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 130여년의 역사를 지켜온 산증인.
뿌리깊은 나무, 어머니의 마음,
맑고 시원하게 흐르는 물
1885~현재까지
지난 130여년동안 새문안교회는 한국의 어머니 교회로서 뿌리깊은 신앙과 뜨거운 선교정신, 교회 연합의 선구적 역할, 민족역사 발전에 책임지는 교회로서 그 역할을 다해 왔습니다.
새문안교회는 흔들리지 않는 뿌리깊은 나무, 조화와 포용력을 지닌 어머니의 마음, 맑고 시원하게 흐르는 물과 같은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만큼 새문안교회는 한국 기독교 130여년의 역사를 지켜온 산증인이며 신앙의 표준이 되어왔습니다.
이제 새문안교회는 한국인 모두의 교회요,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앞서 세워진 교회로서 민족과 한국교회 전체를 위해 복음의 횃불을 높이 들고 앞서 나가는 교회가 되고자 합니다.
담임목사 이상학 목사
[약력]
연세대학교 건축학과(B.S.)
서울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M.A.)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신학과(M. Div.)
에모리 신학대학원 조직신학과(Th. M.)
버클리 연합신학대학원(GTU) 조직신학과 철학(Ph.D.)
포항제일교회 담임목사
현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과 겸임교수
현 교회교육현장연구소 이사장
현 새문안교회 담임목사
[저서]
시작하는 그리스도인에게(2016. 두란노)
비움(2020. 넥서스CROSS)
부목사
이성숙 목사
7교구
관리위원회, 경조부
1남선교회
731-2719
seedlee825@naver.com
장석현 목사
1교구
예배위원회, 비전위원회
행정선임, 안수집사회
731-2712
grisim21@hanmail.net
임종희 목사
8교구
양육위원회, 교구관리부, 권사회
5남선교회
731-2706
imhari72@hanmail.net
윤지욱 목사
3교구
선교위원회, 북한선교부, 음악부
장로기도회
1여전도회
731-2707
jiwook1004@hanmail.net
이요한 목사
4교구
청장년교육부, 청장년3부, 중보기도
731-2710
11a-infantry@hanmail.net
엄재광 목사
9교구
봉사위원회, 사회부, 자원봉사부, 친교봉사부
서대문복지관, 성인부, 추모관
새로핌찬양대
6남선교회
731-2709
jk7um@hanmail.net
고형석 목사
5교구
전도부
예본찬양대
상록남선교회, 직장인여전도회
731-2716
ahavti@naver.com
이신기 목사
교육부, 청소년문화선교부
3여전도회
731-2711
yanus3131@hanmail.net
백석준 목사
청년대학부
한기림찬양대
731-2718
최유진 목사
2교구
아가페봉사부, 청장년2부
새남찬양대
4남선교회, 4여전도회
731-2714
장지훈 목사
6교구
미디어홍보부, 평생대학
하나찬양대
3남선교회, 한나여전도회
731-2708
이진영 목사
10교구
청장년1부, 상담부
새나리찬양대
7남선교회, 2여전도회
731-2715
황효립 목사
새가족교구
새가족부
새온찬양대
2남선교회
731-2713
선교사
정균오 선교사
러시아 선교사
김장원 선교사
태국 선교사
차광찬 선교사
러시아 선교사
교육목사
최효용 목사
아가페봉사부
731-2765
bass43@nate.com
이지영 목사
중등부
731-2729
ljy-cj@hanmail.net
김영광 목사
대학부
731-2723
gloryallelujah@hanmail.net
조경제 목사
청장년부, 전도부
731-2728
kyungss88@naver.com
신경훈 목사
청년2부
731-2726
sportsidol@naver.com
조광민 목사
초등5ㆍ6 Ⅱ부, 무지개학교
젊은부부 두드림
731-2722
jacobs_ladder1123@naver.com
김여름 목사
목양실
731-2705
summer0073@naver.com
전도사
김유리 전도사
아기학교, 유치1부
731-2724
박종훈 전도사
청년1부
731-2721
조경준 전도사
새가족부
731-2733
강희성 전도사
고등부, 교사교육원
731-2734
이동현 전도사
초등1ㆍ2 Ⅰ부, 교육부미디어
731-2725
김드리 전도사
대학부
731-2727
정윤주 전도사
영아1,2부
nskone@naver.com
협력교역자
우수호 목사
학원선교(대광고)
장마가 목사
중국인 예배
보득찌 목사
베트남인 예배
박세훈 목사
영어 예배
교육전도사
이신애 전도사
유치2부
김사랑 전도사
유아2부
sara2522@nate.com
하헌철 전도사
초등3ㆍ4 Ⅰ부
강주헌 전도사
초등5ㆍ6 Ⅰ부
조미옥 전도사
유아1부
서동석 전도사
연합찬양팀
731-2730
최은혜 전도사
청년1부
731-2732
주찬양 전도사
초등3ㆍ4 Ⅱ부
이한별 전도사
초등1ㆍ2 Ⅱ부
역대담임목사
1대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 ~ 1916) 목사
1884 뉴 브런스윅(New Bruns wick)신학교 졸업, 미 장로교회 해외선교사 임명
1885 한국 최초의 복음선교사로 입국
1886 한국 최초의 고아원 설립(경신학교, 연희전문학교로 발전)
1887 한국 최초의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 창립(9월27일)
2대 차재명(1881 ~ 1947) 목사
1911 새문안교회 조사(전도사)로 시무(1916년 까지)
1912 새문안교회 장로 장립
1916 평양신학교 졸업
1920 새문안교회 담임목사 취임
1941 일제 총독부 압력으로 시무 사면(辭免)
3대 김영주(1896 ~ ?) 목사
1932 일본 간사이 학원 신학부 졸업
1933 남대문교회 전도사, 목사 시무
1943 일제가 조직한 조선혁신교단 비판
1944 새문안교회 담임목사 취임
1950 6.25 사변 중에 납북
4대 강신명(1909 ~ 1985) 목사
1938 평양신학교 졸업, 목사안수
1949 영락교회 동사목사 시무
1953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원(명예신학박사)
1955 새문안교회 담임목사 취임
1979 새문안교회 원로목사
5대 김동익(1942 ~ 1998)목사
1970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1971 서울노회에서 목사 안수
1976 미국 벤더빌트 신학대학원(박사)
1981 새문안교회 담임목사 취임
1998 새문안교회 담임목사 시무중 별세
6대 이수영(1946 ~ )목사
1975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1984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교(박사)
장로회 신학대학교 교수
1998 세계 칼빈학회 상임운영위원
2000 새문안교회 담임목사 취임
2017 새문안교회 은퇴목사
7대 이상학(1964 ~ )목사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신학과(M. Div.)
에모리 신학대학원 조직신학과(Th. M.)
버클리 연합신학대학원(GTU) 조직신학과 철학(Ph.D.)
포항제일교회 담임목사
현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과 겸임교수
현 교회교육현장연구소 이사장
2017 새문안교회 담임목사 취임
새문안이 있기까지(~1886)
초기 기독교 접촉과 전래 가능성
한국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온 때가 어제였는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분명한 대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다만 서양인 선교사들이 내한하기 훨씬 이전에 이 땅에 이미 복음의 접촉이 있었음은 현재 여러 측면에서 사실로 인정되고 있다. 그 중 역사적으로 가장 멀리까지 소급되는 설(說)은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른바 '경교(景敎)의 한국 전래설'이다.
경교란 네스토리우스파(Nestorianism) 기독교의 중국 한자음 명칭이다. 주후 431년 에베소에서 열린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단죄되어 로마에서 추방당한 네스토리우스파는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으며 동방으로 선교사들을 파견하였다. 당시 동서무역로였던 비단길을 따라 네스토리우스파 선교사들이 중국에 도착한 것은 635년, 곧 당(唐)나라 정관(貞觀) 9년이었다. 알로펜(Alopen ; 阿羅本)을 단장으로 한 선교단은 당의 수도 장안(長安)에 도착하여 태종(太宗)의 환대를 받았다. 태종은 장안에 네스토리우스파 선교단을 위해 대진사(大秦寺)란 사찰을 지어주고 전속 승려 21명을 배속시켜 주었다. 이 네스토리우스파는 처음 페르시아에서 왔다 해서 페르시아의 한자음을 따 파사교(派斯敎)로 불렀으며 로마제국을 상징하는 '대진'(大秦)을 붙여 대진경교(大秦景敎)라 불리기도 했다. 경교란 '큰 종교'란 뜻이다$004
이후 200여 년 간(AD 600~800)네스토리우스교는 경교라 명칭하에 중국에서 상당하 교세로 발전했었다. 즉 불교이 형식과 거의 동일하게 목탁을 치며 예배를 드렸고 불경(佛經)의 형태를 빈 여러 종류의 한문 교리서를 제작하였다. 아무튼 경교는 조로아스터교, 이슬람교(回敎)와 함께 삼이사(三夷寺)라 하여 서방에서 유입된 종교로 중국 안에서 상당한 교세로 번창하였다.
네스토리우스파가 경교란 이름으로 중국에 정착하여 세력을 키워가던 무렵은 우리나라가 당나라와 밀접한 교류가 있었던 삼국시대 말기에서 통일신라 초기에 이르는 시기(7~8세기)라는 점에 주목할 때 그 전래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과 통일 이후에 정치, 사회, 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당나라와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 해마다 학승(學僧)을 당나라에 보내어 수학하게 하였고 이들이 귀국할 때에는 불경, 불상, 사리 등 불교관계 물품들과 한께 중국에서 생겨난 새로운 학문의 신경향과 사상을 들여왔다. 바로 이러한 점등을 고려할 때 당시 중국 내에서 그 위세를 크게 떨치고 있던 경교가 들어오지 않았겠느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아직도 학문적인 결론을 얻지 못한 상태이지만 1928년 고구려 영토였던 압록강 연변의 만주 안산(鞍山) 지역에서 경교도들의 것으로 보이는 무덤에서 출토된 와제(瓦製) 십자가라든지, 1956년 경주에서 발굴된 십자형 돌과 마리아상 그리고 도에 십자가 등은 경교의 한국 전래 가능성을 시사해 주는 유물들이라 하겠다.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 우리나라의 복음 접촉은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개연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확실하고 분명한 접촉은 임진왜란(1592~1598) 중에 이루어졌다. 이 전쟁은 일본의 무력 침략으로 인해 엄청난 인명(人命)과 재산의 피해를 입은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이 전쟁을 통해 한국인은 기독교에 접하게 되었다.
두 가지 면에서 그 접촉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이 전쟁 중에 최초로 우리나라에 기독교 성직자가 발을 들여 놓았다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에서 한국인들의 기독교 개종이 이루어졌다는 보다 적극적인 의미이다. 이미 일본에는 1549년 예수회 창설자의 한 사람인 프란체스코 사비에르(Francesco Xavier)가 도착하여 선교에 착수, 많은 영주(領主=大名)들을 교인으로 얻고 있었다. 예수회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에 대한 반(反)종교개혁운동으로 일어난 천주교신앙 운동의 결과를 창설된 선교단체이다. 예수회는 우세한 서구의 문물을 일본에 전달하여 호응을 받았으며 '기리시단(切支丹 또는 吉利之丹)이란 이름으로 일본에 뿌리를 내렸다.
임진왜란 중 선봉장으로 한국을 침략한 왜장 고니시(小西行長)가 바로 기리시단 다이묘(大名)였다. 고니시 휘하에 잇던 소오(宗義智), 아리마(有馬信), 오오무라(大村喜前), 마츠우라(松浦鎭信)등 장군들도 기리시단이었다. 고니시는 한국에서 전쟁을 수행하며 휘하 장병들의 신앙지도를 위해 본국(日本)에 있던 예수회 신부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를 불러들였다. 세스페데스는 1593us 12월 27일 응천(能川, Comgai, 진해 부근)에 발을 들여 놓음으로써 한국에 입국한 최초의 성직자가 되었으나, 고니시와 경쟁관계에 있던 불교도 장군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방해로 1959년 6월 본국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2년 뒤인 1597년 3월 다시 한국을 찾은 세스페데스는 1년 6개월 도안 왜군 진중에서 종군사제로 활약하였으나, 일보군의 종군사제였던 만큼 피침략국인 한국에 대한 선교활동은 기대할 수 없었다. 침략군인 일본군의 사기를 양양시켜주기 위한 성사(聖事)에는 성과가 있었으나 침략군인 왜군에 속해 있고 더욱이 이상한 모습을 한 서양인에게 한국인은 누구도 접근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인에 대한 선교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성(城)에서 성으로 용감히 돌아다니면서 자연의 도리에 어긋나는 모든 질서없는 행동과 싸우면서 나쁜 버릇을 바로잡고 성사를 행함으로써 일본인 교우들의 기운을 북돋아 주었을뿐더러 이교도이던 많은 일본 군사에게도 세례를 주었다."고 하지만 한국인에 대해선 전쟁 중 포로가 된 한국인들을 너무 가혹하게 다루지 말라는 충고 정도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결국 세스페데스는 우리나라에 들어온 첫 성직자였다는 사실 외에는 별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일보에 끌려간 한국인 포로들 가운데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이 생겨남으로써 보다 적극적인 의미의 복음 접촉이 이루어졌다. 7년에 걸친 전쟁 중 일본에 잡혀간 한국인은 대략 6~7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들 중에 전후 양국의 협정으로 귀한한 포로는 7천 명 정도밖에 안된다. 결국 6만 명 이상의 한국인은 마카오·인도 방면에 팔려가거나 일본에서 노예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들 중 소수는 재질(才質)을 인정받아 대접을 받으며 안락한 생활을 할 수도 있었고 좋은 후원자를 만나 고생을 면하기도 했다.
주로 기리시단 가정으로 팔려간 포로들이 그같은 혜택을 입을 수 있었다. 고니시의 딸인 마리아 부인이 고니시에게서 선물로 받은 한국인 2명을 신학교에 보내 성직자로 키운 것이 그 예이다. 임진왜란 후 일본에 끌려간 한국인들 가운데 10년 동안 세례받은 자가 7천명에 이르렀으며, 그 중에는 1606년 이탈리아 로마까지 간 안토니오 꼬레아 같은 인물도 포함되어 있었다.$017
이러한 한국인 교인들의 신앙은 1611년 이후 100여 년 간 계속된 일본 기독교 박해시대 중에 순교의 꽃을 피웠다.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이후 정권을 장악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1611us 기독교 금압령을 내려 선교자들을 추방하고 교인들을 체포하였다. 이후 크고 작은 박해가 한 세기 동안 계속되었는데 수많은 순교자가 이 기간 중에 나왔다. 이들 순교자 가운데 뚜렷이 '조선인'으로 표기된 인물은 21명에 이르며 그 중 10명은 1867년 순교 복자(福者)의 칭호를 받기까지 했다. 이들은 대부분 나가사키(長崎) 지방에서 순교하였는데 예수회 전도회장이었던 가이오(Caio), 예수회 수사(修士)였던 권 빈센트(權 Vincent) 등 유력한 위치에 있던 인물들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비록 일본에서 이루어진 일이긴 하지만 첫 한국인 고백 교인이 탄생했고 그 중에 상당수 순교자까지 나왔다는 점에서 임진왜란은 한국 교회사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천주교의 수용과 박해
일본에서 싹트기 시작한 한국인들의 신앙은 그대로 한국에 전달되지 못했으나 17세기 중엽부터 중국을 통해 유입되기 시작했다.
일본 선교에 성공한 예수회는 바로 이어 중국 선교에 착수했다.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선구자였다. 1582년 중국에 도착한 그는 중국 문화를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중국인이 원하는 중국식 방법을 쓰며 상류층에 접근하였다. 서양 문명의 이기(利器) 제작을 통해 중국인들의 호감을 샀던 것이다. 그 결과 1601년에는 명(明)의 수도 북경에 들어가 신종(神宗)으로부터 선교사 체재 허락을 받았다.
리치 이후에 들어온 예수회 선교사들도 같은 선교정책을 갖고 우선은 시계·지도·망원경·분수대 같은 이기들을 제작하는 한편 서구 과학을 내용으로 담은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를 찍어 냈다. 이처럼 기독교에 대한 호의적 반응을 얻어가면서 기독교(천주교) 교리를 담은 책들을 조심스럽게 찍어 내기 시작했다. 1603년 북경에서 간행된 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가 그 대표적인 저술이다. 이들 한역서학서들이야말로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학자층에게 소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이같은 선교사들의 업적, 서양의 이기들과한역서학서들이 한국에 유입됨으로써 기독교 신앙의 전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당시 한국과 중국은 밀접한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다. 명(明) 왕조 이후 들어선 청(淸)국과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을 통해 굴욕적인 관계를 맺은 것이다. 한국에서 파견되는 정기 사절단만도 일 년에 네 차례였고 그 외에도 부정기적인 사절단이 수시로 북경을 방문하였다. 단순한 외교적 업무뿐만 아니라 양국간의 경제 및 문화교류도 이 사절단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1631년 정두원(鄭斗源)이 예수회 신부 로드리퀘즈(J. Rodriques)를 만났으며 병자호란 볼모로 청에 잡혀갔던 소현세자(昭顯世子)가 북경에 머무는 동안 아담 샬(Adam Schall)과 접촉하였다. 아담 샬은 소현세자를 통해 한국 선교를 실현시키려는 꿈을 갖기도 했으나 귀구 직후 소현세자의 급작스런 죽음(1645)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17세기 초부터 꾸준히 유입된 한역서학서들은 한국인 학자들의 연구대상이 되었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천주교 신앙이 자연스럽게 퍼져 나갔다. 초기에 유입되어 읽힌 대표적인 한역서학서들로는 《천주실의》를 비롯하여 《칠극》(七克), 《직방외기》(織方外氣), 《교우론》(交友論), 《진도자증》(眞道自證), 《서학범》(西學凡), 《천학초함》(天學哨艦) 등을 꼽을 수 있다.
한역서학서를 통해 서구의 문명과 함께 천주교라는 새로운 종교의 실체를 접하게 된 한국 유학자들은 크게 세 가지로 입장이 나뉘었다. 첫째는 벽위(闢衛)의 입장에서 적극 배격하는 태도였으니 신후담(愼後聃)·안정복(安鼎福)·이헌경(李獻慶)·유몽인(柳夢寅) 등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둘째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의 입장이라 할 수 있는데 동양의 도, 즉 유교의 기본 교리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서양의 이기(利器)들을 수용하자는 태도이다. 북학파(北學派)로 분류되는 홍대용(洪大容)·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이덕무(李德懋)등을 꼽을 수 있다. 셋째는 서학을 전면 수용하자는 입장인데 중부 근기(近畿) 지방의 남인 계통 유학자로서 이벽(李檗)·권일신(權日身)·이가환(李家煥)·정약전(丁若銓)·정약용(丁若鏞)·정약종(丁若鐘)·이승훈(李承薰)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특히 서학파(西學派)란 칭호를 받고 있었는데 서구의 과학기술뿐 아니라 천주교 신앙과 윤리를 전하고자 노력하였다.
정치적인 색채를 따지자면 남인(南人) 계열에 속하는 이들 서학파 유생들 가운데 보다 적극적으로 천주교 신앙을 실천하려는 움직임이 18세기 중엽 이후 나타나기 시작했다. 1770년경 홍유한(洪儒漢)이 개인적으로 소백산 밑 구들리에 들어가 천주교 신앙을 실천하며 죽기까지 신앙생활을 하였다. 거의 같은 시기에 이벽을 중심으로 한 일단의 학자들이 경기도 광주에 있는 주어사(走魚寺)와 천진암(天眞庵)에서 천주교 교리 연구를 위한 강학회(講學會)를 열었다. 이벽·권철신·권일신·정약종·정약전·이승훈·이가환 등이 참석한 강학회는 연구뿐만 아니라 기도와 묵상, 재계(齋戒)를 지키는 신앙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들은 서학서를 통해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고 그것을 실천하던 중 보다 정확한 신앙의 실체를 알고자 이승훈을 북경에 파견했다.
1783년 가을에 동지사의 일행으로 북경에 들어간 이승훈은 그곳에서 북천주당의 그라몽(Louis de Grammont) 신부에게 1784년 2월에 세례를 받고 그 해 봄에 돌아왔다. 이승훈이 북경에서 보고 온 천주교회의 직제를 모방해 한국인 교인들끼리 주교·사제 등을 맡아 교회 조직을 갖추었으니 소위 모의교회(模擬敎會) 또는 가성직(假聖職)시대의 천주교회가 시작된 것이다. 이로써 한국 천주교회는 선교사들의 인도 없이 한국인들의 구도(求道)행위에 의해 자생적(自生的) 교회로 시작되었다. 이 점은 한국 기독교 사상의 가장 큰 특징의 하나이며, 훙 살펴볼 개신교의 교회 창설도 같은 양상을 띤다.
이승훈·이벽·권일신 등이 중심이 된 자생 천주교회는 중인(中人) 김범우·최인길·최창현·지황 등을 입교시켜 신앙의 저변확대를 꾀하는 한편 충청도·전라도에까지 전도하였다. 1794년 말에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입국하며 교회 조직과 교인들의 신앙지도에 힘쓰기 시작함으로써 그가 입국한 당시 4천 명에 불과했던 교인수는 1800년에 이르러 1만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의 역사는 수난과 순교의 역사였다. 천주교가 수용된 영·정조 시대 이후 대원군 시대에 이르기까지 100여 년 동안 크고 작은 박해사건이 10여차례 있었다. 1785년 봄 이승훈을 비롯한 천주교인들이 서울 명례방 김범우(金範寓)의 집에서 집회를 갖던 중 정부 관리에게 체포되어 김범우 등이 죽음을 당한 을사추조적발(乙巳秋曹摘發)사건을 필두로, 1791년 교인 윤지충(尹持忠)·권상연(權尙然)이 조상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워버린 일로 체포되어 순교한 신해교난(辛亥敎難), 1795년 주문모를 체포하려는 정부에 대항하여 유유일(尹有一)·최인길(崔仁吉)·지황(池璜) 등이 스스로 목숨을 희생시킨 을묘교난(乙卯敎難) 등이 비교적 초기에 당했던 소규모 박해였다. 그 후 1801년 순조의 즉위와 함께 전국적인 범위로 확산된 신유교난(辛酉敎難)으로 천주교는 호된 시련을 겪었다.
