는 생활을 하는 남편을 따라 모든 어려움과 궁핍을 기쁘게 참아 내었다. 어린 자식들이 굶주림에 지쳐서 칭얼거릴 때면, 요셉과 성모 마리아가 이집트로 피난 가시던 이야기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인내심과 참을성을 키워 주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난 뒤, 남편 최경환이 한양을 오가면서 순교자들의 시신을 찾아 묻어주고 불쌍한 교우들을 돌보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자, 마리아는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자식들을 보살폈다. 그러던 중 찜통같은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7월 새벽 포졸들이 마을에 들이닥쳤고 순교할 각오로 준비된 마을 사람 모두를 체포하여 한양으로 압송하게 되었다. 이 때 순교자 이성례 마리아는 포졸들에게 줄 밥상을 차려 조반을 먹게 한 다음 앞장 선 남편 최 프란치스코를 위시하여 어린 아이를 업은 이성례 마리아와 부인들이 뒤를 따르는 40여명의 교우들이 행렬을 지어 한양으로 향하였다.
포도청으로 압송된 마리아는 남편이나 다른 자식들과 격리되어 젖먹이 스테파노와 함께 여인들의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문초와 형벌을 받아 팔이 부러지고 살이 너덜너덜하게 찢어졌으나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 하였다. 순교자는 이런 육체적 고통 보다 더 큰 고통은 갓난아기에 대한 모성애로부터 오는 고통이었다. 갓난아기는 젖을 달라고 우는데 젖은 나오지 않고, 먹을 것을 달라고 하는데 먹일 것이 없어서 엄마의 눈앞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편이 살아 있을 때에는 꿋꿋이 버티어 나가다가 남편이 옥중에서 죽고 어린 것이 감방에 축 늘어져 누워 있는 것을 보며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곤장에도 칼에도 용맹하였으나 자식에 대한 애정에는 약해져 자신의 본래 마음과는 달리 거짓말로 배교한다고 한마디 함으로써 현세적, 영신적 구원을 함께 도모해야겠다는 그릇된 생각이 들었다. 결국 순교자는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장남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중국에서 유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이내 그녀는 다시 체포되어 형조로 압송되었다. 이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인자하심으로 당신 여종의 나약함을 구원해 주시는 은혜를 베푸셨다. 형조에 이르자, 이성례 마리아는 그곳에 수감되어 있던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 현경련 베네딕다 등 용감한 신자들의 권면으로 큰 용기를 얻게 되었다. 순교자는 이전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쳤고, 재판관 앞으로 나가 전에 한 배교를 용감하게 취소하였다. 또 모성애를 비롯하여 모든 유혹을 용감히 이겨냈으며, 그곳 옥중에서 자신의 막내아들이 기아로 죽는 끔찍한 모습을 보아야했다. 그러나 순교자는 두 아들을 하느님께 바친 것을 기뻐하였다. 그리고 유리걸식하는 네 아들들에게 구원에 유익한 말과 모범으로 교리와 기도문을 가르쳤다. 둘째 아들 최의정 야고보는 한 달 이상 감옥을 오가면서 모친과 신자들의 시중을 들어주었다.
마리아는 관례대로 마지막 문초와 형벌 끝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런 다음 감옥으로 찾아온 자식들에게 “형장에는 오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자신의 마음이 약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녀는 자식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이제는 다들 가거라. 절대로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잊지 말아라. 서로 화목하게 살며,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서로 떨어지지 말고 맏형 토마스가 돌아오기를 기다려라.”
1839년 12월 27일(양력 1839년 1월 31일), 마리아는 동료 신자 6명과 함께 형장으로 정해진 당고개(현 서울 용산구 원효로 2가)로 끌려 나갔다. 그런 다음 영광스럽게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녀의 나이는 39세였다. 순교 당시까지 그녀는 안온하고 평화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
새소식
-
변경/수정신청
선택된 옵션
-
이성례 마리아+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