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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매못성지 성인들의 이장기(移葬記)
    본 성지의 ‘승리의 성모성당’ 성인유해 공경실에는 네 분의 성인 유해가 모셔져 있다.

    1866년 3월 30일 순교한 성인들의 시신은 3일간 전시된다.다섯 성인들의 시신은 이 곳 주민들에 의해서 형장의 모래밭에 묻힌다. 약 3 주후에 황석두 루카의 시신은 가족들에 의해 삽티를 거쳐 현재 연풍에 안장되었고, 나머지 네 순교자의 시신은 음력 4월 8일 이 힐라리오(치문)가 집안 식구들과 조카사위 이바르나바와 함께 성인들의 유해를 이장하기 위해 갈매못으로 갔고, 군인들의 훈련장이었고 인근에 주막이 가까이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잔돌을 헐어냈다. 시체는 적신(赤身)이었고, 또 목은 다 각각 제 몸에 맞추어 놓고 칡으로 허리를 둘러 묶여 있었다. 그들은 칡 틈에서 오가(吳家), 안가(安家)라고 쓴 나무 패를 발견한다. 이들은 주교님과 신부님들을 구분하여 네 개의 지게에 지고 10여리 되는 곳에 봉분은 하나이나 광중은 넷으로 하여 매장한다.

    그 후 얼마가 지나서 산소를 찾은 힐라리오는 여우가 구멍을 뚫어 놓았기 때문에 이장을 결심한다. 이 힐라리오는 당시의 상황을 백불랑 신부에게 이렇게 보고한다. “여우가 구멍을 뚫은 고로 더 이상 그 자리에 버려 둘 수가 없어 이장하기로 하였다. 이장 비용으로 홍산 도앙골에 사는 김순장과 공주 국실점의 신회장이 40냥을 대었고, 힐라리오의 형 이냐시오와 셋째 형 요한 크리소스토모가 오 좌수(吳座首)에게 가서 50냥을 얻어왔으며, 또 요한 크리소스토모가 40냥을 대고, 힐라리오의 부친이 27냥을 대어 가지고 음력 7월 13일 밤에 무덤을 파 본즉 시체는 거의 썩었고, 여우가 파먹어 민 신부의 엄지발가락이 상하였으나 아주 떨어지지는 않았다. 냄새가 감당키 어려울 정도로 심했으니 칠성판은 그대로 사용하고 베로 다시 염을 하여, 날이 밝을 무렵에 배에 싣고 뱃길로 12일이 걸려 남포 서재골(현 서짓골)로 이장하였다.”

    힐라리오는 그간의 고생을 이렇게 적고 있다. “수로로 5리쯤 되는 여수리 큰 강 어귀에 가 있다가 바람이 일어나며 비와 뇌성이 크게 일어나니 이 때는 밤이라, 모두 겁을 내고, 도로 가패라 하는 곳으로 두 번을 쫓겨 들어가서 또 나아가다가 술섬이라 하는 데로 쫓겨 밤에 풍랑을 겪어 거의 죽을 뻔하고, 아침에 밥을 시키고 사공이 나서 보더니, 오늘은 더 큰 바람이 일어날 터이니 진작 녹안이뿌리로 가자 하여 행선을 시작하매 바람이 크게 일어나 화살같이 달아나니 수로로 20리를 가서 녹안이를 가매, 떠날 때 안친 밥이 겨우 끓었으니 그 급하게 달아난 사정은 가히 알 만하고, 물에 떠 있기를 8일을 하고, 집에 12일 만에 돌아왔습니다.”

    힐라리오는 남포 서재골 담배밭 한가운데서 광중 4개를 파고 안주교, 민신부와 오신부, 그리고 장주기 회장의 시신을 묻고 봉분은 하나로 만들었다. 주산(主山)을 뒤로 하고 동남쪽을 향해 섰을 때 왼쪽은 민신부, 그 다음은 안주교, 그 다음 오른쪽은 오신부, 그 다음은 장회장이었다.

    1882년 한미조약에 따라 선교의 자유가 어느 정도 용인되자 당시 부주교이던 불랑(백) 신부는 병인년에 순교한 순교자들의 시복을 위한 예비 조사를 위해 순교자들을 이장했던 이 이냐시오(치서)와 힐라리오(치문) 형제에게 면례를 지시하게 된다. 이장 작업은 음력 정월 21일 밤에 이냐시오와 힐라리오, 조카 안드레아와 조카사위 이 바르나바와 김 안드레아, 조카 프란치스코와 토다리 최서방(바오로) 등 일곱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다.

    힐라리오는 불랑 부주교에게 그 상황을 이렇게 보고한다. “일곱 사람이 함께 산소를 파 본즉 횡대(橫帶)하였던 나무가 아래로는 모두 썩어 없어지고 뼈가 흙에 혼합되어 해골 위만 홍대쪽이 남아있어서 조심하여 낱낱이 백골을 모아 올 때에 흘릴까 조심하였으나 작은 뼈가 다 삭아 없어진 것도 있은 즉, 계골(計骨)을 하여 보매 혹 없어진 것도 있어, 모두 삭아 없어졌는지 혹은 흙에 묻혀 잃어버렸는지 자세히 모르고, 남아 있는 것은 해골과 팔과 다리와 갈비뼈는 각 위를 분간하여 종이로 각각 봉하여 백 신부께 바치는 사정으로 전후의 일장 일을 아는 대로 사실을 따라 기록하여 바치나이다. 임오(壬午) 2월 초4일 죄인 힐라리오”

    면례하는 일에 참여한 힐라리오 형제를 위시한 일곱 명은 음력 2월 3일 불랑 부주교 앞에서 고상을 모시고 미사 경본 위에 손을 얹고 다음과 같이 시체의 진실성을 허원 다짐하였다. “죄인 등이 이번 신부님의 분부대로 병인년에 치명하신 안주교, 오신부, 민신부, 장회장의 시체를 면례하여 오라 하시기에 이 달 20일 밤에 파묘하여 본즉, 전에 죄인 등이 장사한 모양으로 그냥 있으나 17년이 지났으매 백골이 혹시 삭아 없어진 것도 있고, 밤에 흙에 섞인 백골을 줍자 한즉, 아무리 조심스럽게 낱낱이 살피었으나 혹시 서실될까 염려되어 각 위를 백골 각각 봉하여 왔으며, 백골이 혹시 바뀌었는가는 일점 의심이 없기로 천주 대전에 아무 의심 없는 줄로 맹세하옵니다.”

    홍산 남포의 서재골로 이장하였던 다블뤼 (안) 안토니오 주교, 위앵 (민) 마르티노 루카 신부, 오메트르 (오) 베드로 신부, 장주기 회장 등 네 순교자의 유해는 1882년 3월 블랑 부주교의 지시로 발굴되어 일본 나가사키의 오우라 대성당으로 옮겨졌다가, 1894년 5월 22일에는 다시 서울 용산 신학교로 옮겨졌고, 1900년 9월 10일에는 명동 주교좌 성당의 지하실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1967년에는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옮겨져 지하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이 거룩한 다섯 순교자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로마 베드로 대성당에서 시복되고, 1984년 5월 6일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여의도 광장에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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