주문모 신부 이하 이승훈·정약종·최창현·홍교만·이존창·김건순·강완숙·황사영 등 지도급 인사 100여 명이 순교의 피를 흘렸다. 이 외에 400여 명 교인이 유배됨으로써 천주교 조직은 와해의 위기를 맞이하였다.
이후에도 정부의 천주교에 대한 금압정책은 변하지 않았으며 교회를 재건하려는 천주교이들과 이를 분쇄하려는 정부 당국 사이의 갈등과 마찰은 계속되었다. 1811년과 1825년 천주교인들은 북경 주교와 로마 교황에게 선교사 파송을 요구하는 서한을 발송했고, 이에 1831년 로마 교황에 의해 조선교구가 중국 북경교구에서 독립되어 설정되었다. 이후 파리외방전교회가 한국 선교를 담당하면서 프랑스인 신부들이 입국하여 활약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대응책도 강경하여 1839년에 앵베르(L.M.J. Imbert) 주교 이하 모방(P.P. Maubant), 샤스탕(J.H. Chastan)등 외국인 신부와 정하상·유인길·조신철 등 천주교 지도자들이 순교한 기해교난(己亥敎難)이 일어났다. 이어 1846년에는 최초의 한국인 신부 김대건(金大建)이 순교한 병오교난(丙午敎難)이 일어났고, 1866년 대원군에 의한 병인교난(丙寅敎難)이 일어난 이후 10년에 걸쳐 외국인 신부 9명과 남종삼(南鐘三)·홍봉주(洪鳳周)·장주기(張周基) 등 8,000여 명이 순교하는 한국 천주교 최대의 박해가 일어났다.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1886년 한불조약(韓佛條約)이 체결되면서 정부 차원에서는 종식되었으니 1784년 이승훈이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영세를 받음으로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100여 년 간 한국 천주교는 박해와 수난 속에서 자란 셈이다. 박해 속에 뿌리를 내린 한국 천주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성을 갖고 있다.
첫째, 한국 천주교는 한국인들 스스로에 의한 자생교회로 출발하였다. 선교사들의 선교행위가 전제되지 않은 한국인들의 자발적인 구도행위는 복음에 대한 한국인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것을 개신교의 경우에서도 거듭 확인된다.
둘째, 박해를 받으면서 나타난 두드러진 현상의 하나는 신앙의 대중화이다. 처음 천주교를 믿은 유식·양반 계층은 경기도·중부 지역에 국한되었으나 점차 전라·경상, 멀리는 북부 지역의 산간·농촌 지방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즉 한국 천주교 역사는 상류층에서 하류층으로, 중앙에서 지방으로 확산되는 형태로 진행되었으니, 이 점 으 후의 개신교 경우와 상반된 현상이었다.
셋째, 신앙의 대중화에 따라 한글 보급이 확대됨은 물론 새로운 서민문화가 생겨났다는 점이다. 즉 일반 서민의 글인 한글을 이용한 교리서적을 발간해 냄으로써 한글문화를 창출해 냈고 서민들의 노래곡조를 딴 4·4조의 천주가사(天主歌辭)는 근대 가사문학의 한 흐름을 계승한 거이기도 하다. 종래의 양반·유식 계층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유교문화의 한계를 탈피한 새로운 형태의 서민문화 형성이 천주교 신앙운동으로 가능하게 된 셈이다.
이같은 천주교회의 한국 선교 역사는 천주교의 역사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으니, 19세기 초부터 전개되기 시작한 개신교의 한국 선교와 직간접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문을 연 새문안(1887~1903)
정동에 정착
언더우드 목사가 서울에 들어와 처음 정착한 곳은 정동(貞洞)이었다. 정동이야말로 한국 개신교 선교의 뿌리를 내린 처음 밭이었다. 바로 이곳에서 새문안교회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정동은 조선시대 황화방(皇華坊)에 속해 있었다. 조선왕조를 건설한 태조(太祖)는 1934년에 수도를 개성에서 한성으로 옮겼다. 그리고 한성을 5부 52방(坊)으로 구획하였는데 지금의 정동 지역은 서부(西部) 취현방(驟賢坊)에 속해 있었다. 1396년 태조의 제2왕비인 신덕왕후(神德王后)가 별세하자 태조는 그를 경복궁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성안 취현방 언덕에 장시지냈다. 그리고 능 이름을 정릉(貞陵)이라 하였다. 그러나 태조 말년에 왕자의 난이 일어나 당시 세자로 있던 신덕왕후 소생의 방석(芳碩)이 살해되고 신의왕후(神懿王后) 소생인 방원(芳遠)이 정권을 잡고 1400년에 태종(太宗)으로 즉위하였다. 1408년에 태조가 별세하자 태종은 신덕왕후의 능을 동북쪽 성밖 북한산 기슭에 있는 사을한리(沙乙閑里-오늘의 정릉동)로 옮기게 됨으로써 취현방 능터는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지역 이름만큼은 그대로 정릉동(貞陵洞)으로 불렸고 이것이 줄어 오늘의 정동이 된 것이다. 취현방은 세종 때에 이르러 황화방에 흡수되었고 영조 시대 이후 서부 황화방 소정동계(小貞洞契)로 불리다가 고종 갑오경장(1894) 때 행정지역이 재편성되면서 서서(西署) 황화방과 소정동(小貞洞), 대정동(大貞洞)으로 나뉘어 불리게 되었으며 한일합방 후인 1914년에 소정동, 대정동을 통합, 오늘의 정동으로 행정 명칭이 확정되었던 것이다.
정릉동은 정릉이 옮겨진 후 별다른 역사적 기록을 남기지 못하다가 1593년 선조(宣祖)가 이곳에 행궁을 조성하고 '정릉동 행궁'이라 이름을 붙임으로써 왕조 역사속에 다시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다. 이 정릉동 행궁은 광해군 때(1611) 와서'경운궁'(慶運宮)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07년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純宗)의 즉위녀에 오늘의 덕수궁(德壽宮)으로 다시 이름이 바뀌었다. 이 궁은 고종(高宗)때 크게 중건하였고 아관파천(1896~1897) 이후 고종 황제가 이곳으로 이어(移御)하여 별세하기까지 기거한 구한말 정치적 소요와 비운을 간직한 궁이었다.
뿐만 아니라 1882년 한미수호조약 체결 후 1884년 초대 주한공사로 푸트(L.H. Foote)가 부임하면서 당시 정동에 있던 한림(翰林) 민계호(閔啓鎬)의 저택을 구입, 공사관으로 사용하게 되고 뒤이어 영국공사관과 러시아공사관도 덕수궁 주변에 자리잡게 되자 외교적으로 중심지가 되었다.
언더우드 목사의 첫 번째 집도 이곳 정동에 마련되었다. 미국공사관 공의(公醫) 자격으로 그보다 6개월 먼저 와 있던 알렌이 그 집을 마련해 주었다. 언더우드는 1885년 4월 26일자 편지에서 그 사실을 밝히고 있다.
알렌 박사가 사들인 집은 아주 좋은 위치에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미국공사관 도로 옆에 있으며 같은 언덕에 영국공사관도 있습니다. 이 집이(공사관을 제외하고) 외국인이 소유하고 있는 유일한 재산이었던 관계로 최근의 소동중에도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뭴렌도르프 소유의 집도 있었습니다. 그는 순시병을 두고 집을 지켰으나 많은 피해를 입었고 건물 한 채는 불에 타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서교부 건물만은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그 집은 강노(姜魯) 정승 소유의 집으로 널리 알려지고 있으며 ㄴ자형 토지에 ㄷ자형 사랑채를 포함 세 채의 집 건물이 들어 서 있었다. 그리고 언더우드가 직접 작성한 지도에서 보듯 세 채의 건물 중 ㄷ자형 건물(언더우드 사저) 왼편에 독립된 一자형 건물을 교회로 사용하였으니 이것이 새문안교회의 첫 예배당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곳은 정동 13번지 일대로 후에 감리교회 여선교부에서 구입, 여선교사 기숙사로 사용되면서 '그레이 하우스'(Gray House)로 불렸으며 지금은 서울 예원학교 교정에 포함되어 있다. 바로 이곳이 정동 13번지로서 새문안교회의 탄생지였던 것이다.
교육을 통한 선교 모색
1884년 9월에 외부(外部)를 통해 미국인 선교사 매클레이에게 전달된 고종의 선교 윤허는 외국인들의 국내 활동 범위를 의료(병원)과 교육(학교)활동으로 국한시켰다. 이에 따라 미국감리교에서 의료선교사로 스크랜턴을, 교육선교사로 아펜젤러를 선발해 보냈듯이 장로교에서 의료선교사로 알렌을 선정하여 미리 파송했고 뒤이어 교육선교사로 언더우드를 파송했던 것이다. 따라서 언더우드 목사의 초기 활동은 교육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알렌이 설립한 제중원(濟衆院)에 나가 그를 돕는 것으로 한국에서의 첫 일을 시작했다.
원(제중원-필자주)에는 새 의사의 도움이 필요한 형편입니다. 알렌 박사는 아주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매일 아침 병원에 나가 하루 4~6명씩 수술을 해야 합니다. 그는 다른 의사의 도움과 조언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매일 오후에 병원에 나가 돕고 있습니다. 매일 평균 70명씩 새 환자들이 찾아옵니다.
내한하기 전 본국에서 1년 동안 의학을 공부해 둔 것이 이때 언더우드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제중원 교사'가 그의 공식적인 직함이었다. 그는 병원에 나가 알렌을 도우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인과 접촉할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먼저 한국인 어학 선생을 채용해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의 첫 어학 선생은 천주교인었는데 전에 천주교 신부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친 경험이 있을 뿐 아니라 신부들과 함께 한불사전 편찬에도 참여한 바 있는 유능한 어학 선생이었다. 언더우드는 '이 나라에서 제일 훌륭한 선생'을 얻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그를 통해 한국 말과 한국 문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7월부터는 그에게 영어를 배우려고 찾아오는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그는 학교 설립을 통한 교육사업에 대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아이들 몇 명이 찾아옵니다. 저는 그들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학교로 사용할 수 있는 건물만 있다면 지금 바로 시작하더라도 상당수 학생들을 불러 모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직은 내 존재가 그다지 큰 호응을 불러 일으키지 못하고 있지만 그 중에 열두 명 정도 사내아이들을 뽑아 가르친다면 제가 어학을 배우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인재들로 키우는 동시에 한국어를 직접 공부하는 데 소비되는 시간도 보충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병원에 출입하면서 정기적으로 그를 찾아와 영어를 배우려는 서너 명의 학생들이 생겼고 그는 이 학생들을 모아 매주일 주일학교 형태로 운영하였다. 1886년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인 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오늘날의 학교 형태는 아니지만 우선 거리의 고아들을 데려다 먹이고 입혀주며 가르치는 고아학교의 설립을 구상하고 이 뜻을 미국공사 폴크(G.C. Foulk)를 통해 한국 정부의 외부(外部)에 전하자, 그 해 2월에 외부 김윤식(金允植)의 이름으로 학교 설립 허가를 통보해 왔다. 김윤식이 이때 미국공사 앞으로 보낸 공문 내용을 보면 당시 한국 정부는 적어도 종교활동이 아닌 고아나 극빈아동을 위한 사회사업에 대해서는 매우 협조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안련(安連, Allen), 혜란(惠蘭, Heron), 원덕우(元德愚, Underwood) 3인(三人)이 아국정부(我國政府)와 백성을 위하여 부모 없는 아이와 가사(家舍) 없는 아이를 구제하라 하고 집을 정하여 먹여 살리고 교장을 두어 한문과 국문과 공예지업(工藝之業)을 가르쳐 나라에 쓰이게 하신다 하오니 이는 세계상의 으뜸가는 선정(善政)이라. 우리 정부에서 생각지 못한 일을 이처럼 실시하랴 하시니 누가 듣고 좋아하지 아니하겠소. 본(本) 독판(督瓣)도 불승감사(不勝感謝)하오며 이 말씀을 우리 대군주(大君主)께와 정부에 여쭙고 인민의에게도 일러서 귀국의사의 후의를 칭송하게삽고 무슨 조역할 일이 있든지 주선할 일이 있거든, 서로 의논대로 하겠습니다.
당시 정부에서 미처 돌볼 생각도 못하고 있던 고아들과 극빈아동을 위해 외국인들이 자진하여 고아원을 개설, 그들에게 먹이고 입히며 교육까지 시키겠다는 의도를 높이 치하했던 것이다. 이에 크게 힘을 얻은 언더우드 목사는 즉시 집에서 걸어 몇 분 안 되는 길 건너편의 한옥 한 채를 구입하여 아쉬운 대로 교실로 쓸 수 있도록 개조하였다. 이 자리는 지금 이화여자고등학교가 있는 곳으로 한국 정부가 주선해 준 결과 쉽게 부지와 건물을 얻을 수 있었다. 다음은 학생을 모집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학생을 모집하는 일은 그렇게 쉽지가 않았다. 선교사들이 잘 먹여 살찌워 잡아먹는다느니, 미국으로 데려가 노예로 판다느니 심지어는 남색(男色)을 즐기기 위하여 사내아이들을 데려가려고 한다는 등 좋지 못한 소문이 돌고 있던 때라 학생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고아나 길가에 버려진 걸인들 중에서 학생을 구해야만 했다. 선교사들이 설립한 초기 학교가 하나같이 고아 내지 가난한 학생들로 시작되었던 연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언더우드 목사는 어학선생이 추천한 천주교인 한 명을 특별히 고용해 서울시내 고아나 걸인 형편을 조사하게 했다. 그 천주교인은 나흘 만에 당장 구호가 필요한 고아 한 명을 데리고 왔다. 이 고아 한 명으로 고아원이 시작되었으니 정식으로 시작된 날짜는 1886년 5월 11일이었다. 감리교의 아펜젤러도 그날 개원예배에 함께 참여했는데 언더우드 목사는 고아원 설립 1년 후 본국에 보낸 편지에서 고아원 설립 당시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약 1년 전 고아원을 개설했습니다 1886년 5월 11일에 한 아이를 데리고 그 사업을 시작했는데, 당시 한 명만의 입학 허가를 받아 낸 상태고 다른 세 명은 입학 여부를 검토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날 저녁 이곳에 있는 선교사들이 모여 기도회를 갖고, 그 사업을 하나님게서 축복하고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일들을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인지를 가르쳐 주시길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우리 사택과 바로 붙어 있는 꽤 넓은 한옥 한 채를 사서 약간 수리했는데 집 값은 아주 적당했고 수리비까지 포함해서 약 500달러 정도가 소요되었습니다.
고아원은 시작한 지 2개월도 못되어 원생이 10명으로 늘었다. 고아들을 데려다 재우고 먹이고 입혀주는 등 정성껏 돌봐주며 가르치자 점차 한국인들의 오해도 풀렸고 자연히 교육활동에 자신감도 생겼다. 이 고아원은 뒤에서 상술하겠지만 언더우드의 뒤를 이어 후에 마펫·밀러 등이 맡아 보면서 보다 학교의 형태를 갖춘 영신학교(永信學校)로 발전했으며 그 후 게일에 이르러 오늘의 경신(儆新)중·고등학교의 모습을 갖기에 이른다. 이같은 교육사업을 통해 언더우드는 한국 정부와 일반대중의 인정을 받게 되었고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본래의 목적지인 복음전도를 점차 펼쳐 나갔던 것이다.
첫 세례교인 탄생
언더우드 목사가 한국에 온 후 처음 2년간은 위에서 보듯 교육사업과 한국어 공부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의 한국어 공부는 어학 선생과 함께 천주교 신부들이 앞서 펴낸《한불자전》을 대본으로 하여《한영자전》을 만드는 일과 감리교의 아펜젤러와 함께 이수정이 번역한 <신약마가복음서언해>를 대본으로 하여 수정본 <마가의 전한 복음서언해>를 번역하는 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남는 시간은 제중원과 고아원에 나가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종교집회에 대해서는 아직도 한국 정부가 분명히 반대 의사를 표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개적인 집회는 불가능했다. 따라서 치외법권을 가진 외국인 선교사들도 공사관 내에서만 예배가 가능하였다. 선교사들의 첫 주일집회는 언더우드 사택에서 1885년 7월부터 시작되었다. 알렌이 본국에 보낸 한 서한에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현재 매주일 저녁마다 언더우드 씨 집에서 주간예배(weekly service)를 드리고 있습니다. 6주 전부터 예배를 드렸는데 우리 모두 예배를 인도하는 데 신중을 기하고 있습니다. 감리교 형제들도 기꺼이 참석하고 있으며 이 일이 우리 모두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편지를 쓴 것이 1885년 8월 12일이므로 6주를 거슬러 올라가면 언더우드 사택에서 장·감 선교사들이 모여 주일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날은 1885년 7월 5일이 된다. 이 집회는 선교사들과 외국 국적을 가진 기독교인들만이 참석하는 제한적인 종교집회였다. 1885년 말이 되면 장로교 선교사로 언더우드, 알렌 외에 의료선교사 헤론(J.W. Heron) 부부가 참석했고 감리교에서 아펜젤러 부부와 스크랜턴 부부 및 그의 모친 외에 미국공사관 직원들도 참여하였다. 이 모임은 해가 바뀌면서 더욱 그 규모가 확대되기 시작하여 외국 선교사들의 기도회에 한국인이 참여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이곳에서 기도주간을 가졌습니다. 하루 저녁에는 한국인 몇 명이 참석했습니다. 우리는 다음 번 기도주간에는 더 많은 한국인들이 예배에 참석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선교사들 위주의 예배집회에 한국인들이 조심스럽게 참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해 봄에 고아원을 개설함으로써 선교활동이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될 수 있었고 마침내 1886년 7월 18일 주일에 한국에서 첫 한국인 세례가 베풀어졌다. 노도사(魯道士)란 별명을 가진 노춘경(魯春京)이 그날 세례를 받은 것이다. 서울 근교에 살고 있던 그는 처음에는 기독교를 반대했으나, 기독교에 관한 한문 서적을 읽으면서 그 태도에 변화가 왔다. 1885년 봄 어느날 알렌의 집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책상 위에 있는 한문으로 된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발견하고 그것을 집에 가져가 밤을 새워 읽은 후 그의 태도에 큰 변화가 온 것이다. 그 이튿날 아침에 그는 성경을 손에 들고 언더우드 목사를 찾았고 이때 언더우드 목사로부터 또 다른 한문으로 된 교리·전도문서 등을 받아 읽고 난 후부터 기독교인이 될 것을 결심했던 것이다. 그후 노춘경은 선교사들의 영어 예배집회에도 여러 차례 참석하는 등 5~6개월의 탐색 끝에 마침내 결단을 하고 자원하여 엄중한 문답을 거친 후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받았다. 언더우드를 비롯한 선교사들이 이 "첫 열매"에 크게 감격하였음은 물론이었다. 그것도 선교사들이 나가 전도해서 얻은 열매가 아니라 스스로 찾아와 진리를 탐구한 후 자진해서 세례를 받은 것이므로 선교사들이 느낀 감격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세례받은 노춘경으로부터 자기처럼 세례를 받고 싶어하는 사람이 한두 명 더 있다는 말을 듣고 또 한번 감격했다. 그러나 아직도 한국 정부의 입장은 완고하였고 선교사 중에도 알렌 같은 이는 본격적인 복음선교의 위험성을 경고했지만 복음전도의 열기는 선교사들 사이에 점차 고조되어 갔으니, 그만큼 새문안교회 창설의 분위기도 무르익어 갔던 것이다.
뿌리내려 발전해 간 새문안(1904~1915)
첫 장로 송순명의 장립과 당회의 조직
새문안교회에 한국인 장로가 참여한 당회가 성립된 것은 1904년이다. 우리 교회 소속의 영신학교 접장이자, 조사 출신인 송순명(宋淳明)이 1904년 10월 2일 새문안 교회의 사실상 첫 장로로 장립된 것이다. 교회가 창립된 지 17년만의 일이다. 한국에서 첫 번째 세워진 교회, 그것도 조직교회로서 첫 문을 연 새문안의 역사성을 감안할 때 교회 창립 17년 만에 비로소 한 분의 장로를 장립했다는 것은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다. 새문안교회의 장로 장립이 이렇게 늦어진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새문안 교회 창립과 동시에 두 분의 장로를 선임한 바 있다. 그러나 앞서 본 바와 같이 이들 두 장로는 모두 징계를 받았고 그 중 한 사람은 출교까지 당하는 불행한 일이 있었다. 이같은 불행한 사태의 원인이 선교 초기 흔히 있었던 외국 선교사와 한국 교인 사이의 불화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당사자 두 분의 도덕성 문제에서 기인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이 일 이후로 새문안교회는 장로를 장립하는 일에 매우 신중을 기하게 되었고, 따라서 자연히 장로 장립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한국 '모교회'의 사실상 첫 장로로 피택된다는 것은 대단한 명예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명예로운 자리에 첫 세움을 받은 송순명은 장로로 장립된 직후부터 새문안을 대표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즉 장로 장립 1년 만인 1905년 9월에 개최된 장로회 공의회 경성소회(京城小會)에서 "주일연보와 보조금 규모의 문제에 대하여"라는 연설을 했는가 하면 다음해에 개최된 공의회에서도 김익두(金益斗) 장로와 나란히 "교회의 바람직한 아동교육 방향에 대해서"라는 연설과 "목사되게 부르심을 입은 자가 부르심을 어떻게 알 방침인가"라는 문제에 대해서 조리있는 연설을 하여 참석자 모두에게 큰 감명을 주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그는 해박한 그의 성경 지식을 이용하여 성경 내용에 나오는 비유 말씀의 의미를<그리스도신문>에 기고하기도 하였다. "성한 사람은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사람이라야 쓰나니라"는 비유의 말씀을 "법을 사랑하는 상등인과 법을 두려워 하는 중등인 그리고 법을 미워하는 하등인"으로 구분하고 이 비유의 말씀은 결국 "참 예수계서 세상에 오신 것은 의인을 부르려 오심이 아니오 죄인을 불러 구하시랴 하심이니 이럼으로 예수는 의인에게 상관없고 죄인에게 긴요하신 구주가 되심을 깊히 믿을지니라"는 요지의 글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송순명 장로는 학식이 높거나 이름난 분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 한국교회가 매우 중요시했던 교회교육 분야에 대해 전문가적인 발언을 할 만한 위치에 있었으며, 또한 한국인 목사가 탄생하기 직전에 "목사되게 부르심을 입은" 예비목사들을 향해 권면의 연설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던 분이다. 바로 이러한 분을 새문안은 초대 장로로 옹립했던 것이다.
