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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안루갈다길
요안루갈다길은 유중철(요한), 이순이(루갈다) 동정부부가 살았던 초남이 성지에서 그분들의 묘소가 있는 치명자산까지이며, 이 구간을 도보순례하면서 그분들의 정신을 계승하는 순례문화 정착을 위해 2015년 5월 2일(토)에 선포됐다.
매년(정확한 날짜는 추후 공지) 교구민 전체(주교,사제,수도자,평신도)가 참여하여 요안루갈다길 도보순례를 실시합니다.
주요 순례지 정보
호남의 사도 유항검의 생가터 초남이
063-214-5004
식사 : 20명이상 가능 사전 연락을 통해 예약 가능합니다.
미사시간
월 : 오전 7시, 화~주일 : 오전 11시
순례자 미사는 사전 연락을 통해 조정가능합니다.초남이 성지는 유항검과 그의 가족이 살았던 생가터이다. 유항검은 1784년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내려와 가족들과 가솔들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김제, 금구, 고창, 영광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했다.
가성직 제도 아래에서 신부로도 활동했지만, 가성직제의 부당함을 알고 난 후에는 그 일을 그만두고 다른 동료들에게도 그만 둘 것을 요청했다. 그 후 동료들과 함께 성직자 영입운동을 함께했다. 1795년에는 주문모신부가 이곳에 내려와 미사를 집전하고 유항검과 교회의 여러 현안들을 논의했다.
유항검은 신유박해(1801) 때 체포되었고 ‘대박청래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지목되어 대역무도죄를 선고받아 그해 9월 17일 풍남문 밖(전동성당)에서 능지처참형으로 순교했다. 또한 그의 가족들은 순교하거나 유배되었고 그의 집은 파가저택 되었다. 또 이곳은 유중철과 이순이가 동정부부의 삶을 4년동안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살던 유항검의 가족들 중 7명이 신유박해 때 순교했는데 이들의 시신은 처음에 바우배기에 모셨다가 1914년에 치명자산으로 이장했다.순교자들의 피의 꽃으로 피어난 숲정이
063-255-2677숲이 칙칙하게 우거져 있어 숲정이로 불렸던 이곳은 조선시대 군사훈련장이었다. 이 근처에는 피 묻은 칼을 씻을 수 있는 전주천이 있었기에 사형장으로도 사용되었다.
신유박해(1801) 때 ‘호남의 사도’ 유항검의 가족의 일부(신희, 이육희, 이순이, 유중성)와 동료(김천애 등)가 순교한 이후로 천주교인들의 피가 마르지 않았던 곳이다.
기해박해(1839) 때는 12년간 전주옥에 수감되어 있던 5명(이일언, 신태보, 이태권, 정태봉, 김대권)과 많은 신자(홍재영, 최조이,이조이, 오종례 등)들이 순교했다. 병인박해(1866) 때는 6명(이명서, 손선지, 정문호, 한재권, 조화서, 정원지)이, 1867년에도 많은 신자들(김사집 등)이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숲정이 순교터는 후에 이명서 성인의 후손이 매입해 순교자비를 세웠다.
숲정이 순교터는 도지정 기념물 제71호이다.
성 조윤호의 순교터 서천교
063-284-3222서천교는 병인박해때 순교한 조윤호 성인의 순교터이다. 조윤호는 조화서 성인의 아들이며, 1839년에 치명한 조 안드레아의 손자로, 부친 조화서와 함께 완주 소양 성지동에 살다가 함께 잡혀와 부친이 참수된 지 열흘 뒤에 서천교에서 밧줄로 목이 졸려 순교했다.
그는 전주 감영 에서 부친과 여러 차례에 걸친 신문과 형벌을 받았으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끝까지 신앙 을 지켰다. 부친이 형장으로 갈 때에는 서로 천국에서 만날 것을 기약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부자를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같은 칼로 처형할 수 없다는 국법에 따라 부친이 참수된지 10일 뒤인 12월 23일(혹은 12월 18일, 12월 28일) 전주 서문 밖 서천교 형장에서 모진 매를 맞았지만, 죽지 않아 끝내는 밧줄로 목을 졸라 사형시켰다.
당시 그의 나이 18세였다.한국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성지 전동성당
063-284-3222
미사시간
월 : 오전 5시 30분
화,목 : 오전 5시 30분 / 오후 7시
수,금 : 오전 5시 30분 / 오전 10시
토 : 오전 5시 30분 / 오후 4시 / 오후 6시
일 : 오전 5시 30분 / 오전 9시 / 오전 10시 30분 / 오후 5시 / 오후 8전동성당이 세워진 자리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풍남문 밖, 현 전동성당 자리는 신해박해(1791)때,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이 유교식 조상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웠던 진산사건으로 순교한 곳이고, 또 ‘호남의 사도’로 불렸던 유항검과 그의 동료들이 신유박해(1801) 때 순교한 곳이기 때문이다.
전동본당의 초대 주임신부는 프랑스인 보두네 신부였다. 1889년 전주본당이 설립되고 보두네 신부가 부임했지만, 당시 전주에는 신자가 한 명도 없어 처음에는 완주 소양 대승리에서부터 시작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1891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고, 1908년에 성당 건축을 시작했으며 설계는 명동성당을 설계한 프와넬 신부가 했다. 보두네 신부를 통해 이곳에 성당이 건립된 일은 하느님의 섭리였다. 보두네 신부 자신도 이곳이 순교터인 줄은 몰랐지만 순교자들의 피가 서려있을 법한 전주성 성벽의 돌과 흙으로 주춧돌을 세웠는데, 바로 그곳이 순교터였기 때문이다.
전동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써 사적 제 288호 이고 사제관은 도지정 문화재 자료 178호이다.
유항검의 가족 7분이 묻힌 치명자산
063-285-5755
식사 : 사전 연락을 통해 예약 가능합니다.
미사시간
월, 화, 수, 목, 금, 토, 주일 : 11시
순례자 미사는 사전 연락을 통해 조정가능합니다.
치명자산에는 신유박해(1801)때 순교한 ‘호남의 사도’ 유항검과 그의 가족 6명이 합장되어 있다. 이 중에는 다블뤼 주교가 “한국 순교자들의 보석”이라고 칭송한 동정부부 순교자 이순이와 유중철도 포함되어 있다.
유항검 가족은 처음에 초남이 근처 바우배기에 매장 되었다가 1914년 전주성당(현 전동성당)의 보두네 신부가 유해를 모셔와 현재 자리에 모셨다.
보두네 신부가 해발 300여 미터의 산정에 순교자들을 모신 뜻은 순교자들의 순결한 신심과 고매한 덕을 높이 기리고, 순교자들이 전주를 수호해 주기를 기원함이었다. 이후 1993년 유항검의 유해 확인을 위한 시굴 작업을 진행하여 유항검과 그 가족 6명 모두의 유해를 확인한 후 재안장했다.순교자 묘 밑에는 1994년 건립된 기념성당이 자리하고 있으며, 성직자 묘지와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있다.
순교자 묘는 도지정 기념물 제68호로 지정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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