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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설명
갈매못 지명의 유래
갈매못 성지는 충남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에 소재해 있으며, 보령시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오천면은 20여 개의 유인도와 48개의 무인도가 속해 있다. ‘오천’(鰲川)은 자라 오(鰲)에 내 천(川) 자가 어우러져 이루 어진 이름이다. 즉, ‘오천’이라는 명칭은 오천을 비롯한 천수만(淺水灣) 일대의 지형이 마치 자라와도 같다고 하여 유래되었으며, 영보리의 ‘영보 (永寶)’는 말 그대로 영원한 보물이 있다는 뜻이다. 갈매못은 예로부터 성지가 속해 있는 영보리 마을 뒷산의 산세가 ‘목마른 말이 물을 먹는 모 습’과도 같은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의 명당이라 하여 ‘갈마무시’, ‘갈마연’, ‘갈마연동(渴馬淵洞)’이라 불렸던 곳이다. 그러므로 갈매못은 갈마연(渴馬淵)에서 온 이름이다. 그 이름만으로도 영적인 곳이다. 이제 목마른 말이 아니라 지친 현대인들이 생명의 물을 마시는 생명의 땅이기 때문이다.
오천의 역사
갈매못 성지 인근에 있는 오천항은 바다 양면에 있는 산이 방파제 역할을 해주기 때문에 아무리 심한 폭풍우에도 피해가 없고, 또 수심이 깊어 간만의 차로 인해 선박의 통행이 전혀 불편하지 않은 서해안의 천혜의 항구이다. 오천항은 이미 백제 때부터 회이포라는 항구로 이용되었으며, 통일 신라 당시에는 당나라와의 교역항구로서 이름이 높았고, 고려로 접어들면서 왜구의 침입이 잦아지자 오천항 일대를 지키는 군선이 머물렀던 곳이다. 오천에 수영(水營)이 설치된 것은 조선조 때이다. 조선조 당시 우리나라에는 바다를 지키는 3개의 수영이 있었다. 충무의 경상 수영, 여수의 전라 수영, 오천의 충청 수영이다. 각 수영에는 수군절도사를 상주시켰으며, 바다를 지키는 군영이 함께 있었다.
오천에는 조선 태조 5년(1405년)에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가 자리하면서 처음으로 군영이 설치되었고, 중종 4년(1509년)에 서해안 방어 기지로 쌓기 시작한 오천성은 무려 16년간에 걸쳐 축성되었다. 높이 3m, 길이가 3,000m나 되는 오천성에는 4개의 성문이 있었고, 정3품관의 수도절도사가 상주하였다. 오천항은 군선 100여 척이 정박하고, 수군도 3,000명이 항상 주둔하였던 군항이었다. 현재는 성벽 일부와 충청 수군절도사가 주둔했던 장교청 건물과 진휼청만이 남아 있다. 샤를 달래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는 갈매못 성지를 “형장(刑場)으로 택한 곳은 바닷가 모래사장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 형장은 바로 수군들의 훈련장이었다.
갈매못이 형장(刑場)이 된 이유
첫째, 외연도(外烟島)와의 연관성 : 외연도는 보령시에 속해 있는 70여 개의 섬들 중 가장 멀리 있는 섬으로서 1846년(현종12년) 6월에 프랑스 함대 세실 사령관이 3척의 군함을 이끌고 외연도에 정박해서 기해박해 때(1839년)에 앵배르, 모방, 샤스탕 신부 등 3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을 살해한 책임을 묻는 편지를 상자에 남겨 놓고 돌아간 적이 있었다. 이 사건을 조정에서는 조선 영해 침입 사건으로 간주하여 당시 옥중에 있던 김대건 신부의 처형이 앞당겨졌고, 1866년 3월 30일에는 흥성 대원군이 서양 오랑캐를 내친다는 의미에서 세실함장이 침범했던 외연도에서 가까운 오천의 수영을 택하여 다블뤼 안 안토니오 주교를 비롯하여 오메트르 오 베드로 신부, 위앵 민 마르티노 루카 신부, 황석두 루카, 장주기 요셉 등 5명을 끌고 와 외연도를 바라보고 목을 쳐서 처형하게 하였던 것이다.
둘째, 고종의 국혼 : 병인년 3월은 고종의 국혼이 한 달 밖에 남지 않았었다. 당시 궁중에서는 무당들을 불러 점을 친 결과 국혼을 앞두고 한양에서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은 국가의 장래에 이롭지 못하니, 사형수들을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250리 밖으로 내보내어 형을 집행케 하라는 무당의 예언에 따라, 오천의 충청수영으로 보내어 군문효수하라는 명이 내려졌던 것이다.
성지의 첫 발견
갈매못 성지는 충남 부여군 금사리 쇠양리 본당 주임이었던 정규랑(레오)신부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순교 현장을 발굴하게 된다. 1925년 정규량 신부는 공주 본당 최말구 신부와 괴산군 높은 다랑이 주임 윤 바오로 신부와 함께 갈매못 순교현장을 발견한다. 정규량 신부는 처형된 다섯 성인의 시신을 몰래 파서 홍산지방 석죽골로 이장한 이바오로와 그 조부 이바오로, 중백부 지수씨, 부친 힐라리오씨가 공소에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도움과 같은 목격증인으로서 고증해준 편옹택씨 이조용씨 그리고 김순경씨와 함께 성인들의 머리가 걸렸던 장깃대가 세워졌던 자리와 참수하던 자리 그리고 임시로 매장했던 세 구덩이를 확인한다.
정규랑 신부는 서둘러 그 땅 20평을 10원(일화)에 사들여 등기하고(1926년 9월 14일) 1929년 1월에 서울 천주교 재단 법인에 기증하게 된다. 오기선 신부의 “곡예사 같은 인생”에서는 정규량(레오1883-1953)신부가 이곳 갈매못을 발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주보 : 성 다블뤼 안토니오 외 네 성인
신자수 : 91미사시간
평일 - 화/11:30, 수/11:30, 목/11:30, 금/11:30,
토요일 - 11:30
주일 - 8(본당 미사)/11:30(순례객 미사)자가용 이용시
- 고속도로 경유
서해안 고속도로 광천 IC에서 우회전하여 300m → 천북, 오천 방향으로 10km → 오천방향(보령 방조제 경유) 5km 정도
- 국도 경유
21번 국도 광천과 보령 중간에 있는 주포사거리에서 이정표 오천·오천항 방향으로 10.5km 오시면 됩니다.
대중교통
- 기차
광천역이나 대천역에서 하차하여 '오천' 혹은 '오천영보리'행 시내버스를 이용하시거나 택시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 시외버스
광천시외버스터미널이나 보령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하차하여 '오천' 혹은 '오천영보리'행 시내버스를 이용하시거나 택시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 광천이나 대천에서 갈매못성지까지 택시 이용시 25분(금액 약 20,000원), 버스로 약 1시간 소요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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