지금은 송 장로의 노년 모습을 담은 사진 한 장이 남아 있을 뿐 후손도, 그를 기억하는 교인도 찾기 어려운 처지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새문안의 첫 장로인 송순명 장로의 이력에 대해 더욱 알고 싶은 것이다. 과연 송순명 장로는 어떤 분이었을까? 그리고 어떠한 경로와 이력으로 새문안의 초대 장로에 선임될 수 있었던가?
그는 고아 출신으로 1887년경부터 언더우드 목사에 의해 설립된 고아학교에서 자랐다고 전해지고 있을 뿐 그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확실치 않다. 그러나 여러 자료를 종합해 볼 때 그는 우리나라가 개항되기 2년 전인 1874년 서울의 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조실부모한 후 고아로 떠돌다가 그의 나이 열두 살 되던 1887년경에 언더우드 목사에 의해 고아학교에 인도되어 그곳에서 자란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니까 그는 새문안이 창립되던 그 해에 새문안과 인연을 맺은 후 전 생애를 새문안과 함께한 새문안의 '뿌리' 하겠다. 그러나 단지 오래된 교인이라는 점만으로 장로에 세움받은 것은 아니다. 새문안의 처음 교인이었다는 점 외에도 다음과 같은 남다른 특징과 복음전도를 위한 헌신적인 활동이 있었던 것이다.
우선 그는 성경에 밝았다. 당시 교인들은 그를 가리켜 "송신약"(宋新約)이라고 지칭했다고 하는데, 신약전서 전체를 암송할 정도로 평소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여 교인들에게 늘 귀감이 되었다고 한다. 다음으로 그는 초기 한국 복음전도에 결정적으로 공헌한 대표적 권서(勸書, 賣書人)의 한 사람이다. 새문안을 창립하는 데 산파역을 했던 서상륜이 권서인으로 활동한 것과 같이 송순명 또한 당시 이름난 권서의 한 사람이었다. 특히 그는 언더우드 목사의 도매서(都賣書)로 그의 산하에 여러 명의 일반 매서인을 두고 전국을 순회하며 성경과 전도문서를 보급, 판매하는 등 초기 복음전파사업에 큰 공헌을 남겼던 것이다.
또한 그가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를 개심시킨 일은 빼놓을 수 없다. 1895년 청일전쟁이 평양에서 터지자 안창호는 전화(戰禍)를 피하여 서울에 왔다가 그만 집에 돌아갈 노자가 떨어졌다. 그러던 어느날 정동 거리를 지나던 중 외국인 선교사(F.S. Miller, 閔老雅-필자주)의 "누구든지 배우고 싶은 사람은 우리 학교로 오시오. 먹고 자고 공부를 거저 할 수 있오"라는 서툰 한국 말 소리를 듣고 "어찌 공맹지도(孔孟之道)를 숭상하는 조선인으로서 오랑캐들이 세운 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가? 그러나 돈이 떨어졌으니 우선 들어가서 겉으로 예수를 믿는 척하고 속으로는 공맹의 도를 그대로 지키면 될 것이다."라며 찾아간 곳이 바로 새문안교회의 영신학당(永信學堂, 일명 救世學堂, 元杜尤學堂, 閔老雅學堂)이었다. 말하자면 그가 영신학교를 찾은 것은 예수를 믿을 생각에서가 아니라 당장 호구지책을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안창호는 송순명을 만나 그의 끈질긴 전도에 설복되어 마침내 예수를 믿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 후 안창호는 송순명과 함께 영신학교의 접장(선생)이 되어 한달에 1원 하는 월급을 받으며 3년간이나 활동하였다. 현재 송순명 장로를 기억하는 원로 교인들은 1950년대 말 이미 80세 고령의 연로했던 송 장로만을 기억하고 있어 그가 젊은 시절에 이와 같이 적극적으로 전도활동을 했던 면모들이 그간 가리워졌던 것으로 이해된다.
아무튼 송 장로는 새문안의 초대 장로로서 교회가 설립되던 1887년부터 1957년 12월 3일 소천(召天)하기까지 만 70년간을 새문안을 섬기며 봉사하신 새문안의 원로이자 뿌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새문안은 그의 장례에 따른 일체의 경비를 지출하여 그 해 12월 5일 새문안 뜰에서 교회장(敎會葬)으로 모셔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치하였다. 당시에는 아직 새문안동산이 없었던 것도 한 이유였던 같다. 지금도 그의 후손을 찾을 길이 없으니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초기 당회의 활동과 엄한 처리
실제 당회는 송순명의 장로 장립 이전부터 이미 운영되고 있었다. 앞 장에서 살펴 보았듯 언더우드 목사를 비롯해 기포드 선교사(1890~1891), 마펫 목사(1891~1893) 그 밖에 게일, 빈튼, 밀러, 헐버트 선교사 등이 언더우드 목사가 교회를 비울 때마다 임시 당회장으로서 학습 세례식과 교회 회무와 강단 일을 돌아가며 맡아 보았다. 그러나 한국인 장로가 참여한 오늘날의 당회와 같은 정상적인 당회가 출범한 것은 역시 송순명이 장로로 장립된 1904년 이후이다. 또한 이때부터 당회와 세례문답식등에 한국인 조사, 집사들이 방청인 혹은 집례 보조인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현재 새문안 최고(最古)의 기록으로 <1907년 당회록>일 일부와 1907년 이후 세례문답을 받았던 교인들의 명부인 <새문안교우문답책>이 남아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주로 이 자료를 토대로 초기 당회가 당시 일반 고인들을 상대로 어떠한 일을 했으며 그를 통해 비쳐본 초기 새문안 당회의 성격, 그리고 일반 교인들의 신앙형태와 전반적인 교회 분위기가 어떠하였는가 하는 점 등을 알아보기로 한다.
초기 당회의 중요한 일은 역시 교인들에게 세례를 베풀기 위해 문답하는 일이었다. 오늘에 비해 당시 세례문답은 대단히 엄격하게 진행되었는데 우선 당시 세례문답식이 어떠한 절차를 거쳐서 진행되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아래의 1907년 11월29일에서 같은 해 12월 1일 사이의 세례문답식의 관한 당회록은 당신 세례문답식을 주관한 인물들과 절차, 그리고 이 예식이 얼마나 엄격하게 진행되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경기도 한성골 새문안동네 당회가 문답하러 모이는데 그 회원들은 오월번 목사와 송순명 자로이오, 참석한 교우는 리여한 조사, 최덕준 조사와 리락선 집사라. 오 목사가 기도하고 개회한 후에 전회록 낭독하여 가결하고 문답함이 여좌하니라. (중략)일이 다 된 후 오월번 목사 기도하고 폐회하다. 주강생일 천구백칠년 12월 0일. 회장 오월번 서기 송순명 장로
우선 위의 당회록을 읽으면서 우리는 별로 생경한 느낌을 받지 않는다. 이는 바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의 모든 기록물이 위와 같은 문체와 문장 형식으로 서술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세례문답식은 1907년 11월 29일에서 1908년 11월27일까지 꼭 1년 동안에 다섯 번의 문답식이 있었는데 그 내용을 발췌 요약해 본 것이 아래의 <표 3-1>아다.
우리는 위의 사실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당시 세례문답식은 계절층을 중심으로 1년에 4회씩 실시되었다는 점이다. 위의 내용에서는 1년 사이에 세례문답식이 5회 행해진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 중 4회의 내용에서는 1년 사이에 세례문답식이 5회 행해진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 중 4회가 1908년에 진행된 점과 실시 시기가 3, 5,월과 10, 11월이었던 점으로 보아 봄과 가을철로 나누어 연 4회씩 세례문답식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 점으로 보아 1907년에도 11월 29일에 앞서 3회의 문답식이 있었을 것으로 상정된다.
둘째, 이상의 5회에 걸친 세례문답식을 각기 다른 사람이 주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웰번(A.G. Wellbon : 吳越番) 선교사와 송순명 장로가 3회, 밀러(E.H. Miller : 密義斗) 선교사와 송순명 장로가 1회, 그리고 언더우드 목사 역시 단지 1회만을 주관한 것으로 되어 있다. 세례문답식은 당시 교회의 가장 중요한 행사였다. 이같은 중요한 행사가 원 목사에 의해 주관되지 않고 임시로 교회를 맡고 있던 선교사들에 의해 주재되었다는 점 또한 초창기 한국교회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체로 외국 선교사들이 입국하면 일종의 훈련과정으로 기성교회에 얼마간 머물게 하여 이와 같은 일들을 맡아 보도록 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위의 경우 언더우드 목사가 1회만을 주재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달랐다. 그는 앞서 4회의 문답식이 진행되는 동안에 한국에 있지 않았다. 1906년 7월부터 1908년 말까지 그는 세 번째 안식년을 맞이하여 상해-런던-프랑스를 거쳐 미국에 돌아가 한국 선교를 위한 모금활동과 그의 저서 (ital)The Call of Korea의 간행 등으로 한국을 떠나 있었다.
셋째, 위의 내용을 통해 당시 세례문답식을 주재한 당회원 이외의 참석자의 이름과 그들의 직분 등을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이여한 조사를 비롯해 최덕준, 도원칠 3인의 조사와 이낙선, 이승원, 김규식, 이기용, 최용호, 윤상덕 6인의 집사 이름이 구체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당시'조사'(助事, 助師)라 함은 오늘날의 전도사에 해당하는 직분으로 당시 외국 선교사들의 전도, 치리, 지방순회 전도, 심방 등을 돕는 준교역자에 해당된다. 한편 이들이 맡은 일을 살펴보면 조사 3인 가운데 이여한, 최덕준 조사가 '한성골 새문안교회'일을 맡고 있는 데 반해, 도원칠 조사는 '시흥골 영등포동네 당회'에서의 세례문답식에 참여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도 조사는 당시 새문안의 지교회였던 영등포 지교회에 파송되어 그곳을 책임 맡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위의 내용에서 당시 당회에는 집사들도 참석, 기도순서를 맡는 등 준당회원의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넷째, 세례문답식이 장소를 옮겨가면서 행해졌다는 점이다. 앞의 <표 3-1>에서 보듯 1, 3, 4회는 '한성골 새문안당회'에서였으나, 2회는 '영등포동내 당회'에서, 그리고 5회는 '남문밧 리문동내 원 목사댁'에서 시행된 것으로 되어 있다. 오늘날도 당회의 경우는 사정에 따라 교회 밖에서 모이기도 하나 세례문답식이 목사 개인 사택에서 행해지는 예는 좀처럼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영등포동내 당회'의 경우는 이날 세례문답에 응했던 12명 모두가 영등포에 살고 있던 점으로 보아 '새문안당회'가 지교회로 개척중이던 영등포 지교회로 자리를 옮겨 문답식을 가졌던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전회록이 없는 고로 낭독치 못함'이란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영등포동내당회'는 이때 처음으로 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섯째, 세례문답의 절차와 판별이 대단히 엄격했다는 점이다. 우선 세례문답에 응하는 사람을 원입인, 세례인, '고대인'(대기인)으로 분류, 신앙의 정도에 따라 엄격하게 판별하고 있다. <표 3-1>에서 보듯 1회의 경우 56명이 문답에 응하고 있는데 이중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허락된 사람은 8명(14%)에 불과하다. 나머지 사람들은 원입인(36명)과 고대인(12명)으로 다음 문답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2회, 영등포 지교회의 경우는 12명 중 한 사람에게도 세례가 허락되지 않았다. 이 경우는 12명 전원이 초심자로서 문답에 처음 응했기 때문에 원입인에 그쳤던 것이다. 5회에 걸쳐 256명이 세례문답에 응하고 있으나 이 중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38%에 해당하는 98명에 불과하다. 바로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당시 세례문답이 얼마나 엄격하게 진행되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아래의 <표 3-2>에서 보듯 첫문답에서는 거의 세례를 받을 수 없었으며 재문답, 삼문답을 거쳐 비로소 세례가 허락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이러한 엄격성을 잘 시사해 주고 있다.
그러면 무엇을 근거로 이와 같은 판별을 했던 것일까? 우선 세례교인으로 판별된 사람의 경우를 보면 그 이유를 "① 아는 것은 부족하나 행위 있소 ② 잘 믿고 행위 있소 ③ 잘 믿고 성경공부 잘 하는 고로 ④ 주일 잘 지키고 믿은 좋음 ⑤ 성찬세례 뜻 잘 모르나 행위 있소"등을 들고 있다. 여기서 보듯 당시 세례교인이 되려면 '믿음과 행위'가 있어야 했고 그 징표의 하나가 '성수주일'(聖守主日)을 엄수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원입인과 고대인은 이에 미치지 못하는 초신자들이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원입인(입교인)에도 배제된 '고대인'(대기인)중에는 "아직 회개하지 못하고 우상을 거절 아니함", "아직 회개치 아니하고 술장사하오"등을 "별도히 기록할 것"이라는 비고난에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초기 새문안은 교회에 출석한다는 이유만으로 세례를 주지는 않았다. 세례교인이 되려는 사람은 적어도 여러 절차를 거쳐 믿는 자로서 신앙적 자격을 갖춘 후에야 비로소 세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당회가 정식으로 구성되면서 앞서와는 달리 교인들에 대한 자격과 규제가 세례문답식을 통해 보다 엄격하게 틀이 잡혀갔던 것이다. 1900년대 이전까지 새문안을 비롯한 한국교회는 주로 교인을 모으기에 주력하였으나 이때부터 몰려오는 교인들을 선별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앞 장에서 살펴보았듯이 1895년을 전후하여 서울 장안 내에는 물론 서울과 인접한 경기도 일원에 10여 개의 지교회와 예배처를 세우는 등 전도활동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1900년대에 접어들면서 교회가 감당할 수없을 만큼 교인수가 늘어났다. 그러나 한편 이에 따른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부작용이란 다름아닌 교인들의 도덕성 문제였다. '누구든지 오시오. 우리 예배당에 오는 사람에게는 음식도 주고 옷도 주고 재워도 주며 신학문도 거저 가르쳐 주오. 누구든지 오시오'라는 선교 초기 흔히 있었던 전도방법의 결과 '누구든지' 교회를 찾기만 하면 쉽게'교인'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결과 교인들 가운데 도덕적으로 상당한 문제를 안고 있는'교인'들이 자연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당회는 바로 이러한 '교인'들을 엄하게 또 한편으로는 깊은 사랑으로 권징하는 일에 한동안 길을 기울였다.
새문안 당회는 이러한 노력을 1910년을 전후한 시기에 들어 집중적으로 기울이고 있다. 일종의 '교회 정화'혹은 '교인 윤리, 도덕성 회복운동'이라 불릴 많ㄴ 이같은 조치가 왜 이 시기에 들어 추진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위에서 언급한 이유 이외에도 여러 저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점은 두에서 다시 따져 보기로 하고 우선 당시 당회가 일반 교인들의 도덕성 회복을 위해 어떤 일들을 했으며, 또 무엇이 문제가 되었고, 그 절차는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등을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1910년부터 1914년 사이에 당회의 주요 안건은 거의 교인들의 치리와 권징에 관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부분의 주요 내용을 간추려 보면 ①불륜건 ②음주건 ③성수주일 위배건 ④축첩건 ⑤민며느리제건 ⑥불합한 혼사건 ⑦교회학교 남녀학생간의 편지건 ⑧헌병소에 체포된 교인의 책벌건 등 매우 다양하다,. 먼저 불륜건에 관한 대표적인 한 사례를 당시 당회록에서 그대로 옮겨보기로 한다.
교우 중 류홍준이 남편을 버리고 다니는 여자를 자기 집에 투숙시키며 십여일 동안 한방에서 동침한 일로 십여일 전에 교우 몇 사람이서 목사와 같이 모여 그죄를 범한 일이 있느냐 물으니 같이 잔 일이 있기는 하나 죄범한 일은 없다 하였다고 하다. 류홍준을(당회에-필자주)불러 물으니 그 사실을 말함이 잔과 같으나 지금은 그 여자가 자기집에서 나갔다 했다.
이러한 교인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한마디로 당회의 입장은 단호했다. "당회로 결정하기를 한 이불에서 잔 가운데 죄범함이 없다 할 수 없으니 육삭 동안 처벌하기로 작정"하는 단호한 결정을 내리고 있다. 불륜문제에 대한 당회의 처리가 매우 엄격하였음은 당사자에게 6개월간의 교인 자격을 박탈한 조치 이외에도 그의 부모 양인에게까지 "한 집에서 그 아들의 일을 금하지 아니한" 책임을 물어 6개월간의 책벌을 내리고 있음에서 더욱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음주건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한 조치를 취하고 있어 위의 경우와 비교된다. 즉 류홍준의 불륜문제와 같은 날에 제기되었던 안건으로 "송장로가 말씀하기를 교우 리기용도 술 먹은 일이 있다함"이라는 보고가 있자 당회는 그를 불러 사실 여부를 물었다. 이에 리기용이 대답하기를 "그 일이 있었으나 약으로 먹고 시장하여 먹었다."고 답하자, 책벌을 면해주는 한편 그를 위해 기도해 주고 있다.
한편 축첩한 교인에 대해서는 앞서의 불륜관계 경우보다 더 엄한 책벌을 내리고 있다.
노병상은 첩을 두고도 당회를 속인 일로 두 번을 부르되 오지 아니하기로 출교하기로 작정하고 그 아내도 무죄한 자부를 내어 쫓고 다른 자부를 취하였으며 또 귀신을 섬기며 고사까지 하였으니 출교하기로 작정하고
'출교'란 교회 교인 명부에서 그 이름을 지워버리는 것으로서 치리 가운데 가장 무거운 징벌에 해당된다. 이러한 책벌을 축첩한 교인에게 적용한 것으로 보아 당시 새문안 당회와 한국교회의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조치는 그 후 절차상의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노회(老會)에서 파견된 검사위원으로부터 "회록은 다 잘 되었으나 주 1910년 12월 18일 당회에서 처결한 노병상의 일에 대하여 먼져 책벌함이 없고 출교함은 과히 엄한 듯하다."라는 지적을 받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책벌의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출교시킨 것은 너무 가혹한 처사라는 입장에 앞서, 우선 절차상에 문제가 있다느 것이다. 이러한 시정지시를 그 후 새문안 당회가 접수, 번복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으나 아무튼 위의 사실에서 우리는 당시 새문안 당회의 치리가 얼마나 엄했던가를 재삼 확인할 수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민며느리제에 대해서도 '교회법에 범한 바 됨으로' 치리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16세 자식을 혼인시킨 교인 부모에게 조혼을 금하는 교회법을 어겼다고 하여 책벌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 경우는 피치 못할 사정이 인정되어 결혼 이후 신부를 교회에 출석토록 한다는 선에서 일단락 내고 있다. 이 밖에도 교인의 신문으로 믿는 규수를 믿지 않는 가정에 중매한 교인을 책벌한 일도 있으며 심지어 교회학교에 출석하는 남학생과 여학생 사이에 편지를 주고 받았다는 이유로 '출학'조치를 취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되는 바는 문제가 되는 교인에 대한 치리와 징계에 앞서 당회는 예외없이 문제의 교인을 당회에 불러 사실을 본인에게 직접 확인함은 물로 당사자를 위해 기도해 주며 권면하는 절차를 밟고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잘못한 점에 대해서는 엄한 책벌을 내렸으나 한편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권면과 기도를 잊지 않았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마치 '칼빈의 옛 신정시(神政市) 제네바교회'를 연상케 하는 이같은 엄한 치리가 비단 새문안교회에서만 있었던 일은 아니다. 1910년대를 전후한 시기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경향이 그러하였다. 1910년 독노회에서는 "데릴사위( 壻)나 민며느리(預婦) 데리는 교인을 경계할사"라고 하였으며 조혼문제에 대해서도 총회 결의로 결혼 연령을 '여자는 만 15세, 남자는 만 17세 이상'이어야 한다고 못박았던 것이다.
이 시기부터 교인의 도덕성과 윤리성을 문제삼게 된 것은, 앞서 지적한 무원칙한 초기 전도방법으로 도덕성이 결여된 사람들도 교인속에 포함되자 이들을 교정시키기 위한 의도에서 시작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 밖에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요인이 고려된 조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첫째, 대부흥운동의 영향이었다. '1907 대부흥운동'을 맞이하며 한국교회는 거듭나는 체험을 하게 된다. 이 운동은 이후 한국교회와 교인들의 도덕성 회복에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이 시기 전국적으로 일기 시작했던 부흥사경회를 통해 기독교의 구원의 도와 죄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되었고 이는 바로 정결된 신앙심에 바탕을 둔 도덕성 회복운동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둘째, 이 시기를 전후하여 한국교회 내의 도덕성 회복운동이 집중적으로 진행된 배면에는 당시의 정치적 영향을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익히 아는 대로 1905년 외교권을 일본에 박탈당한 이후 1907녀에서 1910년 간은 국권이 송두리째 일제에 강점당한 일로 민족적인 울분과 좌절감이 교차하던 암울한 시기였다. 따라서 이러한 민족적 위기를 맞이하여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게 되었고 그 가운데는 스러져 가는 민족의 운명을 교회를 통해서 일으켜 보려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교회가 십자군병을 일으켜 일본을 축출해야 한다'는 정치적 목적을 갖고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1907년 대부흥운동과 이어서 전개되었던 '백만인 구령운동'등이 이와 같은 한국교회의 정치화를 막기 위해 외국 선교사들이 시도한 한국교회가 개항 이후 한국 사회의 정치 사회문제에 많은 관심을 보이며 참여해 왔던 성격이 이 시기부터 점차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이후 한국교회는 순수신앙을 강조하는 한편 대외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을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던 것이다. 아무튼 1910년대 국권을 일제에 빼앗기는 암울한 시기를 전후하여 강조되었던 한국교회 안의 영적 정화운동은 이후 하나의 전통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듬어 정비해 간 새문안(1916~1930)
3.1 운동과 한국교회
'합방' 이후 일제의 포악한 무단통치는 한인(韓人)들의 거족적인 항일민족운동을 불러 일으켰다. 한민족의 독립의지와 일제의 무자비한 잔학상을 세계만방에 천명한 이 사건을 3·1운동(三一運動)이라고 한다. 여기서 새삼 3·1운동의 전말을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3·1운동의 한국 기독교사적인 의의 몇 가지를 정리하는 한편, 우리의 주된 관심사인 새문안의 모습, 곧 이 운동에서 새문안교회는 어떠한 모습이었는가를 살펴보는 데 한정하기로 한다.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그 해 초여름까지 계속되었던 3·1운동은 국내에서는 물론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세계 각처에서 봉기한 세계적인 항일독립운동이었다. 바로 이러한 역사적인 독립운동을 태동시키고, 불을 당기고, 확대해 나간 주도세력이 다름아닌 우리의 신앙적인 선배들이었다. 즉 3·1운동을 태동시킨 최초의 독립단체인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결성하고 이를 이끈 중추적인 인물이 기독교인이었으며, 이 가운데 핵심 인물 두 분이 우리 교회의 장로 출신이라는 점은 새문안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1918년 여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남에 따라 세계 질서와 국제 열강 사이의 역학관계에 일대 변화의 조짐이 돌자, 중국 상해(上海)에서 활동하고 있던 일군(一群)의 독립운동가들은 이를 독립운동으로 연결시키고자 하였다. 파리평화회의에 민족 대표를 파견, 일제의 한국 병합의 부당성과 잔혹한 식민통치의 실상 그리고 한국민의 독립의지를 만천하에 알리고자 한 것이다. 신한청년당이 결성된 것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선교사 클라크(C.A. Clark, 郭安連)로부터 전도를 받아 기독교에 입교한 후 한때 전도사 활동을 했으며 훗날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를 조직, 해방정국을 이끈 여운형(呂運亨), 우리 교회의 장로 출신인 서병호 양인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신한청년당은 역시 우리 교회 장로 출신인 김규식을 파리평화회의에 파견함으로써 어느 독립단체보다도 앞서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움직임을 국내에 제일 먼저 알린 것도 역시 신한청년당이었다.
물론 민족대표33인의 종교적 성향에서 보듯 이 운동은 기독교계 외에도 당시 민족종교로서의 교세가 기독교측보다 강하였던 천도교측과 불교계 등과의 연합에 의해 추진된 초종파적인 민족연합운동이었다. 본래 기독교측은 이 운동을 단독으로 추진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 운동의 기본적인 방법은 독립청원운동(獨立請願運動)이었다. 독립을 '청원'했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없지 않으나 여기에는 또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개항 이후 독립협회(獨立協會)의 민권·국권운동에서 애국계몽기(愛國駱蒙期)의 「신민회」(新民會)의 비밀결사운동(秘密結社運動)에 이르는 일련의 민족운동을 이끌어간 중추적인 인사들은 대부분 기독교인들이었다. 따라서 3 1운동 시기까지의 민족운동의 노선과 성격은 당시 기독교인들이 어떠한 운동노선을 택하고 있었는가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모든 종교단체의 지향하는 바가 그러하듯 당시 기독교 민족운동의 노선은 무장투쟁론(武裝鬪爭論)을 배제한 실력양성론(賁力養成論) 내지 기회포착론(機會捕捉論) 쪽에 가까웠다. 3·1운동이 기본적으로 비무장 무저항운동론(非武裝無抵抗運動論)에 따른 평화적 시위운동방법을 견지하려 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그러나 역시 총칼로 무장한 일제를 상대로 독립을 '청원'하려 했다는 것은 기독교의 특징이자 한계점이라는 지적도 없지 않다.
아무튼 3·1운동을 전 민족적인 독립만세운동으로 점화·확산 시켜나가는 데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의 역할과 공헌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당시 기독교 교계는 전 인구 1,700만 명 중 2%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열악한 교세를 감안할 때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기독교측 인사가 16인이나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운동이 지방으로 확산되면서 이 운동의 진원지와 주도자 대부분이 교회와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점을 잘 말해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피검자들의 종교별 통계에서도 이 점이 잘 시사되고 있다. 즉 피검자 중 천도교, 불교, 유교 등의 교인 전체 숫자보다도 기독교인 피검자 수가 많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인 가운데는 장로교인의 피검자 수가 월등하게 많다. 이 밖에도 제암리교회(堤岩里敎會) 학살사건에서 보듯 3·1운동 전 과정에서 교회가 입은 피해와 수난은 여기서 새삼 거론할 필요도 없을 만치 상처가 깊고 컸던 것이다. 요컨대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은 개항 이후 이 나라의 새로운 지도이념(指導理念)과 시대정신(時代精神)으로서 그 위상을 지켜오며 농축해온 자주독립의식(自主獨立意識)을 3·1운동에서 유감없이 선양(宣揚)하였다. 비록 이로 인해 많은 피해와 상처를 입었으나, 이 운동을 통해 한국교회는 민족사와의 일치감을 더욱 공고히 하는 민족사적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새문안과 3.1 운동
3·1운동 선상에서 보여준 한국교회의 적극적이고도 긍정적인 위상에 비해 우리새문안의 모습은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다. 적어도 자료상에 나타난 3·1운동 기간의 새 문안교회 모습은 이러한 평가를 불가피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아래에서 보듯 새문안이 3·1운동과 전혀 무관하거나 이를 외면한 것은 결코 아니다. 3·1운동과 관련된 새문안의 모습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즉 이 운동이 만세시위운동으로 확산되기 이전까지의 모습과 이후의 모습, 그리고 이 운동에 참여한 교인들의 모습과 이 일로 감옥에 갇힌 '재옥교인(在獄敎入)과 그 가족들을 돌본 교회의 모습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익히 아는 대로 3·1운동의 직접적인 발단은 고종(高宗)황제의 갑작스러운 서거(逝去)가 단초(端初)가 되었다. 고종 황제는 3·1운동이 일어나던 해에 68세의 고령이기는 했으나 신병(身病)에 대한 소문도 없이 그 해 1월 21일 갑자기 승하(昇遐)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장안의 인심이 매우 흉흉하였다. 일본인 앞잡이에 의한 '독살설'이 시정(市井)에 회자(膾炙)되었는가 하면 반면에 나라의 국권을 일본에 '양도한'황제의 죽음이니 그렇게 슬퍼할 일이 못된다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고종황제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지켜 보아온 대부분의 한인들은 고종 황제의 죽음을 슬퍼했다. 그리고 이러한 슬픔은 평소 일본에 대해 쌓여 있던 적개심과 분노심을 자극시켰다. 고종 황제의 인산일(因山日)을 독립만세운동의 봉기일로 잡게 된 것도 이러한 한인들의 반일감정과 무관하지 않다.
새문안교회는 이와 같이 3·1운동의 점화에 직접적인 원인이 된 고종 황제의 승하에 대해 어느 교회, 어떤 사회단체보다도 애통해 하며 슬퍼했다. 국운이 스러져가던 1890년대 자주독립국의 유일한 상징인 대한제국(大韓帝國) 황제의 위상을 높이고자 새문안은 고종 황제의 탄생일을 맞이할 때마다 민족적인 행사로 '황제탄신일기념예배'를 드렸으며, 고종 황제는 청일전쟁(淸 日戰爭) 기간에 새 문안교회가 보여준 헌신적인 콜레라 퇴치활동을 치하하는 감사장을 보내주는 등 새문안은 고종 황제와 남다른 인연을 맺고 있었다. 따라서 고종 황제의 서거에 대한 새문안의 애도와 슬픔은 남달랐던 것이다. 고종 황제가 서거한 지 일주일 되는 1월 27일 전 교인이 모여 황제의 승하를 애도하는 특별예배를 드린 일이며, 대한문(大漢門) 앞에 마련된 빈소를 찾아 교회와 당회의 이름으로 특별히 조문(弔問)과 '국장수부'(國葬受付)를 표하였던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새문안은 이렇듯 고종 황제의 서거를 유달리 슬퍼하고 가슴 아파했을 뿐, 이를 여타 다른 교회들과 같이 한민족의 독립운동으로 연계, 승화시키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3월 1일 서울 태화관(泰和館)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있던 시각에 평안북도 북단에 위치한 의주(義州) 지방의 서부교회(西部敎會)에서는 유여대(劉如大)목사의 진두지휘에 따라 전 교인들이 의주시내로 뛰쳐나가 만세시위를 펼쳤는가 하면 당시 장로회 총회장(제8회)이었던 김선두(金善斗)목사는 평양 숭덕학교(崇德學校) 교정에서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를 직접 주도하였다. 김 목사는 이날 평양시내 6개 교회 교인 1천 수백 명이 모인 자리에 나아가 "구속되어 천 년을 사는 것보다 자유를 찾아 백 년을 사는 것이 낫다"는 취지의 연설을 한 후 만세시위에 돌입, 평양 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의 불을 지폈다.
이렇게 하여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에 파급'되기 시작한 만세운동은 그 불길이 북쪽으로는 평양, 의주를 시발로 선천, 정주, 안주, 진남포, 원산, 그리고 해주, 사리원, 연백 등 비교적 기독교 세력이 강했던 지역으로 이어졌다. 이들 도시 대부분은 경의선과 경원선 연변에 인접한 위치상의 특성도 있지만 105인 사건에서 보듯 이들지역은 평소 반일적인 기운이 강했던 곳이었다.
이 밖에 남쪽에서도 기독교인들을 중심한 만세운동이 가열차게 진행되었으니, 대구에서는 3월 8일 남산교회 이만집(李萬集) 목사의 주도하에, 부산에서는 3월 11일 일신여학교( 日新女學校) 학생들과 기독교인들이, 그리고 전주에서도 3월 13일 천도교인들과 연합하여 기독교인들과 신흥학교(新興學液)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태극기를 들고 시내로 쏟아져 나오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3 1운동의 초동단계에서 기독교인과 교회가 이 운동에 점화하고 확산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는 교회가 본질적으로 타고난 결속력(結東力)과 통일력(統-力)을 유감없이 발휘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유감스럽게도 "예수 믿는다는 말과 독립시위에 참여했다는 말이 지금 한국에서는 동의어(同意語)가 되던 당시, 이와 유관된 새문안의 모습을 발견하기 쉽지 않다. 말하자면 한국의 모교회로서, 과거 새문안이 민족문제에 대해 보여주었던 그 모습을 3·1운동에서 찾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우선 장로교계측의 3·1운동 준비가 평양 등 서북 지방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점에 비해 서울 지역은 감리교측이 중심체가 되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교회 내부의 요인을 들 수 있다. 3·1운동 당시 우리 교회는 언더우드 목사 서거 이후 교회의 내적인 동요가 가시지 않은 어수선한 상태에서 언더우드 목사의 후임 문제를 놓고 다소 진통을 겪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언더우드 목사의 후임으로 쿤스(E.W. Koons, 君芮彬) 목사가 부임하게 되는데 그는 교회의 비정치화(非政治化)를 강조했던 선교사였다. 바로 이 점이 3·1운동에서 새문안이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게 된 또 하나의 요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교인들을 향해 늘 '일본에 복종하며 이를 달가운 마음으로 할 것'과 평소 '독립운동 따위는 생각지도 말라'고 역설해온목회자의 꼴을 먹는 교회와 교인들에게 독립운동이란 처음부터 기대 밖의 일이었는지 모른다.
당시 외국인 선교사들의 이러한 친일적인 성향이 비단 쿤스 선교사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관서 지방(關西雄方)의 특수한 '반골적'인 분위기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선교사들을 제외하고는 적지 않은 선교사들이 친일쪽으로 경도되어 갔다. 이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예로 감리교 감독 웰치(H. Welch)의 경우를 들 수 있겠다. 그는3·1운동 당시 독립선언식이 교회당 뜰에서 진행된 일과 고종 황제의 서거를 애도하는 특별예배가 교회에서 드려진 사실 등을 비신앙적이라고 매도하였다. 또 장로교의 클라크(A.D. Cla가) 선교사도 3·1운동 발발 직전까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말하자면 3·1운동과 선교사들과의 관련성을 부인하려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자신들의 비정치성과 '중립적인 태도를 천명하려 했던 것이다. 선교사들의 '중립적' 태도 이면에는 미국 정부의 정치적 종용과 "포악한 (일제 당국에 의해) 잔인하게 쓰러지는 모습을 보면서 이 나라 도처에서 자행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맥을 못추니 미칠 것만 같다"는 독백에서 보듯 일본에 협력할 수도, 한국교회에 협력할 수도 없는 난처한 입장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선교사들의 진의와는 달리 그들이 표면적으로 취한 '중립적' 태도는 친일적으로 비쳐졌고 결국 뒤에서 살펴보는 바와 같이 1920년대 이후 일반 사회에서는 물론 교회안에서까지 외국 선교사에 대한 배척의 조짐과 반기독교운동이 표출되는 원인이 되었다. 아무튼 새문안은 위에서 언급한 대내외적인 이유와 원인 등으로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결코 새문안 교인들이 개인적으로까지 이 운동을 외면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흔적을 당시 당회록에 남긴 한 줄의 기록과 그 행간(行間)에 숨쉬고 있는 뜻에서 발견할 수 있다.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던 때인 1919년 3월 29일에 열린 제128회 당회에서 "당분간 제직회, 면려회, 제소회집을 연기할" 것을 결의하고 있다. 위의 결정이 3·1운동 발발 직후라는 점에서 3·1운동 이후 일체의 집회 결사를 불허했던 일제 당국의 지시에 의한 조치였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아래와 같은 사실에서 이 조치가 단순히 일제 당국의 지시에 따른 것이 아니었음을 보게 된다.
우선 위의 당회 결의가 3·1운동이 터진 지 거의 한 달 만에 열린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세운동'이 서울 장안은 물론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가는 와중에서 사실상 교회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없다. 따라서 당분간 교인들의 회집연기는 불가피한 조치였을 것이다. 한편 이상과 같은 당회의 '회집 연기'결정이 일반 교인들의 만세운동 참여에 따른 비상조치였을 가능성도 높다. 즉 새문안 교인들 가운데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수감되거나 상해를 입어 교인들의 회집이 불가능해진 데서 비롯된 조치였을 가능성도 없지 않은 것이다.
이같은 추정의 개연성을 아래의 몇 가지 사실에서 간접적이나마 살펴볼 수 있다. 당시 우리 교회에서 운영하고 있던 교북동설교소(橋北洞說敎所)의 주임(主任)으로있던 오긍선(吳兢善) 집사가 3월에 갑자기 사임한 일이며, 그 해 10월부터 당회원은 매일 새벽 6시에 각자 집에서 특별기도시간을 갖기로 결의한 점, 그리고 이러한 특별기도 움직임이 전 교인들에게로 확산되어 하루에 오전 10시와 오후 2시, 7시에 교회에 모여 두세 시간씩의 특별기도시간을 갖기로 결의한 점,)특히 만세운동의 불길이 가라앉은 1920년 1월 제직회에서 "금번 구제연보(救濟捐補)와 성탄비(聖誕費) 체액금(切額金)을 합계하여 50원을 재옥 교인(在獄敎人)의 가족에게 구조(救助)하기로 가결"한 점 등은 새문안 교인들이 3·1운동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이일로 감옥에 갇힌 교인들이 있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재옥 교인'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3·1운동에 참가했다가 피검되어 옥고를 치르고 있던 새문안 교인들을 지칭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상의 몇 가지 사실을 통해 새문안은 비록 교회적 차원에서의 3·1운동에 참여한 바는 없으나 교인들은 전 민족적 구국운동으로 전개된 3·1만세운동을 결코 외면하지 않았으며 영어(囹圄)의 몸이 되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교회 또한 '재옥 교인'들과 이들 가족의 생활 보조를 위해 특별헌금을 모금하였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또 다른 새문안의 훈훈한 공동체 정신을 발견하게 된다.
'문화정치'의 실상과 일제의 기독교 정책
비록 3·1운동이 민족해방과 조국의 독립은 성취하지 못했지만 이 운동이 미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당시 서구열강의 식민지 내지 반식민지(半植民地)하에서 신음하고 있던 인도(印度)와 중국(中國)을 비롯한 월남(越南), 필리핀, 심지어 중동(中東)지역의 여러 피압박 약소민족에게까지 독립운동의 불길을 일으키는 '불씨'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한편 민족 내부적으로는 한민족의 독립성을 세계에 천명하는 대한민국(大韓民國) 임시정부(臨時政府)가 이 운동의 산물로 수립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제의 국내 식민통치의 정책에도 일대 변화를 가져오게 했으니 곧 무단통치(武斷統治)를 '문화정치'(文化政治)로 바꾸게 한 것이다. 그러나 '문화정치'는 그 말이 주는 표면적 의미와는 달리 매우 교활한 식민지 통치술이었다. 우선 일제가 '문화정치'를 표방하게 된 배경을 잠시 언급해 보기로 한다. 일제 당국은 첫째,3 1운동을 겪으면서 수천 년의 문화와 역사를 지니고 있는 한민족을 무단적인 방법으로 통치할 수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식하게 되었고, 둘째, 그 같은 일제의 거친 식민통치의 실상이 3·1운동을 통해 세계에 알려지자 그 '따가운 눈총'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앞서의 거칠었던 무단통치 방법을 지양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여기서 제시된 것이 바로 '문화정치'였던 것이다. 익히 아는 대로 이 정책의 실상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열강들이 한결같이 식민지 약소국에 적용했던 이른바 '분할통치정책'(Divide and Rule Policy) 바로 그것이었다. 말하자면 식민지 내부의 계층적 대립을 조장하여 국민적 통합과 민족적 역량을 분산, 대립, 와해시키려는 이른바 민족분열정책(民族分裂政策)이 '문화정치'의 실체였던 것이다.) 해군 대장(大將) 출신인 3대 총독(總督)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에 의해서 획책된 이 정책 초기에는 일면 '합방' 이후 전면 폐간시켰던 언론기관(東亞日報, 朝鮮日報)의 창간을 허락하는 등 3·1운동 이후 격앙된 한인들의 반일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한 회유책을 내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문화정치'의 총체적인 성격은 친일적인 한인 관료(官僚)와 지주(地主), 예속자본가(隸屬資本家)들을 육성, 광범위한 친일세력을 부식(扶植)시키는 교활한 정책과 민족주의 진영 내부의 분열과 어용화(御用化)를 조장한 기만적인 통치술이었다.
따라서 일제 총독부의 기독교 정책 또한 이러한 구도에서 벗어날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측에 대한 태도는 매우 우호적이며 유화적이었다. 즉 3·1운동 이후 총독부 내에 종교과(宗敎課)를 신설, 과거와 달리 기독교와 기타 한국 재래적 종교 전반에 대한 총독부의 관심과 성의를 표하기도 하였다. 이때 포교규칙(布敎規則)을 개정하여 교회당, 설교소, 강의소 등의 설립을 허가제(許可制)에서 신고제(申告制)로 바꾼 일이며, 과거 외국 선교사들의 불만 요인의 하나였던 외국인과 외국단체에게 불허되었던 부동산(不動産) 소유권을 "종교 및 제사를 목적으로 하는 재산에 한해 그 소유권을 인정해 준다"는 제한적 허가제로 바꾸는 등 일련의 유화적인 회유책을 취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총독부 고관 자리, 예컨대 당시 최고 법원인 고등법원장(渡邊暢)과 조선은행 총재(美濃部俊吉)와 같은 요직에 기독교인을 임명하는 한편, 그간 한국에서의 선교사들의 업적을 추어올리는 각종 연회와 간담회를 주선하여 외국 선교사들을 친일화의 길로 유인하였다. 이같은 유도책에 일부 선교사들이 넘어가 웰치(H.Welch) 선교사 같은 이는 "조선인은 일본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이 더 행복하다"든가 "조선인은 독립사상을 포기했다"는 등 망발을 하기도 하였다.
아무튼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향후 '조선'을 그들의 완전한 식민지로 지배하기 위한 일시적인 기만적 회유책에 불과했다. 말하자면 전략(戰略)은 그대로 둔 채 전술(戰術)만을 다소 바꾼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 점은 일제에 비협조적이라고 지목된 선교사들에 대한 총독부의 위압적인 태도와 탄압에 잘 나타나고 있다. 3·1운동 1주년을 맞는 날의 일이었다. 배재학당(培材學堂) 학생들이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만세고창(萬歲高唱)을 한 일이 있었다. 바로 이 작은 사건을 빌미로 일제측은 평소 비협조적인 선교사로 지목하고 있던 이 학교 교장인 아펜젤러(H.G.Appenzeller)를 교장직에서 해임시키려고 하였다. 평양 숭실학교 선생으로 있던 모우리(E.M. Mowry) 선교사는 3·1운동 선언문을 영역(英譯)한 일과 학생들을 보호했다는 이유로 구속당해 당시 최고법원인 고등법원의 재판에까지 회부되는 고통을 받기도 하였다.
요컨대 일제측의 한국 기독교에 대한 정책은 양동정책, 곧 일면 회유 일면 탄압이라는 방법으로 획책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제의 대기독교 정책은 이미 통감부(統監府) 때부터 획책된 바 있는데 그 성격은 친일화 유도정책, 반일 민족세력과의 차단정책 그리고 직접적인 탄압책으로 요약된다. 1920년대 한국교회와 기독인들은 이러한 일제의 기독교 정책에 따라 때로는 회유되고 때로는 저항하면서 수모와 자성의 괴로운 세월을 보내야 했다. 이 밖에도 이 시기 표출된 '반기독교운동'으로 한국교회는 어려움을 당해야 했다.
'반기독교운동'의 대두와 교회의 입장
한국 기독교사에 있어 1920년대는 교회가 대내외적으로 매우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던 위기의 시대였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하는 시기이다. 일제의 교활한 '문화정치'하에서 자기 정체성(identity)을 지탱하기도 힘겨워하고 있던 시기에 한국교회는1917년 소련의 볼셰비키혁명 이래 '신사조'(新思潮)로 그 위세를 떨치며 구축된 사회주의자(社會主義者)들로부터 감당하기 어려운 비난과 공격을 받았다. 이를 가리켜 이른바 '반기독교운동'(反基督敎運動)이라고 한다.
이러한 '반기독교운동'의 조짐은 3·1운동 이전에 이미 있었다. 1917년 이광수(李光洙)가 제기한 이른바 '기독교 시비론'(基督敎是非論)이 바로 그것이다. 이광수는 그해 11월에 <청춘>(靑春)이라는 잡지에 "금일 조선야소교회의 결점"(今日 朝鮮耶蘇敎會의 缺點)이라는 제하의 글을 게재한 후 신문지상을 통해 당시 한국교회와 교인들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예리한 글을 기고했다. 그 주장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교회는 자유, 평등이라는 기독교의 기본정신에 배치되는 계급주의'를 지향하고 있으며(목사, 장로의 특권의식을 지칭), 둘째, 교회지상주의적(敎會至上主義的)인 태도를 비관하고 있다. 말하자면 한국교회와 교인들은 이러한 '편견을 갖고 있어 여타 종교를 멸시하거나 비교인(非敎人)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우'(愚)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 그는 '교역자의 무식'(敎役者의 無識)을 지적하고 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당시 한국인 목회자들의 지적인 수준이 "신구약 성경만을 2, 3차 맹독(盲讀)하고 100항(百項) 정도 되는 설교학이나 배워가지고 "교역자가 되는 실정이라고 하면서 현대 사회의 철학과 과학 분야 등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공부를 촉구하고 있다. 이 밖에도 신학생의 선발 기준과 교과과정상의 문제점, 그리고 한국교회의 '저급한 미신적 종교행위' 등을 들어 당시 한국교회와 교인들의 '무지성'(無知性)을 통박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상의 '기독교시비론'은 이광수 자신이 "교회와 사회를 위한 충정에서였다"고 말하고 있듯이 결코 반기독교적인 의도에서라고 보기는 어렵다. 한국 기독교가 신학적으로는 성찬을 중시(sacramental)하고 성육신적(成商身的)이어야 한다는 전제하에서 한국 초대교회가 지녔던 순수한 형태의 참여적 교회의 이미지를 부활시키려는 '충정'에서 비롯된 충고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문제는 이후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진행된 본격적인 반기독교운동이었다. 1920년대 한동안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주창된 반기독교 논리의 요지는 첫째, 기독교는 제국주의(帝國主義)의 수족이요, 자본주의의 주구(走狗)로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있다는 것이고, 둘째, 교인들을 현실을 외면한 '믿고 천당'이라는 '미신적'인 신앙으로 유도하여 민족의 독립심을 말살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를 한국 땅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은 그들이 유물론(唯物論)과 무신론(無神論)에 입각한 사회·공산주의를 지향한 데서 비롯된 주장이라고 하겠으나 당시 교회로서는 큰 충격이자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교회는 이제 한국에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기독교에 대한 일반인들의 태도는 전과 판이하다. 이것은 놀라움이 아니라 충격이다"라고 당시 상황을 밝힌 양주삼(梁柱三) 목사의 견해는 결코 과장만은 아니었다.
이같이 한국 교계에 '위기와 충격'을 몰고 온 반기독교운동은 1922년 3월 중국 북경(北京)에서 먼저 일어나 한국에 전해졌다. 여기에 마침 이 시기 「무산자동맹」(無産者同盟)을 비롯한 「북풍회」(北風會), 「화요회」(火曜會), 「사회주의자동맹」(社會主義者同盟) 등 사회주의 정치집단이 생겨났다.
결국 사회·공산주의를 지향하는 이와 같은 단체들에 의해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이 1925년 4월 비밀리에 결성되었는데, 바로 그 직후에 반기독교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그해 10월의 일이었다. 「한양청년연맹」(漠陽靑年聯盟)이라는 사회주의 단체가 마침 이달 서울기독교청년회관(YMCA)에서 제2회 전조선주일학교대회(全朝鮮主日學校大會) 개최에 맞춰 '반기독교대강연회'(反基督敎大講演會)를 열고 기독교는 미신(迷信)이다', '대중아 속지 말아라', '현하(現下) 조선과 기독교의 해독', '양이낭심(羊而狼心)의 기독교'라는 등 매우 선동적이고 원색적인 제하의 대대적인 반기독교 강연회를 개최하려 하였다. 이 강연회는 일제측의 탄압과 기독교측의 반발에 부딪혀 실현되지는 못했으나 이후 이러한 움직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반기독교단체들은 크리스마스날인 12월 25일을 '반기독데이'로 정했는가 하면 김익두(金益斗) 목사와 같은 부흥사를 가리켜 '고등무당'이라고 비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도전 앞에 한국교회는 어떠한 입장과 반응을 보였던가? 앞서 이광수의 기독교 시비론에 대해서는 진지한 자성(自省)의 모습을 보였으나 위와 같은 원색적인 비난에 대한 반응은 달랐다. 물론 "오늘날의 교회는 그저 민중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산계급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하여 있어야 하며 따라서 현대의 기독교회는 반성해야 한다고 본다"는 자기 비판적인 입장도 없지 않았으나 대부분의 교회와 기독인들은 "그들은(사회주의자) 그들이오 우리(기독교인)는 우리외다. 따라서 대책이니 무엇이니 하는 말도 할 것이 없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하여 애써 이를 의식하지 않으려는 냉소적 태도를 보였다. 한편 일부 진보적 교인 가운데는 '기독교사상'과 사회주의가 상동(相同)한다'는 입장에서 사회주의를 무조건 배척하거나 경원시할 것만이 아님을 주장하는 이도 없지 않았다
개항이래 시대를 앞서간 모든 운동의 단초(端初)가 그러하였듯 한국에서의 사회·공산주의 운동도 그 출발은 기독교인들에 의해서였다. 1918년 6월 하바로스크에서 노령(露領) 한인들을 모아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당인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을 조직한 이동휘(李東嬅)는 본래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1907년에 기독교에 입교한 이후 1912년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교한 바 있으며 한동안 전도사로 일한 경력까지 갖고 있는 기독교인이었다. 이 밖에도 우리 교회의 장로 출신인 김규식(金奎植)과 역시 전도사 출신이자 중국 남경(甫京) 금릉대학(金陵大學)에서 공부한 여운형(呂運亨)도 1922년 「기독교도동맹」(基督敎徒同盟)이라는 단체를 결성, 모스크바에서 열린 '피압박 약소민족대회'(被驅追弱小民族大會)에 참석한 적도 있다.) 이 시기 기독교계 민족지도자들 가운데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민족의 독립과 관련하여 큰 기대를 걸었던 워싱턴회의(1921. 11)가 아무런 소득없이 끝나자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로 부상한 소련을 선택한 자들도 있다.
아무튼 이러한 배경과 경위를 거쳐 1920년대 중반 한국 내에서 한때 기세를 올렸던 반기독교운동은 이후 교회 내에서도 '반선교사운동'으로 비화되어 이 시기 한국교회는 내우외환(內憂外意)에 시달리는 어려운 시대를 맞이해야 했다. 그러나 더욱 슬픈 일은 적지 않은 교회와 지도자들이 이러한 어려움을 당해 당시 교회가 안고 있던 '반사회적'인 모순과 '반민족적'인 경향성을 적극적으로 극복하기보다는 일제측으로 기울거나 식민지 통치에 순응하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로써 한국교회와 기독교는3·1운동 이전까지 한국 민족과 사회를 선도하며 이끌어 온 민족사적 기능이 점차 퇴색해 갔다. 그러면 이러한 시기 우리 새 문안에서는 어떠한 일들이 벌어졌으며 그 모습은 어떠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시련과 어둠을 헤쳐간 새문안(1931~1944)
일제의 대륙침략과 황국신민와 정책
1930년대 접어들면서 일제가 획책한 식민지정책은 한마디로 군국주의에 기초한 파시즘체제였다. 1920년대 말 세계에 몰아닥친 세계 공황(恐需)의 여파로 궁지에몰린 일본은 그 돌파구를 전쟁놀이에서 찾으려 했다. 그 구체적인 시도가 바로 무모한 대륙 침략의 획책이었다.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을 기점으로 1937년의 중일전쟁(中日戰爭), 1941년의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으로 이어지는 침략전쟁을 15년간 감행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 식민지 '조선'의 형편은 전보다 더욱 어려워졌다. 만주사변의 발발 이후 전시체제에 돌입하면서 조선 내의 일본군과 헌병경찰수를 급증시키는 한편,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과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朝鮮思想犯保護觀察令) 등을 제정, 한국인의 사상통제를 강화해 나갔다. 말하자면 전시체제에 돌입하면서 일제는 한반도 전체를 군사적으로 병참기지화(兵站基地化)하는 한편, 사상 통제와 교정을 통해 한국인을 일본의 '충량(忠良)한 신민(臣民)'으로 전락시키려는 정책상의 변화를 꾀했던 것이다. 이른바 황국신민화 정책'(皇國臣民化政策)과 그 정책의 실천적 논리로 등장한 '내선일체론'(內鮮一體論)과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이 바로 그것이다
1937년 중일 전쟁을 일으키면서 적극적으로 강요되기 시작한 '황국신민화' 책동은 그 해 12월 일본 각의(閣議)에서 아래와 같은 구체적인 방침을 결정함으로써 그 실체가 완연하게 드러나고 있다.
1. 학교교육의 '쇄신'에 의한 '황민화'
2, 조선인의 지원병제도의 채용
3. 신사승경(神社崇敬)의 염(念)의 함양
(1) 국체관념의 명징(明澄)
(2) 구래(舊來) 누습(陋習)의 개선
(3) 내지(일본)의 양속(良俗) 채용
(4) 국어(일본어)의 보급
(5) 사상선도 등을 통한 황국신민의식의 배양
4. '반도주재(竿島駐在) 내지인(일본인 증가 정착'에 의한 내선(內鮮) 융합의 강화
위와 같은 '황민화' 방침을 중앙으로부터 시달받은 조선총독부측은 단기간에 효과를 거두기 위해 관계된 법령 개정과 아울러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였다. 이 시기 교육령의 개정과 육군지원병제도의 창설, 그리고 '창씨개명'(創氏改名)의 실시와 이른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 등을 급조하여 결성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특히 「국민정신총동원연맹」의 조직은 최하위 지방행정 단위 인 정(町), 동(洞), 리(里)에까지 '연맹'이 조직되었을 뿐만 아니라 관공서, 학교, 회사, 심지어 교회 등 종교단체에까지 그 조직의 결성이 강요되었다. 따라서 새문안의 경우도 뒤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교회 내에 이 조직체를 결성하고 일본어 강습은 물론 ' 낭독과 '동방요배' 등을 실시하는 수모를 감내해야만 했다.
한편 중일전쟁 이후 전시체제에 돌입하면서 전쟁물자의 조달을 위해 식민지 수탈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국방헌금'의 강제 징수와 '애국채권'의 강매, 저축의 강요, 더 나아가 유기(鑛器), 철기 등 금속 생활집기 등의 강제 공출을 감행했던 것이다. 이같은 경제수탈과 함께 일제는 또한 각종 법규를 제정, 인력을 강제로 전쟁터로 몰아 넣었다. 조선육군특별지원병 제(1937), 국민징용령(1939), 학도동원령(19, 73), 징병령(1944) 등을 공포하여 수많은 인력을 전쟁터와 근로 노동에 동원하였다. 한마디로 1930년대 이후 일제가 멸망하기까지 한국에서 행한 식민지정책은 한민족의 민족말살을 목적으로 한 '황국신민화정책'과 함에 전쟁수행을 위한 인적, 물적 수탈책이었다.
'신사참배'의 강요와 '일본적 기독교'획책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교육계에서 먼저 일어났다. 그리고 기독교학교의 신사참배문제에 대한 한국교회의 태도도 처음부터 일관되거나 통일된 것은 아니었다. 천주교·감리교·안식교·캐나다장로교 소속의 학교들이 처음에는 이에 응하지 않고 저항하였으나, 이 문제가 본격화된 1930년대 중엽 이후 일제의 회유와 탄압 등 기만적·강압적 술책에 넘어가 신사참배에 대한 일제 당국의 해석을 받아들여 '순응'하게 되었다.
당시에 가장 큰 교세를 가지고 있던 장로교는 1932년 이래 해마다 총회에서 이 문제가 제기되어 해결책을 모색하였으나, 총독부 당국의 교섭 거부로 미온적 상태에서 소속 학교들이 개별적으로 참배 명령에 불복하는 소극적 저항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35년 평양에 있는 기독교학교 교장들을 중심으로 신사참배 거부사건이 터지자 총독부측은 이 문제에 대한 토론조차 금지하는 강경한 조치를 취하였다. 즉 서북 지방의 노회들을 중심으로 신사참배거부 결의안을 채택코자 하였으나, 평남안주노회를 제외하고는 일제 경찰의 방해로 회의조차 소집할 수 없었다. 안주노회는 1935년 12월 초 임시노회를 열고 만장일치로 "학교의 문을 닫을지라도 교리에 위반되는 참배는 할 수 없다"고 결의하고 이를 총회 및 소속 기독교학교에 통고하였다. 이는 당시 장로교의 공통된 인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일제의 회유와 압력의 강도가 높아감에 따라 점차 분열되어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고 폐교하거나 참배에 '순응'하는 길로 선회하고 말았다.
이렇게 기독교학교에서 신사참배문제가 일단락 되어가자, 이제는 1938년 초부터 교회에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여 노회와 총회에 신사참배를 결의하도록 강요하였다. 결국 1938년 9월에 열린 장로교 제27회 총회에서 일제의 각본에 따라 불법적으로 신사참배를 '종교적 행위'가 아닌 '국가적 행위'라는 일제의 주장을 총회의 이름으로 결의함으로써 일제에 굴복한 셈이 되었다.
이렇게 일제가 교회에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한 이유는 이를 통하여 기독교를 변질시키고 통제하여 '일본적 기독교'로 만들어 그들의 침략전쟁 수행에 이용하고자하는 정책을 취했기 때문이었다. 일제는 종교단체 중에서도 조선의 기독교에 대하여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며 별도의 정책을 마련하고 있었다 즉 1938년 2월의 기독교에 대한 지도대책'이라는 것과 이를 보다 강화하고 적극화한 1940년의 '기독교에 대한 지도 방침' 등 신사참배를 한국교회에 강요하기 위한 법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한국교회에 대한 일제측의 정치적 간섭이 얼마나 세밀한 부분까지 깊게 강요되었는가를 다음의 두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자료 1> 기독교에 대한 지도 대책
1. 시국인식의 철저를 위하여 야소교 교역자 좌담회를 개최하고 지도 계몽에 노력하여, 이를 통하여 일반교도의 계몽을 담당하게 할 것,
2, 시국인식 철저를 위한 지도 및 시설
(1) 교회당에는 될 수 있는 한 국기게양탑을 건설하게 할 것, 건설하지 않는 경우라 하더라도 축제일 또는 이유 있는 경우에는 국기를 게양하게 할 것
(2) 야소교도의 국기에 대한 경례, 동방요배, 국가봉창, 황국신민의 서사제창 등을 실시하게 할 것, 아울러 전승 축하회, 출정황군의 환송연 등 국가적 행사에는 일반 민중과 마찬가지로 적극적으로 참가를 종용할 것.
(3) 학교 생도의 신사참배는 국민교육상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일반 야소교도의 신사참배에 대하여는 지방의 실정에 참작하여 우선 교도의 신사에 대한 관념을 시정 이해시켜 강제로 함이 없이 실효를 거두도록 지도할 것,
(4) 서력 연호는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는 경우 외에 될 수 있는 한 사용하지 않도록 습관을 붙일 것,
3. 외국인 선교사에 대하여는 이상 각 항의 실시는 선교사의 자각을 기다릴 것.
4. 찬미가, 기도문, 설교 등으로서 그 내용이 불온한 것에 대하여는 출판물의 검열 및 인감 등에 의하여 엄중 단속할 것.
5.당국이 지도를 실시할 때에 이를 지기지 않는 완미한 교도로서 부득이한 경우에는 관계 법규(행정 집행령, 경찰범 처벌규칙 기타)를 활용하여 합법적으로 조치할 것.
6, 국체에 적합한 야소교의 신 건설운동에 대하여는 그 내용을 엄밀히 검토하여 목적이 순진하고 장래 성과가 예상되는 것에 대하여는 이때 적극적으로 원조하여 줄 것.
<자료 2> 기독교에 대한 지도방침
지도의 근본 방침 :물심 양면에 걸친 조선 기독교의 구미 의존 관계를 금절하여 일본적 기독교로 순화 갱생하게 할 것.
1, 물질적 방면에 대한 지도
(1) 외국인 선교사회가 경영하는 교육기관 기타 각종 사회사업을 점차 접수할 것.
(2) 외지 전도국에 대한 재정적 의존 관계를 차단하고 내선 기독교에 의한 재정의 자립을 촉진시킬 것.
2. 정신적 방면에 대한 지도
(1)교역자 양성 기관에 대한 학무국의 지도 감독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원조할 것.
(2) 각파에 상설적 집행기관을 설치하게 하여 감독 지도의 철저를 기할 것.
(3) 성서 찬송가에 대하여 재검토를 가할 것. 아울러 일요학교 교과서 기타 각 파의 출판물에 대하여 엄중하게 취체를 할 것,
(4) 각 파의 교헌(敎憲) 교규(敎規)를 재검토하여 적정한 개혁을 하게 할 것.
(5) 현재 경영중인 각 파의 기관지에 대하여 그 편집 내용에 적극적인 지도를 가하여 국체관념의 함양과 시국인식을 철저하게 하도록 개선하고 널리 각 교도에게 구독하게 할 것,
(6) 신사참배의 철저
하나, 일반 민중의 신사참배에는 교도도 반드시 참배하게 할 것,
둘, 기독교계 경영 학교 직원 생도는 일반 학교와 마찬가지로 신사에 참배하게 할 것.
(7) 교도는 각 집에 국기를 구입하여 갖춤과 동시에 교회당은 국기 게양탑을 설치하고 축제일 기타 이유가 있는 경우에는 게양하게 할 것,
(8) 집회시에는 반드시 다음의 행사를 실시하게 할 것,
하나, 4대절 기타 이유가 있는 의식을 거행할 때에 국가의 봉창
둘, 궁성요배
셋, 황국신민의 서사 제창
(9) 국체와 아울러 시국인식의 철저를 위하여 강연회 좌담회 등을 개최할 것.
(10) 각 파를 국민정신총동원연맹에 가맹하게 할 것.
(11) 교도는 될 수 있는 한 청년단, 방공단 또한 애국부인회, 국방부인회, 애국여자단 등에 가입하게 할 것.
(12) 조선숭배(祖先崇拜) 관념의 양성을 조장하고 기독교의 조선숭배 배격의 잘못을 깨닫게 할 것,
(13) 국체에 순응하는 기독교 재건의 자각에 기초한 운동에 대하여 이를 견제 또는 저해하는 것 같은 장애를 제거할 것.
(14) 외국 선교사에 대한 지도 취체를 강화할 것.
이러한 일제의 정책은 모두 그대로 강제 실행되었으며, 그 구체적인 목표는 '국체에 적합한 야소교'또는 '일본적 기독교'라는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기독교를 변질시켜 그들의 침략정책 수행에 협력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한국교회의 수난과 대응
1937년대 한국교회는 선교사와 한국인 간의 교권 다툼,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서북인(西北人)과 기호인(畿湖人) 사이의 지역 갈등, 게다가 교파적 갈등, 보수와 진보간의 신학적 갈등등 한국교회의 미성숙으로 그동안 잠재해 있던 문제들이 한꺼번에 노정되어 그야말로 사분오열되는 내부 갈등을 겪고 있었다. 띤 여기에 1931년 대륙 침략을 계기로 강화된 일제의 민족분열정책과 황민화운동을 통한 민족말살정책으로 한민족 내부는 안팔으로 위기에 봉착하였다 특히 1937년 중일 전쟁을 전후하여 기독교계 국내 민족주의자들을 전향시키기 위하여 일제가 일으킨 '수양동회사건'(1937)과'흥업구락부사건(1938) 이후 이 사건에 연루된 대부분의 기독교계 지도자들이 전향과 변절의 모습을 보이면서 기독교계의 친일 행각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행각은 당시 기독교로서는 가장 큰 문제가 되었던 신사참배문제에 굴복한 이후에는 개인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교단적 차원에서까지 이루어졌다. 1938년 9월 제27회 장로회 총회에서의 신사참배 가결은 일제의 강압에 의한 '타율적 가결'이었다고 하지만 이때 발표된 성명서 내용을 보면 일제에 대한 적극적인 '전향성'을 담고 있다. 즉 성명서 후반부에 "국민정신 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 국가에서 총후 황국신민으로서 정성을 다할 것"을 맹서하고 있다. 교회의 존립을 위해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볼 수 있겠으나 일단 일제에 굴복하게 됨으로써 한국교회의 민족과 신앙 양심은 많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다시 말해 한국교회는 1938년 이후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 부일적(附日的) 성격을 띠게 되었으니 그렇지 않고는 일제하에서 그 존립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YMCA, YWCA등과 같이 국제기구에 가입되어 있던 기관까지도 국제기구에서 탈퇴하여 일본 산하기구에 편입되는 암울한 형편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일반교단들의 일본교단 산하의 예속은 필연적이었다 즉 1943년 장로교는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으로 감리교는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으로 일본교단에 강제 편입되었으며 해방을 한 달 앞둔 1945년 7월에는 전 기독교교단을 통합시켜 '일본기독교조선교단'으로 전락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러한 교단의 강제 통폐합 이외에도 각 교단 내에 「국민정신총동원연맹」이나 그 후신인 「국민총력연맹」의 교단차원의 하부 기구들과 각 개교회에 「애국빈(愛國班)을 강제 조직해야 할 만큼 교회의 부일협력이 강요되었다. 당시 가장 큰 교세를 자랑하고 가장 반일적 이었다고 하는 장로교도 1939년 제28회 총회에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장로회연맹」을 조직하고, 이듬해 총회에서는 이 연맹 이사장 윤하영(尹河英), 총간사 정인과(鄭仁果) 목사의 명의로 다음과 같은 사업보고를 하고 있다.
우리 장로교 교우들이 다른 종교단체보다 먼저 시국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성의껏 각자의 역량을 다하여 전승, 무운장구 기도, 전사병 위문금, 흘병금, 국방헌금, 전상자위문, 유족 위문 등을 사적으로 공동 단체적으로 활동한 성적은 이하에 숫자로 표시되었습니다. (중략) 애국반원들의 활동 소식을 들을 때 (중략) '이만하면' 하는 기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같은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만한 정도이면 장로교측도 타 교파나 타 종교보다 '부일협력'을 잘하고 있어 기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표현이 진정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이러한 '부일협력'의 강요는 이후 더욱 강화 되었으니 1940년대에 들어서면 전투기(愛國機)와 기관총 대금을 위한 '헌납'이 강요되었고 심지어 교회종과 교회 건물 및 부지를 처분하여 바치라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참으로 '형극의 시대'였다.
신사참배문제에서 장로교보다 먼저 일제에 '순응'하였던 감리교측의 '부일협력'은보다 노골적이었다. 1940년 10월 감리교 총리원 이사회에서 소위 '혁신안'을 마련하고 다음과 같은 결의안을 발표하였다. "아(我) 국체(國體)의 진정신(眞精神)과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원리를 실현하야 총후 국민의 의무를 이행하고 신체제에 순응함은 아(我) 기독교인의 당연한 급선무이다. 고로 기독교조선감리회 총리원 이사회는 좌기 신안을 솔선 결의 실행을 기하기로" 했는가 하면 서구식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배격, 일본 정신의 함양, 일본감리교와의 합동, '일본적 복음'을 선포했으며 심지어는 개교회의 애국반 활동 강화와 '교도로 하야금 지원병에 다수 참가하게 할 것'을 스스로 제창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듬해 3월 4일에는 국민총력 조선 기독교감리회연맹 주최로 시국대응 신도대회를 열어 혁신요강의 실천과 '고도 국방국가' 완성에 매진할 것을 선언하기도 하였다. 종국에는 통리사 정춘수(鄭春洙) 목사 명의로 1942년 2월 13일 각 교구장에게 '황군 위문 및(及) 철물 헌납의 건'이라는 공문을 보내 교회의 철문·철책 물론 '교회종도 헌납하야 성전(聖戰) 완수에 협력할 것'을 지시하기까지 이르렀다. 그 밖에도 혁신교단의 통리자 정춘수 목사는 1944년 3월 3일 교단 상임위원회에서 '애국기 헌납 및 교회병합 실시에 관한 건'을 통과시켜, 교회를 통폐합하여 전쟁물자를 댈 것을 결의하였으며, 그 해 9월에는 교단본부에서 상동교회에 '황도문화관'이라는 간판을 걸고 교역자들을 일본 정신으로 재교육시키기에 열을 올렸다.
이러한 기독교계의 부일적 행각은 군소교파도 예외는 아니었다. 1940년 일제의 탄압을 받은 후 소위 "순일본적 지도이념"으로 새출발을 다짐한 구세단(구세군에서개명)·성공회를 비롯한 안식교·성결교·천주교 등도 자의건 타의건 간에 위에서 언급한 장로교, 감리교와 비슷한 부일행동을 하여 일제의 환심을 사고자 하였다. 요컨대 한국교회는 일제의 신사참배 및 변질 강요에 대하여 교단적 차원에서의 대응에는 실패하였다.
그러나 개인적 차원에서는 강렬한 거부항쟁이 없지 않았으니 그 대표적인 예로 신사참배거부운동을 들 수 있다. 일제하 신사참배거부운동은 그 성격상 신앙의 자유 수호를 위한 종교운동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 운동을 체제전복을 위한 민족운동으로 몰아 그들을 처벌하고자 하였고, 어떤 의미에서는 일제의 신사참배를 통한 천황제 이데올로기 강요라는 민족말살정책에 대항하였다는 점에서 신사참배거부운동의 민족운동적 의의는 매우 높은 것이다.
한편 한국교회의 이같은 형극의 시기에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보여준 대응 태도도 다양하였다. 말기에 '일본기독교조선교단' 통리사에 임명된 바 있는 김관식 목사는 해방 후 이 시기를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대응 태도를 분류하고 있다.
전시(戰時)에는 신사참배문제와 일제의 전쟁협력문제를 중심으로 교회 지도자들에게 심각한 시련과 시험이 닥쳐왔다. 이들을 네 가지 그룹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끝까지 일제의 요구에 저항하다 투옥되고 고문을 당하고 죽기까지 한사람들과 둘째,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교회를 떠나 은퇴하거나 다른 일을 한 사람들과 셋째, 그다지 달갑게 인정하지도 않고 강하게 반대하지도 않는 신중한 태도를 취하면서 고난과 상실을 최소한도로 줄이도록 교인들을 지도해온 사람들, 마지막으로 많건 적건 간에 일제에게 협력한 사람들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비교적 정확한 분류라 하겠다. 첫 그룹을 '순교적 신앙'으로 믿음을 지킨 적극적인 신앙인 이었다고 한다면 둘째, 셋째 그룹에 속한 사람들은 소극적 신앙인에 해당된다 하겠으나 험악한 시대에 개인 신앙만을 고수한다는 것도 굳은 믿음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문제는 마지막 그룹이다. 표현을 매우 완만하게 하고 있으나 결국이 그룹에 속한 사람들이 '회절'의 오점을 남긴 경우에 해당된다. 더욱이 위의 세 그룹에 속한 사람들보다도 넷째 그룹에 속한 '신자'들이 훨씬 더 많았으며 또한 당시교계 지도급 인사들 대부분이 여기에 속한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의 아픔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이상과 같은 수난과 회절의 여정을 걸으며 식민지 족쇄에 매여 있던 1930~1940년대 한국교회의 '안쓰러운 모습' 속에서 과연 새문안은 어떠했을까? 즉 새문안이 이 시기 감내해야 했던 교회적인 수난과 고통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으며 '회절'의 모습은 없었는지 그리고 이러한 형극의 시대를 새문안인들은 어떻게 헤쳐나갔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다시 서는 새문안(1945~1954)
815해방과 한국교회
8.15해방은 한국 현대사의 새로운 지평을 연 민족사적 사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사적 사건이기도 하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사건에 비견할 만하기 때문이다. 출애굽은 이스라엘의 민족적 해방을 의미하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역사에 개입하심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신 신앙적 사건이었다.
이처럼 출애굽이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노예생활로부터 해방시킨, 그 민족의 해방사건이자 하나님의 신앙적 사건이었듯이 한국 기독교인은 8.15 해방을 민족 해방의 사건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으로 인식하여 왔다. 해방을 가리켜 도둑같이 왔다 또는 하늘이 준 떡이었다 라고 말하는 것도 이 같은 인식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절망에 빠져 있던 우리 민족이 하나님의 은총에 힘입어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구속사적(救贖史的) 인식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익히 아는 대로 8·15 '해방'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하고 곧 '민족분단'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특히 이 와중에 발발한 6·25전쟁은 민족분단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으며 이 전쟁으로 우리 민족과 한국교회는 지울수 없는 비극과 상처를 입어야 했다. 이 장에서는 이상과 같은 민족사적 시련기 속에서 한국교회와 새문안이이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해 나갔는가를 살펴보려 한다.
북한교회의 재건과 수난
식민지 시대 일제의 탄압 아래서 갖은 고난을 당하였던 한국교회는 해방을 맞음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시작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당시 한국의 정치·경제·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그러하였듯이, 기독교계 또한 일제에 협력한 사람들과 이에 저항한 사람들 사이에 첨예한 대립과 갈등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상호 비방과 분열은 해방에도 불구하고 장차 한국교회가 감수하여야 할 시련의 서곡이기도 하였다.
일찍이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항거하여 투옥되었다가 해방을 맞은 이른바'출옥 성도'들은 평양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에서 모임을 가진 후 1945년 9월 20일경 다음과 같은 5개 항의 한국교회 재건 원칙을 결정하였다.
1. 교회의 지도자들은 모두 신사참배를 하였으니 권징의 길을 취하여 통회 정화한 후 교역에 나갈 것,
2. 권징은 자책이나 자숙의 방법으로 하되, 목사는 최소한 2개월간 통회 자복할 것
3. 목사와 장로의 휴직 중에는 집사나 평신도가 예배를 인도할 것.
4. 교회 재건의 기본 원칙을 전국에 전달하여 일제히 실행하게 할 것.
5.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복구 재건할 것.
요컨대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감내하며 신사참배 강요를 뿌리친 출옥 성도들은 신앙의 양심을 저버린 목회자들의 참회를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가 기성 교회 지도자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그들에게도 할 말이 있었던 것이다 신사참배를 결의하였던 장로회 제27회 총회의 총회장 홍택기(洪澤驥) 목사는 "옥중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고생한 사람이나 그 고생은 마찬가지였고 교회를 버리고 해외로 도피생활을 했거나 혹은 은퇴생활을 한 사람의 수고보다는 교회를 등에 지고 일제의 강제에 할 수 없이 굴복한사람의 노고가 더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친일세력의 청산은 해방 이후 당면한 급선무였음에도 불구하고 해방공간의 정국(政局)이 그러했듯 한국교회 역시 지도부가 여전히 일제에 협조하였던 사람들로 장악되어 있었다. 따라서 출옥 성도들은 그 지도부에서 소외되었고, 한국교회의 참회와 정화는 쉽게 이루어질 수 없었다.
한편 1945년 12월 1일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는 평안도·함경도·황해도 지방의노회 대표들이 모여 「북한오도연합노회」(北韓五道聯合老會)를 서둘러 조직하였다. 이는 해방 이후 종전의 각 교회와 노회가 재건의 과정을 밟았으나 남북 분단으로인하여 전국교회를 묶는 총회의 기능이 마비되자 북한교회만이라도 하나로 묶어 총회 기능을 대행하고 날로 가중되는 공산 정권의 핍박에 대처해 나가려는 의도에서였다. 김진수(金珍洙, 연합노회장), 김철훈(金哲勳), 이유택(李裕澤), 김길수(金吉洙) 목사 등이 중심이 된 연합노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결의를 하였다.
1. 북한오도연합노회는 남북통일이 완성될 때까지 총회를 대행할 수 있는 잠정적 협의기관으로 한다.
2. 총회의 헌법은 개정 이전의 헌법을 사용하되 남북통일 총회가 열릴 때까지 그대로 둔다.
3. 전 교회는 신사참배의 죄과를 통회하고 교직자는 2개월간 근신할 것.
4, 신학교는 연합노회 직영으로 한다.
5, 조국의 기독교화를 목표로 독립기념전도회를 조직하여 전도교화(敎化)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한다.
6, 북한교회를 대표한 사절단을 파견하여 연합국 사령관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기로한다.
이어서 연합노회에서는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개정되기 이전의 장로교 헌법을 복구하여 사용하는 한편 김인준 목사로 하여금 신학교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한국의 기독교화를 위하여 「독립기념전도회」를 조직, 전재선(全載先) 목사에게 책임을 맡기는 한편 증경 총회장 이인식(李仁植) 목사와 김양선(金良善) 목사를 사절단으로 파견하여 남한교회 및 임정 요인들과 접촉하도록 하였다. 한편 북한 교인들은 보다 조직적인 단체를 만들어 시국에 대처하려 하기도 하였으니, 기독교사회민주당(基督敎社會民主黨), 기독교자유당(基督敎自由黨), 조선민주당(朝鮮民主黨) 등이 이에 속한다.
「기독교사회민주당」은 1945년 9월 18일 신의주(新義州) 제일교회(第一敎會)의 윤하영(尹河英) 목사와 제이교회(第二敎會)의 한경직(韓景職) 목사가 중심이 되어 평안북도의 기독교인들을 기반으로 조직되었다. 이 단체는 한국 최초의 기독교 정당으로서 민주주의 정부 수립과 기독교 정신에 의한 사회 개량을 정강(政綱)으로 삼고 있었다.
「기독교자유당」은 1945년 11월 김화식(金化湜) 목사가 평북 정주(定州)의 옥호동약수터에서 뜻을 같이하는 기독교인 동지들을 규합하여 「기독교자유당」의 결성을다짐 하였으나 그 후 여러 가지 장애로 인하여 정식으로 조직하는 단계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47년 5월 하순경에 결성될 예정이었으나 사전에김화식 목사를 비롯한 관련자 40여 명이 검거됨으로써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단체 역시 민주주의 정부의 수립을 목적으로 계획된 것으로서 「기독교사회민주당」과 동일한 맥락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한편 이들보다 규모와 영향이 컸던 것은 1945년 11월 3일에 조직된 「조선민주당」이다. 조만식(曺晩植)과 오윤선(吳胤善) 두 장로가 주축이 된 이 단체는 결성 3개월 만에 50만 명이 가담하였고, 그 지도층은 주로 기독교 지도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북한교회는차차 재건의 기틀을 닦아 나갔으나, 공산 정권이 들어서면서 탄압과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처음 김일성(金日成)을 중심으로 한 공산 정권은 북한 기독교의 영향력을 의식하여 이를 회유·이용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이에 대한 탄압으로 선회하였다. 비록 저들은 표면적으로는 신앙과 예배의 자유를 인정하는 듯하였으나 실제적으로는 그렇지 못하였다. 즉 교회의 토지를 몰수하거나 집회를 방해하고 교계 지도자를 체포하는 등 줄기차게 교회를 박해하였던 것이다.북한 정권이 교회를 탄압한 예로는 우선 평양 장대현교회 사건을 들 수 있다. 1946년 3월 1일을 기하여 장대현교회에서 기독교 단독으로 3·1절 기념예배를 드리려고 하자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이름으로 이를 불허했으며, 이에 항의하는 교역자60여 명을 체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월 1일 장대현 교회에서는 10, 000여 명의신도들이 모여 기념예배를 드렸다. 이어 평양 창동교회(倉洞敎會)의 황은균(黃誤均)목사의 인도로 그 자리에서 한국의 완전 독립을 위한 기도회를 시작하자내무서원들이 난입하여 황 목사를 연행하였다. 이에 교인들은 태극기와 십자기를 들고 시가행진을 벌이며 이에 항의하는 한편 교회에서 철야 단식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또한 많은 교인들이 체포되었다.
이와 비슷한 사건은 의주에서도 일어났다. 인민위원회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의주동교회(義州東敎會)에서는 수천 신도가 참석하여 예배를 드리자 저들이 난입하여 강단을 유린하고 김석구(金錫九) 목사를 체포한 것이다. 이에 의산노회장 김관주(金冠柱) 목사가 신도대회를 소집하고 성토대회를 감행하였으나 공산 정권은 이를 빌미로 더욱 혹독한 교회 박해를 시작하였다.
이밖에 '주일선거' 문제도 중요한 기독교 탄압사건의 한 예였다. 공산 정권은 1946년 11월 3일을 북조선 도·시·군 인민위원회 선거일로 정하였는데, 이날은 주일이었다. 저들은 교회의 반응을 살펴보고 이를 교회 탄압의 빌미로 삼으려고 의도적으로 주일을 선거일로 정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북한교회는 10월 20일 이에 항의하는 결의문을 제출하였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성수(聖守) 주일을 생명으로 하는 교회는 주일에는 예배 이외의 여하한 행사에도 참여하지 않는다.
2. 정치와 종교는 이를 엄격히 구분한다.
3. 교회당의 신성을 확보하는 것은 교회의 당연한 의무요 권리이다. 예배당은 예배 이외에는 여하한 경우도 이를 사용함을 금지한다.
4. 현직 교역자로서 정계에 종사할 경우에는 이를 사용함을 금지한다.
5, 교회는 신앙과 집회의 자유를 확보한다.
이상과 같은 결의를 한 북한교회는 신앙과 양심에 따라 11월 3일 실시된 북조선 도·시·군 인민위원회 선거를 보이콧하고 투표에 불참하였다. 이후 북한교회와 교인들이 공산 정권에 의해 간섭과 탄압을 받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한편 김일성의 외척이며 목사인 강량욱(康良煜)은 「조선기독교도연맹」(朝鮮基督敎徒聯盟)이라는 친공·어용 단체를 만들어 모든 교회로 하여금 이에 가입할 것을 강요하였다. 1946년 10월 조직된 「기독교도연맹」은 처음에는 교역자의 가입만을 요구하였으나, 1948년부터 평신도들의 입회도 강요하기 시작하면서 이후 면·군·도단위의 조직을 완성한 후 1949년에 각 도 대표들로 이른바 「기독교도연맹총회」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평양의 교역자들 중 여기에 참여하려는 사람이 별로 없자 저들은 황해도 인민위원회 간부인 목사 출신 김응순(金應珣)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한편 박상순(朴尙純)·김익두(金益斗) 목사 등을 포섭하여 선전의 전면에 내세웠다. 이어서 저들은 「오도연합노회」에 대항하여 아래와 같은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1, 우리는 김일성 정부를 절대 지지한다
2. 우리는 남한 정권을 인정치 않는다.
3. 교회는 민중의 지도자가 될 것을 공약한다.
4, 그러므로 교회는 선거에 솔선 참가한다.
이같은 북한 정권의 정책은 교회 박해를 넘어 신학교에까지 미쳐 왔다. 1946년9월 창립된 감리교의 성화(聖化)신학교에는200여 명이, 장로교의 평양 장로회신학교에는 모두 600여 명의 학생들이 등록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산 정권은 이들 신학교의 정원을 각각 60명으로 줄이고 1950년 3월에는 마침내 이들을 통합하여 정원 120명의 '기독교신학교' 교명을 변경시켰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도 연맹의 김응순을 교장에 일방적으로 임명하여 학교 운영에 관한 전권을 부여하였다.
한편 「기독교도연맹」에 가입하지 않는 교역자들은 가차없이 검거하였다. 따라서 6.25이전까지는 기독교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은 교역자들은 거의 투옥되었고 교회는 공산주의 이념과 사상을 고취시키는 정치 선전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때 간신히 화를 면한 교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월남하거나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은 지하로 숨어버림으로써 북한교회는 큰 위기를 맞기에 이르렀다.
남한교회의 재건과 분열
해방을 불과 한 달도 남겨 놓지 않았던 1945년 7월, 정동교회에서는 「일본기독교조선교단」(日本基督敎朝鮮敎團)이 조직되었다. 이는 일제 총독부의 종교통합정책에 따른 것이었으면, 장로교와 감리교, 구세군등 개신교 교파 교회들이 이에 모두 통폐합되었다. 따라서 당시로서는 유일한 교회조직이었다. 또한 그 임원들이 모두 총독부로부터 임명을 받은 사람들이었으므로 친일적인 성향을 띨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해방을 맞고서도 이들은 이 단체를 계속 존속시키려 하였다. 비록 일제에 의한 타율적인 통합이긴 했지만 한국교회가 하나로 통일되 만큼 이를 새삼 분리할 필요가 있겠는가라는 명분과 해방 이후 당연히 교권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교단 지도자들이 여전히 교회의 주도권을 쥐고 싶어했던 점, 그리고 해방이후 한국 정치를 주도할 사람들이 대부분 기독교인이라는 판단하에 그들을 적극 후원할 수 있는 강력한 조직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리하여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의 통리사였던 김관식을 비롯하여 장로교측에서는 새문안의 김영주·송창근(宋昌根) 및 김종대(金鍾大)·함태영(威台永) 등이, 감리교측에서는 강태희(姜泰熙)·김영섭(金永燮)·심명섭(沈明燮) 등이 주축이 되어 일본기독교조선교단 이라는 이름을 조선기독교단(朝鮮基督敎團)으로 바꾼 후 그 해9월 8일 새문안교회에서 이른바 '남부대회'(南部大會)를 소집하였다. 그러나 이 대회가 시작되자 변흥규(卞鴻奎)·이규갑(李臺甲) 등을 비롯한 수십 명의 감리교 대표자들은 감리교의 재건을 선언하고 퇴장함으로써 대회는 난관에 봉착하였다. 그러나 남부대회를 명실상부한 교회 통치 조직으로 개편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 그 해 11월 27~30일 정동제일교회에서 '조선기독교남부대회'가 열리게되었다.
이때 대 회장으로는 김관식, 부대회장으로는 김영섭 목사가 선출되었으며, 우리 교회의 김영주 목사는 전도부장에 선임되었다. 이 대회에서는 일제시대의 순교자 32명에 대한 '순교자 추도회'를 가진 뒤 다음과 같은 사업을 하기로 결의하였다.
1. 조선독립 촉성(促成)을 위하여 3일간 금식기도키로
2.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절대 지지키로
3. 대회장 방미(訪米)시는 물심양면으로 협조키로
4. 선교사 내방 환영의 편지 발송키로
5. 38선 문제와 조선완전자주독립키 위하여 미국 교인에게 여론을 환기할 것과 트루만 대통령께 진정키로
6. 제주 한림(輪林)교회 구제키 위하여 성탄시 연보키로
7. 1946년 1월 1차주일을 출판부주일로 지키기로
8. 1946년 2월 1차주일을 청년주일로 지키기로
9. 1946년 3월 1차주일을 신학교주일로 지키기로
10, 폐쇄되었던 교회를 속히 문을 열기로
11, 기관지 발행키로
12, 유년 및 장년공과 발행키로
13. 각 교구회(敎區會)마다 종교교육강습회 개최키로
14. 전도목사 2인 채용하되 예산은 감사연보 2할을 수입(收入)귀로
15, 찬송가 합편발행키로
16. 성서공회 및 기독교서 회와 연락키로
17. 종전 기독교 계통의 학교는 기독교계로 환원할 것이며 성경을 정과(正課)로 편입토록 교섭키로
18. 중앙방송국에 교섭하여 일요강화(日曜講話)키로
19. 형무소에 목사를 파견 전도키로
이들 사업 중 가장 먼저 이루어진 것은 기관지의 발행으로, 1946년 1월 17일 <基督敎公報>라는 주간 신문이 창간되었다. 이날 실린 창간사를 보면 해방 이후 혼란을 수습하고 '하나된 교회'를 만들려 한 해방 직후 한국교회의 의지가 잘 나타나 있다.
조선의 교회는 새로운 지평을 향하였다. 그것은 '하나'로써 한다. 구주도 하나요 신앙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인 우리는 교회의 형태도 하나라는 것이다. (중략) <기독교공보>는 이 새로운 지평을 향하야 등정한 조선기독교회의 전령사(傳令使)이다.
그러나 이같이 '하나'되기를 천명했던 이 뜻은 남부대회가 있은 지 얼마 안되어 시련을 맞게 되었다. 우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9월 8일 우리 교회에서의 집회때 불만을 품고 퇴장한 감리교의 혁신 세력이 12월 17일 「감리교유지위원회」를 결성하고 '감리교 재건'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장로교 내부에서도 1945년 11월 3일 출옥한 주남선(朱南善) 목사를 노회장으로 하여 경남노회가 재건되었고, 12월 5일에는 배은희(裵恩希) 목사를 노회장으로 하여 전북노회가 재건되었다. 더구나 북한교회에서는 통폐합 이전의 장로교회 헌법에 따라 「이북오도연합노회」가 구성되어 있었고 해방 직후 월남한 이북 출신 교역자들도 남한교회만의 층회 구성을 반대하고 있었으므로 남부대회는 '남한의 친일 교단 잔존 세력'의 모임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6년 4월 30일부터 5월 2일까지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2차조선기독교회 남부대회에서 대회장을 김관식 목사에서 배은희 목사로 바꾸면서 1차 대회에 비해 그조직 또한 축소되어 '본 대회 성격을 재토정(再討定), 즉 각교파는 각자 성격대로 활동키로' 결정함으로써 사실상 남부대회는 해체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한편 그 이튿날인 5월 3일 새문안교회에서는 남부대회에 참석했던 목사와 장로 60여 명이 모여 교단 재건을 협의했는데, 이 자리에서는 1) 가칭 「조선예수교장로회남부노회연합회」를 발족시키며, 2) 1946년 6월 11일 그 창립 총회를 새문안교회에서 열기로 결의하였다. 결국 장소만 승동교회로 바뀐 채 예정대로 열려 총회장에배은희, 부총회장에 함태영, 총무에 김관식, 서기에 김종대, 회계에 우리 교회 김영주 목사 등을 임원으로 선출하여 남부대회를 실질적으로 계승하려 하였다. 이어1947년 4월 대구제일교회에서 열린 제2회 남부총회에서는 1942년 일제의 강제에의해 해체되었던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1회 총회를 계승하여 제33회 총회(711회 남부총회를 제32회 총회로 인정하고)로 개회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로써 장로교회는 해방 전후 치욕의 역사를 '형식적으로나마' 정리하고 교파 교회로 다시 환원되었다. 이처럼 남부대회를 통한 교단 통합이 성공을 거두지 못한 원인을 아래와 같은 지적에서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교회 자체의 자유 통합이란 의미의 '하나'와 일제의 강압에 의한 강제 통합의 '하나'를 가치판단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이왕 하나가 되었으니 '하나'를 유지해 보자는 것은 일제 잔재를 유지해 보자는 인상을 준다는 비판을 씻을 수 없었다.
사실 남부대회의 조직과 해산 과정을 보면, 과거 일제하에서 저지른 한국교회의 잘못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절차를 간과(看過)한 채 일제하에서 기득권을 유지해왔던 인사들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정당성을 갖기에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남부대회의 의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비록 교회 정치기구로 유지되지는 못했지만 이후 한국교회의 교파연합운동이 가능할 수 있도록 이것이 모체가 되었던 것이다. 즉 교파 교회흑 존재를 인정하면서 교파연합운동 기구로 존속했던 일제시대의 「조선 기독교연합공의회」(朝鮮基督敎聯合公議會)를 재건하는 형태로 1946년 9월 3일 「조선기독교연합회」(朝鮮基督敎聯合會)가 창설되었다. 회장에 김관식 목사, 총무에 임영빈(任英楮) 목사, 간사에 엄요섭(叢堯燮) 목사가 선출되었으며 남부대회에 관여했던 장로교, 감리교 및 구세군, 성결교까지 가세함으로써 이 연합회는 '에큐메니칼'(Ecumenical) 운동체로 발전되었다. 오늘날「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의 모체가 된 이 연합회는 1947년 부활절에 서울남산에서 새벽연합집회를 개최하였으며, 1949년 미군 철수를 반대하는 '반공기독교총궐기대회'(反共基督敎總蹶起大會)를 서울운동장에서 개최하기도 하였다.
비록 남부대회의 소멸로 교단 통합의 희망은 사라지고 각 교파로의 환원이 이루어졌지만, 어차피 교파 교회로 시작된 한국 기독교계인지라 그것이 그렇게 큰 문제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장로교회는 새로운 시련을 맞아 그 재건에 적지 않은 차질을 빚었다. 그것은 신사참배문제 또는 신학적 노선상의 갈등과 대립끝에 결국 예장, 기장, 고신파로 분열되고 만 것이다. 이같은 분열이 기정 사실화 된 것은 1950년대에 들어와서 이지만, 그 조짐은 이미 해방 직후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우선 고신파의 분립 배경은 한상동(韓尙東), 주낭선(朱南善) 목사 등 신사참배 거부자들의 기성 교회에 대한 불신과 그들에 대한 기성 교회의 냉대가 주된 원인이었다. 그들은 옥에 갇혀 있을 때부터 교회의 재건과 쇄신을 위한 방안을 구상하고 있었다. 즉 해방이 되면 수도원을 건설하고 신학교를 재건하며 대 부흥운동을 전개하려는 계획을 세워 놓은 것이다.
따라서 한상동 목사는 해방을 맞아 출옥하자 자신의 시무교회인 평양 산정현교회를 중심으로 경남노회장을 맡고 있던 주남선 목사와 손양원 목사, 그리고 만주 동북신학교 교수를 지낸 박윤선(朴允善) 목사 등과 함께 독자적인 신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1946년 5월 진해(鎭海)로 내려가 신학교 설립 기성회를 조직하고 6월부터 3개월간 하기신학강좌를 개최하였으며, 이것이 바로 고려신학교 설립의 초석이 되었다. 당초에는 한국 신학계의 권위자 박형룡(朴亨龍) 박사를 교장으로 추대하려 하였으나, 중국 봉천(奉天)에 있던 그의 귀국이 늦어지자 9월 20일 박윤선 목사를 교장으로 하여 이른바 고신파 신학교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런데 그 해 12월에 열린 경남노회 제48회 정기노회에서는 고려신학교 인정 결의를 재론하고 신학생 추천을 취소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크게 반발한 한상동 목사는 "불순한 태도를 고침이 없이 그대로 나아가는 경남노회가 바로 설 때까지 탈퇴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고, 이에 동조하는 경남노회 소속 67개 교회가 그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이듬해인 1947년 3월 열린 임시노회에서는 노회장 김길창목사 이하 전 임원의 권고 사직을 단행하는 한편 사태 수습을 위해 한상동 목사를 비롯한 출옥 성도들의 복귀를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그 결과 제49회 노회에서 한상동 목사가 탈퇴 선언을 취소함으로써 사태는 일단 수습의 길을 찾았다. 한편 이 해 9월, 박형룡 박사가 귀국하여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이 학교를 전국교회를 배경으로 한다는 한상동 목사의 다짐을 받고 그 직을 수락한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한상동 목사와 운영 방향을 둘러싼 갈등이 생기자1948년 4월 교장직을 사임하고 서울로 올라가 새로운 신학교 설립을 계획하였다. 박형룡 박사가 고려신학교를 떠나자 경남노회는 다시 동요하였다. 1948년 5월에 열린 제34회 장로회 총회에서는 경남노회와 고려신학교의 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면서 신학생 추천 취소를 결의하였다. 이어 9월과 12월에 열린 경남노회에서 고려신학교의 인정을 취소함으로써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그리고 1950년 4월에 열린 총회마저 경남노회 문제와 조선신학교 문제로 유회(流會)되고 말았다. 그 후 6·25 전쟁 중인 1951년 5월 속개된 제36회 총회에서 역시 고려신학교측 대표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고려신학교를 배척하였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고려신학교측은 한상동 목사를 회장으로 하는 경남법통노회(慶南法統老會)를 조직하여 분립함으로써 경남노회와의 결별을 선언하였다. 이들은 이듬해 9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노회라는 별도의 교단을 구성하였는데 이에 참여한 교회는 부산·경남 지역의 312개 교회였다. 그 후 경남 외에 경기·전라·경북노회가 조직되고 1956년 무렵 교회수는 565개에 이르렀다.
장로교 기장측의 분열도 이전부터 이미 신학교육의 방향을 둘러싸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일제하에서 보수적인 선교사들이 주도하던 평양 장로회신학교가 신사참배문제로 인하여 1938년 문을 닫게 되자 한국인들에 의한 신학교육을 계속하기 위하여 1939년 제28회 장로회 총회에서는 조선신학원(朝鮮神學院)의 설립을 결의하였다. 이를 위하여 우리 교회 김영주 목사를 비롯하여 송창근, 채필근, 함태영 목사등이 중심이 되어 사업을 추진하였고, 마침내 1940년 4월 19일 승동교회 강당에서 그 문을 열었다. 그리고 김재준, 송창근, 윤인구 등이 교수로 청빙되었다.
해방 후 남한의 유일한 신학교였던 조선신학원은 '조선신학교'로 개칭하고 남부총회에 직영을 청원하여 인준을 받고 신학교육을 계속하였다. 그런데 "조선신학교(朝鮮神學校)는 자유주의 신학으로 출발하여 자유주의 신학의 발전을 수(遂)하고 마침내 자유주의 신학의 확립을 달성하였다"는 평가와 같이 여기에서는 이전의 신학에 비하여 자유주의적인 신학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보수적인 신앙교육을 받아왔던 신학생들 중 일부가 성서에 대한 고등비평을 하는 김재준(金在俊)목사의 강의 내용에 불만을 품고 총회에 진정서를 제출한 사건이 일어났다. 즉1947년 4월 조선신학교 학생 51명이 "우리가 유시(幼時)로부터 믿어오든 신앙과 성경관이 근본적으로 뒤집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라며 제33회 총회에 진정서를 제출함으로써 조선신학교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그러자 총회에서는 심사위원회를 구성하고 김재준 교수의 진술서를 받고 면담을 하였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그는 성경은 구속의 진리를 계시함에서는 무오이지만 결코 자연과학이나 역사과학 부문에 있어서까지 무오한 것은 아니라는 답변을 하였다 그러자 심사위원회는 "김 교수는 성경무오(聖經無誤)의 교리를 부인한다"는 보고서를 전체 이사회에 제출하였고 김 교수도 자신의 성서관을 변호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김 교수의 진술서를 검토한 박형룡 박사는 "김 교수의 진술서에 나타난 성경관은 파괴적 고등비평의 성서관이요 교리문제에 대한 변명은 신신학의 교리관"이라고 비판하였다. 결국 이러한 분규는 1948년 총회에서 조선신학교 개혁안이 제기되었으나 조선신학교측 이사들에 의하여 부결되고 그 해 6월 보수적 신학교 재건을 준비하던 신학문제 대책위원회측 인사들이 박형룡 박사를 교장으로 새로운 장로회신학교를 서울남산에 세웠고 이듬해 총회에서 이 신학교를 총회 직영으로 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장로회신학교와 조선신학교의 합동안을 마련하였으나 조선신학교측의 김재준 교수를 제외시키려는 교수진 구성 문제로 결렬되고 말았다. 이 문제로 장로회 총회는 분규를 계속하다가 전란 중인 1951년 제36회 속회 총회에서 장로회신학교 직영과 조선신학교 인가를 모두 취소하고, 그 해 9월에 대구에 새로운 총회신학교를 세웠으며, 이듬해 제37회 총회에서는 조선신학교 출신의 교역자 자격 거부와 김재준 교수의 목사 면직을 결의하였다. 이에 항거하는 황희섭 목사등 35명의 총대들이 1952년 5월 2일 총회의 결의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이를 지지하는 이들이 분립하여 9월 17일 장로회 총회 호헌대회(護憲大會)를 열어 새로운 교단 조직 준비를 하였다. 그리하여 이듬해 한국신학대학(조선신학교의 후烈강당에서 별도의 제38회 총회를 갖고 김세열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하여 새로운 교단으로 출범하였으며, 다음해 총회에서는 '한국기독교장로회'로 개칭하고 박용희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하였다. 기장측의 교세는 1955년까지 경기노회를 비롯한 12개 노회와 568개 교회, 그리고 신도 20,000여 명에 달했다. 이러한 대립이 과연 불가피하였는가의 문제는 쉽게 단정할 만한 것이 아니다. 세속적인 이권이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신학적 갈등이라면 그 근본 신앙을 달리하지 않는 한 있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분열로까지 사태가 악화된 것이 이후 장로교회의 발전에 어느 정도 장애가 되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해방 직후 한국교회가 갈등과 대립 구조에서 상호 협조 통합의 길을 걸었다면 한국교계는 물론 당시 혼란했던 해방 정국을 풀어가는 데 매우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당시 남한교회는 북한교회와 달리 거의 제한없는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이는 미군정 하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 정계를 대표하는 거물급 정치인, 곧 이승만·김구·김규식 등이 모두 기독교인이었던 점도 한 이유라 하겠다. 해방 직후 기독교를 표방한 각종 정치 사회 단체들이 비온 뒤 죽순 자라듯 생겨났던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기독교신민회」(基督敎新民會긴) . 「독립촉성기독교중앙협의회」(獨立促成基督敎中央協議會) . 「기독교민주동맹」 (基督敎民主同盟) . 「그리스도교연맹」(聯盟) 등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겠다. 기독교인의 정치 참여 현상은 1948년 이승만이 집권하면서 더욱 두드러졌다. 대통령 이승만은 그 해 5월 31일 국회 개회식에서 이윤영(李允榮) 목사로 하여금 개회기도를 하도록 요청하였으며, 이승만 자신이 대통령에 취임할 때 기도로 하나님께 호소한 예에서 보듯 한국교회와 기독교 세력은 해방을 맞이하며 과거 자신의 잘잘못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신생국 대한민국'의 새로운 시대 전신과 지도 이념으로서의 대우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국회의원 중 약 40명이 기독교인이었으며, 미군정이래 자유당 집권까지 중앙 정부 각 부처에는 약 10%정도의 기독교인이 있었다. 흔히 해방 이후 초대 정부(자유당 정권)를 '기독교 정권'이라 지칭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새롭게 발전해 나간 새문안(1955~1970)
강신명 목사의 이력과 청빙 경위
새문안에 강신명(姜信明) 목사가 정식으로 부임한 것은 1955년 12월 1일이다. 이날로부터 시작하여 강 목사는 1985년 소천(覆天)하기까지 30여 성상(星狀)을 새문안과 함께 하게 된다. 1세기의 새문안 역사에서 가장 오랜 기간 재임하였기에 그가 새문안에 남긴 족적은 매우 크고 넓다. 그의 재임기간에 있었던 그 많은 일들을 논하기에 앞서 우선 강 목사의 이력과 부임하기까지의 경위를 알아보기로 한다. 소죽(小竹) 강신명 목사는 1909년 경북 영주(榮州) 평은면(平恩面) 천본리(川本里)에서 강병주(姜炳周)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강병주 목사는 일제시대 한글보급에 열정을 보인 찬같 목사'로 유명한 분이었으며 1934년 김영주 목사의 이른바·창세기 모세저작 부인사건'을 제23회 총회에 제기한 일로도 유명하다. 일찍이 개화(開化)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강 목사는 수학(修學) 경력이 매우 다양하였다. 중등 교육 과정만도 평양의 숭실중학(崇實中學)과 공주(公州) 영명학교(永明學校) 그리고 서울의 배재학교(배재학교)를 거쳐 최종적으로는 대구의 계성중학교(啓星中學被)를 졸업하였다. 이같이 중등 과정을 평양, 서울, 대구 지역에서 수료한 남다른 학력상의 편력은 이후 그의 목회활동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다양한 인맥(人脈)과 지맥(地脈)으로 얽혀 있는 한국 교계의 지도자로 강목사가 부상하기까지는 그의 이상과 같은 다양한 경력이 훗날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중등 과정을 마친 후 그는 1934년 숭실전문학교(崇賁專門學餃) 문과를 졸업한 후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1938년(33회)에 졸업하였다. 이어 그는 1940년 일본신학교에 유학하여 그곳에서 구마노(能野義孝) 교수와 무라다(村田) 교수 밑에서 '현재 종말론'(現在終末論)과 특히 '에큐메니칼 신학'을 공부하면서 교회일치와 연합운동에 대한 신학적 접근을 하게 되었고 이는 이후 목회 현장에서 다양한 형태로 실천에 옮겨졌다.
강 목사의 에큐메니칼 신학에 대한 이론과 실천의 의지는 1953년 프린스톤(Prinseton)신학교에서 교회사와 종교교육을 전공하면서 더욱 분명해졌다. 강 목사는 그곳에서 스코틀랜드장로교 정신의 화신(化身)인 존 멕카이 박사의 '초교파적 신학'(Ecumenical Theology), 즉 '세계교회운동의 원리'에 접하면서 이에 대한 넘치는 정열과 확신을 안고 귀국했던 것이다. 뒤에서 언급하거니와 강 목사의 경우 그가 목회자로서 혹은 한국 교계 지도자로서 누구보다 폭넓게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상에서 보듯 그의 다양다기(多樣多技)한 수학(修學) 편력과 인맥 그리고 그의 목회입장이 '에큐메니칼적 신학'에 기초하고 있었던 점과 깊은 관련성이 있다 할 것이다. 새문안 당회가 이상과 같은 신학배경과 인맥을 갖추고 있던 강 목사에게 강단을 맡긴 것은 아래와 같은 이유에서 였던 것 같다. 우선 그의 목회철학인 '에큐메니칼 정신'이 바로 새문안 정신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의 부임으로 과거 식민지 시대에 다소 위축되었던 새문안의 창립정신이 되살아나고 이를 통해 점차 한국 모교회로서 의 본래의 면모와 위상을 살려나가게 될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새 문안과의 '인연'이 그렇게 순조롭게 진행된 것만은 아니었다.
강 목사가 새문안에 오기 전에 시무하던 교회는 영락교회(永樂敎會)였다. 강 목사는 영락교회에서 한경직(韓景職) 목사와 동사목사(同事牧師)로 시무하던 중 장로회헌법 개정에 따라 '동사목사제도'가 폐지되면서 그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때에 마침 우리 교회에서도 동사목사제의 폐지에 따른 최화정 동사목사의 거취문제를 놓고 교회 안에 혼선이 있었다. 앞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부 제직들은 최 목사의 유임을 원하기도 했지만 당회는 최 목사의 사임은 불가피하다고 판단, 후임 목사 청빙을 서둘렀다.
처음 당회에서 청빙 목사로 거론됐던 인물은 강신명 목사한사람만이 아니었다. 1955년 10월 16일 당회에서 거론된 청빙 후보 목사는 강 목사 외에도 황은균(黃驗均) 목사, 백리언(白理彦) 목사, 김세진(金世鎭) 목사 등 4인이 추천되었다. 그러나11월 7일 당회에서는 위의 4인 중 강 목사를 청빙하기로 가결하고 이를 위한 당회교섭위원으로 오인명(吳仁明)·김대보(金大寶)·고응진(高隱振) 장로 등 3인이 선정되어 교섭에 나서게 되었다. 강 목사는 이 제의를 바로 받아들였다. 이에 당회는 그 달 22일 회집되는 제65회 경기노회에 강 목사의 청빙수속을 밟기로 가결하는 등 신속하게 진행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인사문제에는 늘 잡음이 따르듯 이때도 다소 문제가 생겼다. 강 목사의 청빙이 당회에서 가결되기 바로 전날에야 비로소 최화정 목사의 사면이 확정된 일이며 특히 최 목사의 유임을 주장해 온 일부 제직들이 경기노회(販회)에 진정서(陳情書)를 제출한 일과 이들이 강 목사 부임과 동시에집사 선임에서 제외된 점 그리고 이즈음에 일부 교인들이 낮예배를 따로 보았는가하면 아예 이때 교회를 떠나기도 했다.
70주년 기념행사와 교회 지도력 확장
(1) 70주년 기념행사
다소의 우여곡절을 거쳐 부임하게 된 강신명 목사로서는 교회를 안정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한 일이었다. 한 가정이나 나라도 그러하듯 구성원 사이의 동요와 침체가 있을 때는 구성원 모두의 참여를 유도할 만한 공동사업을 추진하게 마련이다.
바로 그 일이 70주년 기념행사였다. 마침 강 목사는 1956년 새해를 맞기 한 달 전에 부임함으로써 교회 창립 70주년이라는 기념비적인 해를 꼭 일 년 앞두고 부임한 셈이다. 따라서 강 목사의 부임 초기의 목회적 관심과 방향은 자연히 이 행사 준비에 맞추어졌다.
새문안은 교회 창립 70주년 행사를, 해방 이후(1945~1955) 혼란한 정국과 잦은 목회자 이동 등으로 침체된 교회를 새롭게 세우는 기회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해 침체되던 교회 분위기에 활기를 불어넣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모교회라는 입장에서 새문안의 위상을 재정립할 수 있는 기회로 삼으려 했다. 따라서 교회창립 70주년 행사는 어느 행사보다도 전 교인들의 관심과 참여 속에 성대하게 준비되었다.
교회 창립 70주년 행사를 위한 「기념사업연구회」(紀念事業硏究會)가 발족된 것은1956년 2월 당회에서였다. 이 자리에서 연구위원으로 강신명 목사를 비롯하여 노덕순, 오인명, 김병옥, 이봉희 장로 등 5인이 선정되었다. 다음달 당회에서는 이들위원들에 의해 연구 검토된 동위원회의 운영에 관한 제반 사항과 70주년 행사를 위해 사업부(奈業部)와 행사부(行事部)를 두고 다음과 같이 행사를 준비하기로 하였다. 우선 사업부에서는 역사편찬(墮史編纂)과 교회 수축(修築) 그리고 기념전도관(龍念傳這館) 신축 사업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한편 행사부에서는 기념예배와 공로자 표창 그리고 기념촬영과 기념강좌를 개최할 것을 당회에 보고, 결의하였다. 그러나 해를 넘기면서 사업부 대신 역사편찬부와 건축부만을 두기로 하고 담당책임자가 경질되었다. 처음에 역사편찬사업은 오인명 장로가 맡았으나 이후 우리교회 교인이자, 당대 이름있는 문필가였던 주요한(朱耀輪) 성도에게 넘어갔으며 다시 이봉희 장로와 고응진 장로를 거쳐 마침내 서병호 장로가 편찬위원장이 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또 《새문안교회 70년사》의 집필자도 전택부(全澤鳧) 당시 YMCA 총무에 의해 1957년 4월 착수되었다가 여의치 못해 연대 신과대학교수인 한태동(韓泰東) 박사에게 의뢰되어 1958년 11월 25일 간행되었다. 역사편찬사업이란 본래부터 그 범위나 노력이 남달리 요구되는 어려운 작업이다. 이러한 난산끝에 발간된 《새문안교회 70년사》는 한국 개교회 역사서 가운데 최초의 사서(史書)로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 개교회사 서술에 좋은 표본이 되고 있다. 한편 전 교인들의 열성적인 참여와 관심 속에 진행된 '교회 창립 70주년 행사'준비는 향후 새문안의 위상을 일신(一新)시키는 하나의 전기(轉機)와 토대가 되었다.
강 목사 부임 일 년 만에 주일예배 출석 교인이 800명을 넘었으며 등록한 세대수만도 500세대에 이르렀다.l6 이렇게 교세가 전에 없이 늘어나자 당회는 서둘러 노회에 청원하여 1957년 3월 3일 강 목사 위임식을 거행하였다. 이로써 70년의 새문안 역사에서 차재명, 김영주, 그리고 강신명 세분의 위임목사가 탄생하게 되었다. 한편 강 목사를 위임목사에 추대함으로써 70주년 기념행사 준비는 더욱 힘차게 진행될 수 있었으며 교회 조직도 이때었다. 아래의 <표 7-1>은 이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위의 교회 조직표는 강 목사의 재임 제1기(1955~1964)에 해당하는 기간의 새문안 기구표라는 점에서 주목되는데 오늘의 교회 조직과느 많은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우선 성가대와 유치원이 당회 산하에 독립되어 있었으며 제직회 내에 재정부·서무부·사교부·봉사부·경조부 등 5개 부서가 있었고, 주일학교 산하에는 장년부·청년부·중등부·유년부·유치부 등 5개 부가, 그리고 남·여전도회를 비롯해 청년·고등·중등면려회 등 3개 면려회와 소년단이 전도·선교단체로 조직되어 있었다. 오늘의 교회 기구와 조직에 비하면 다소 단조로운 듯 보이나 당시 새문안 교인들은 누구나 이상의 교회 기구와 조직체의 일원이 되어 각 부서에서 헌신적인 봉사화롱을 하며 교회를 섬겼던 것이다.
위의 교회 조직은 1964년 말 대대적인 개편 작업l9이 이루어질 때까지 유지되는데 먼저 강 목사 부임 직후 당회의 모습을 살펴보기로 한다.
1955년 12월 1일 강 목사의 부임 당시 당회는 강 목사를 포함해 임상하(林尙夏), 노덕순(慮德淳), 오인명(吳仁明), 이봉희(李鳳喜), 흥성원(洪成源), 허봉락(許鳳洛), 김대보(金大寶), 김병윽(金幷玉), 이병희(李炳熙), 고응진(高應振) 장로 등 열한 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강 목사 부임 후 교인수가 점차 늘기도 했지만 우선 당장에 한국 교계의 주목을 받으며 준비하고 있던 70주년 기념행사를 위해 당회원의 보강이 절실하였다.
1957년 2월 공동의회에서 서병호, 김영현(金永鉉) 두 분 장로를 뽑은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서병호 장로는 장로 취임 후 바로 70주년기념사업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았으며 김영현 장로 또한 동위원회 서기직을 맡았다. 후술하거니와 이후강 목사가 교회적으로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그리고 당회가 난맥을 보일 때마다 서병호 장로는 이를 중재하는 등 당회를 원만하게 이끌어 가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1957년 9월 27일 오후 2시 거행된 새 문안교회 70주년 기념행사는 새문안의 전교인들은 물론 원근 각지에서 몰려든 하객들 1, 130명이 교회당을 가득 메운 가운데기념예배로 시작되었다. 강 목사의 사회와 서병호 장로의 기념식사 그리고 원득한씨 부인(Mrs. R.F Underwood ; 언더우드 목사의 손녀며느리)의 독창에 이어 이봉희 장로의 교회약사 낭독과 원일한 장로를 비롯한 언더우드 목사후손들에 대한 기념품 증정이 있었고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3대에 걸쳐 목회자를 배출한 가문으로 김광수(金光洙)목사를 초청해 감사장을 수여하였다. 그리고 35년 이상 몸된 교회 새문안을 섬기며 봉사한 교인들에 대한 표창과 기념품 증정식이 있었다. 이선신 권사는 61년간을, 송순명 장로는 장로직만으로도 53년 동안을 새문안을 섬겼던 새문안의 산 증인이었다. 이밖에도 이영애 권사(52년), 박용진 장로(45년), 어윤자 집사(41년) 그리고 김병옥 장로, 이준옥, 권찰, 한인성 씨(각각 40년), 이선신 집사(37년) 등에게 온 교인들의 정성이 담긴 기념품이 전달되었다 이후 김영현 장로의 광고와 총회장 전필순 목사의 축도로 70주년 기념예배가 폐회되었다.그러나 이날 감격 속에 진행된 기념예배의 백미(白眉)는 역시 백낙준 박사의 특별기념설교였다. 당시 연세대학교의 총장이자, 당대 최고의 교회사가(敎會吏家)인 백박사는 이날 '변치 않는 교회 속에 변하는 교회'라는 제목 하에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온 경로를 소상히 소개하면서 그 속에서 차지하는 새문안의 남다른 역사성을 밝히는 한편 향후 한국교회가 지향해야 할 구체적인 과제들을 제시했으니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설교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과 감명은 적지 않다.
새문안교회 창립 70주년 기념행사는 이상과 같이 창립일(9.7)에 거행된 기념예배 외에도 이후 3일간에 걸쳐 성대하고 다양하게 진행되었다. '70주년'의 의미를 살려 ·일곱 가지 행사'로 진행되었던 기념행사의 면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날저녁 노량진교회를 비롯한 서울시내 10여 개 교회 고등부 학생들이 참가한 웅변대회를 거행하였으며, 다음날(9. 28) 저녁 유년주일학교 주최의 동요대회를 개최하여 서울시내 13개 교회가 이에 참가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틀뒤인 주일날(7.29)은 바울 리오(Paul Reeo) 목사를 초빙하여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자'라는 제목의 특별 설교를 들었으며, 그날 저녁예배를 성가대 주최로 '기념음악 예배'로 드렸는데 한인환 집사 지휘와 곽은수 씨의 오르간 연주로 진행되었다 이날 오르간연주가 더욱 돋보였던 것은 새문안 여전도회가 교회 창립 7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3년간 적금을 부어 구입한 것이기에 그러했던 것이다.
한편 10월 3일 새문안 청년면려회는 서울중학교 운동장에서 '전 서울시내 교회 대항 배구대회와 탁구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체육대회는 이후에도 교회연합운동 의미에서 교회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새문안 청년면려회 주최로 수년간 계속되었다. 끝으로 준비된 70주년 기념행사는 오늘날까지 그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는 새문안의 자랑인 '언더욷학술강좌'이다. 9월 30일부터 10월 5일까지 6일간 계속된 이 강좌는 당대 한국 최고의 기독교 지성(知性)과 신학자들을 초청한 가운데 거행된 최대의 기독교 학술강좌였다. 시작한 첫날부터 끝날까지 매일 저녁 400여 명의 청중이 교회당을 가득 메우 사실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언더욷학술강좌'에 대해서는 뒤에서 좀더 소상하게 언급하기로 한다.
(2) 교회 지도력의 확대와 강화
70주년 행사를 성대히 마친 이듬해 8월 두 분의 장로를 뽑았으니 그분이 방순원(方順元) 장로와 원일한(元一漢) 장로였다. 이 두 분 장로는 현재 원로장로로 추대되어 교회'어른'으로서 교인들의 존경을 받으며 중요한 행사 때마다 교회를 대표하여 기도 순서를 맡아주고 있다.
1960년대 접어들면서 지도력이 훨씬 확대된다. 1961년 이상인(李相寅), 정충희(鄭忠熙) 장로의 취임과 장립 이후 거의 매년 두세 분의 장로 취임이 있었으며 권사, 집사의 수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 여기서 강 목사 재임 제1기(1955~1970)에 취임한장로 권사 명단을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이상의 장로, 권사들 가운데느 현재 소천(召天)한 분들이 적지 않지만 1955년에 취임한 이병희 장로를 비롯해 원일한, 방순원, 이상인, 정충희, 석선진, 노정현, 최영규, 서정한 장로들은 지금도 교회의 원로장로 혹은 공로장로 또는 시무장로 등으로활 동중에 있다. 이 시기 선임된 권사들 가운데 조병린, 왕기랑, 박진성, 김수길 권사등은 현재도 공로권사, 시무권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는 새문안의 '어머니'들이라 할 것이다.
이분들은 수난의 일정시대를 지나 혼란한 해방 정국 그리고 1960년대 이후 오늘에 이르는 급변하던 정치 사회적 상황과 그 와중에 교회 내에 밀어닥쳤던 몇 번의'위기'를 슬기롭게 헤쳐가며 오늘의 새문안이 있게 한 새문안의 '원로'이자 '기둥'들이었다. 그러나 이분들의 빛나는 활동과 헌신을 '역사화'(歷史化)하기에는 좀더 시간이 흘러야 할 것이다.
강신명 목사 부임시 제직회와 남·여전도회를 이끌며 봉사한 교인들로서는 남자 집사로 최현배(崔鉉培) 안수집사를 비롯해 백춘학(白春鶴), 이창식(李昌植), 박두영(朴斗榮) 집사 등 20명과 김신도(金信道), 박진성(朴鎭成), 곽주래(郭周來), 박화덕(朴精德) 집사 등 21명의 여집사를 포함해 40여 명에 머물고 있었다 이들 제직들은 대부분 일제의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새문안을 지키며 헌신 봉사한 '신실한 제직'들이었다. 이들 집사들은 교회가 내부적으로 문제에 봉착할 때마다 수습에 앞장섰으며 교역자의 사례금 지급이 제때 지불되지 못할 때는 대불(代拂)까지 하는 열심과 본을 보이기도 했다. 여기서 강 목사 부임 이후 1970년도까지 제직들의 연도별 증가추세를 보면 <표 7-3>과 같다.
해방 이후 195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40여 명 선을 넘지 못했던 제직수가 강 목사부임 이후 급증하기 시작하였음을 위의 <표 7-3>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1955년현재 제직 총수가 58명이었으나 10년 뒤인 1965년에 이르면 무려 188명으로 3배이상 늘어나고 있으며 1970년에 오면 320명에 달하는 놀라운 확장을 보이고 있다. 한편 1963년 9월 당회에서 장립집사(안수집사)제도를 부활시켜 그 해 10월에 박정수(朴貞壽), 이한준(李韓俊), 박명희(朴明熙), 이상원(李相源) 등 4인 집사가 공동의회에서 선거를 통해 장립집사로 피선되기도 하였다. 실로 25년 만의 일이었다. 이렇게 제직의 수가 크게 증가하였음은 이 시기 새문안 교세가 확장일로(擴張一路)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것이다. 1963년 9월 당회에서 주일예배를1, 2부로 나누어 1부는 오전 10시에, 2부는 11시 15분에 각각 두 번씩 드리기로 한것도 이같은 교세 확장에 따른 자연스러운 변화였던 것이다. )요컨대 강 목사 부임 후 교회 창립 70주년 행사를 치르면서 새문안은 성장과 발전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를 이끌어갈 장로 집사 등 교회의 지도력(指導力)이 대폭 확대 강화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교회연합과 일치운동의 구현
강신명 목사 부임 후 또 하나의 괄목할 만한 변화와 발전은 교회연합운동이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익히 아는 대로 교회연합과 일치운동은 하나의 '새문안 정신'이자 '언더우드 정신'이었다. 이러한 새문안의 교회연합정신이 강 목사의부임 이후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교회 창립 이래 이어져 오던 이 정신과운동이 일제식민지 수난의 시대를 거쳐 8·15 해방과 6·25 전쟁을 겪으면서 다소 위축되었다. 여기에다 앞서 언급한 장로교 내의 분열과 전쟁을 전후해 있었던 새문안 내의 잦은 교역자의 이동 등으로 이 정신이 제대로 유지, 발전될 여건이 되지 못했다.
후술하거니와 '에큐메니칼'이란 용어가 한국교회에 회자(暄美)되게 된 역사적 배경은 매우 불행한 것이었다. 그러나 실로 이것이야말로 한국장로교회의 신앙과 전통으로 이어져 왔으며 따라서 "연합정신을 위반하는 사람들은 장로교 전통을 위배하는 사람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54년 이후 이미 장로교회가 '예장'과 '기장'으로 돌이킬 수 없는 길목에 들어섰지만 새문안은 이후에도 교회연합과 일치를 위해 계속적인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1954년 본교회 당회에서는 "분열된 장로교회의 통일과 성경상 도리에 합당하지 못한 재산권 소송문제를 중지케 하기 위하야 금번 노회를 통해서 내(來) 총회(總會)에 헌의하기로 가결"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총회의 통일에 저해되는 행위에 반대하며 걱정하는 새문안의 입장, 다시 말해 교회연합과 일치를 향한 새문안의 분명한 자세를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새문안의 한국교회 전체에 대한 끊을 수 없는 애착과 관심의 면모를 읽을 수 있다.
이같은 새문안의 한국교회 일치를 향한 노력은 1960년대에 접어들어 더욱 강하게 나타났다. 1965년 4월 당회는 경기노회(京畿老會)에, 분열된 한국교회의 재일치(再-致)를 호소하는 건의서를 올렸다. 즉 '장로교회만이라도 통합을 전제로 장로교연맹을 조직할 것'을 건의했던 것이다. 이는 실로 획기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말하자면 분열된 장로교회의 통합을 염두에 두면서 우선적인 작업으로 「장로교연맹」을 결성하자는 제안이었다 이같은 건의안을 새문안이 제출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새문안의 역사성에서 가능했던 것이며 동시에 남달리 교회연합정신을 강조했던 강신명 목사의 목회철학에 기인한다.
노회는 이 안을 받아들여 그 해 9월 총회(訓회)에 헌의하였다. 배명준(裵明俊) 당시 노회장 이름으로 헌의된 이 안의 요지는 '장로회 신조와 대소요리문답(大小要理間答)을 그대로 믿는, 장로회 명칭을 사용하는 교단과의 장로교연맹을 조직'하자는, 바로 새문안이 노회에 헌의한 바로 그 내용이었다.
이 헌의는 총회에서도 받아들여져 곧 장로회연맹 결성을 위한 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예수교장로회측을 대표한 5인위원에 강신명 목사가 임명되었음은 물론이다. 1966년 8월 이상의 예장측을 대표한 강 목사 외 4인과 기독교장로회(基督敎長老會)측을 대표한 이영민(李英敏) 목사 외 4인이 합석하여 「장로교연맹」 결성문제를 놓고 장시간의 토의를 하였다. 그 결과 결성된 것이 바로 「장로교협의회의」의 구성이었다. 말하자면 예장측에서 주장했던 「장로교연맹」의 결성에 앞서 이에 관한 향후 모든 문제를 협의할 수 있는 기구로서 우선 「장로교협의회의」를 구성하는 선에서 합의를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 협의체의 추진위원장에 강신명 목사가 추대되었다.
요컨대 새문안 당회가 교회연합운동의 일환으로써 노회에 헌의하였던 「장로교연맹」의 결성은 본래 목적을 다하지는 못했지만 예장·기장이 분열된 후 차단되었던 대화와 협의체의 '창구'로 「장로교협의회의」를 구성해 내는 한편 이 협의체의 책임자로 강 목사가 추대되는 일단의 성과가 있었던 것이다.
이 협의체는 이후 장로교 교파간의 교회일치운동체로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는데 이 일은 강신명 목사가 중심이 되어 추진되었다. 강 목사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에큐메니칼운동에 대해 남다른 신념과 확고한 신학적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평소 한국교회의 분열이 '교권주의자들의 주도권 장악 암투'에서 비롯된 '교파주의'의 결과라고 비판하였다. 폰 따라서 이러한 '교파주의'에서 비롯된 주도권 장악 암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워서 그리스도의 품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당황케 만들고 있다"고 하며 에큐메니칼운동을 통한교회일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강 목사의 주장과 견해는 교회의 일치(unity)와 선교(mission)를 최우선에 두었던 강 목사의 목회철학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강 목사의 목회철학은 새문안 내에 깊게 스며들어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선 새문안을 한국교회연합운동의 장으로 문을 활짝 개방하였다. 즉 1950년대중반 이후 서울지역은 물론 전국적 규모의 기독교 집회와 대회가 거의 예외없이 새문안에서 개최되었다. 총회, 노회 모임은 물론 연세대학교(신과대학)를 비롯한 여러신학교의 졸업예배 장소와 각종 기독교 연합집회와 음악회, 기독교방송국 등 기독교와 유관된 단체들에게 교회문을 활짝 개방하였다.
이러한 개방성이 새문안의 위상을 높이는데 기여했음은 물론이다. 한편 이같은 교회문의 과감한 개방은 새문안 정신, 곧 교회일치운동의 구체적인 발현이기도 했다. 이러한 교회연합 및 일치운동과 그 정신의 발현은 교회 내에서도 활발하게 펼쳐졌다.「기독청년면려회경기CE연합회」를 비롯해 「장년면려회경기노회연합회」 등이 본교회에서 개최되었을 뿐만 아니라 「장년면려회연합회」 경우는 사무실을 새문안 내에 설치할 정도로 새문안은 교회연합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던 것이다. 이밖에도 서울시내 교회들의 청년회 회장단을 초교파적으로 초치하여 청년회 운영을 위한 토론회와 친목회를 개최하는 등 교회 내의 교회연합운동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한마디로 1960년대 새문안은 활발한 에큐메니칼운동의 구현을 통해 한국 모교회(母敎會)로서의 모습을 되찾아가며 성숙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새문안이 이같은 교회연합운동의 '중심체'가 되기까지는 다음에서 보듯 숱한 역경과 어려움을 감내해야만 했다.
시대의 어둠을 밝힌 새문안(1971~1980)
성전의 신축과 헌당
1960년대 중반부터 교인수가 늘어나자 보다 넓은 예배 장소와 교육 공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우리 교회는 이미 수차에 걸쳐 교회를 증축하였지만 교회 공간은 교인수의 증가에 따르지 못하였기 때문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성전 신축 문제가 논의되었다. 그러던 중 1966년 10월 김병옥 장로를 위원장으로 「건축위원회」(建築委員會)를 조직, 성전 신축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이 중대한 사명을 맡은 건축위원은 아래와 같다.
위원장 : 김병옥
위 원 . 김광신 김대보 김동만 김병윽 김병준 김성환 김양제 김익준 김정섭 김정제노정현 박기혁 박명희 방순원 백진기 서정한 석선진 어윤배 오인명 이병희 이상인 이한준 원일한 정충희 최영규 허봉락 현구택 임급주 강병창 박두영 안종호 오장은 이상원 이종배 장만기 진록근 천병화 홍미현 고영복 김문근 김택하 이용실 임대지 황인헌 주요한 김대하 박진성 양순화 우관실 이순희
건축위원회는 우선 유명한 건축설계가, 이구(李玖.)·조자룡(趙子龍)·김중업(金重業) 3인에게 건축설계를 부탁하였다. 이들 3인은 외국에서 설계를 전공하고 돌아와 한국 건축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던 당시 대표적인 설계가들이었다. 이중 설계안을 교회에 제출한 사람은 이구 씨와 조자룡 씨 양인이었다. 조자룡 씨의 설계안은 한국 건축의 전통미를 적극 살린 설계였고 이구 씨의 그것은 서양식에 한국미를 가미한 것이었다. 건축위원회는 이 두 설계안을 놓고 여러 교우들이 참석한가운데 수차의 토론회와 좌담회를 거쳐 최종적으로 이구 씨의 안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말하자면 성전 신축을 교인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를 밟아 추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건축에 대한 모든 사항이 토론의 대상이 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건물의 규모와 구조, 기능 등에 대한 논의에는 일반 교인들도 참여할 수 있겠지만, 그것에 따른 설계와 공법, 자재 등에 관한 부분은 전문가의 고유 영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회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었다. 일반 건축물과 달리 예배당은 실효성과 아울러 상징성 역시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건축에 대한 깊은 지식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건축가들 또한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그러므로 교회 건축에서는 일반 교인들의 의견 수렴 과정을 필요로 했다.
성전 신축 문제를 놓고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역시 유서 깊은 예배당의 철거문제였다. 원일한 장로는 "새문안교회와 같은 전통 있는 교회를 헐고, 그 자리에 새교회 건물을 짓는 일은 상상할 수 없다"고 하며 옛 예배당 철거에 반대의 뜻을 표하였다. 이같은 주장에 당시 많은 교인들이 공감하였다. 그러나 보다 현실적인 필요와 장기적인 안목에서 옛 예배당을 헐고 신축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리하여 결국 유서 깊은 '벽돌예배당'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현대식 교회당을 신축하기로 최종 결정하였다.
새로이 신축하는 성전의 설계는 교우들의 의견을 참작하여 외형은 "한국적 전아(典雅)의 풍취"를 풍기며, 내부 구조는 "개방적이면서도 실용적인 서구식"의 장점을 살리도록 건축 설계사에게 주문하였다.
이같은 각계의 의견 수렴과 치밀한 준비 과정을 거쳐 1971년 9월 27일 오후 5시에 예배당 앞뜰에서 기공예배를 드렸다. 이로써 교회 창립 85주년을 맞는 1972년 완공을 목표로 성전 건축의 첫 삽을 떴다. 새문안의 새 성전 건축은 아래와 같이 교계언론에서 다룰 만큼 주목을 받았다.
한국 최초에 조직된 교회이며 개신교의 어머니교회인 새문안교회는 1910년대 장안에서도 유명했던 붉은 벽돌예배당이 헐리게 되자 많은 인사들이 지나간 과거의 역사를 되새기며 기독교가 이바지했던 교회의 업적을 되새기게 된다. (중략) 60년이 넘는 교회건물 나이에 교인수는 2천 명을 넘고 건물의 붕괴 우려도 있고 하여 이 역사적인 건물을 헐고 현대적인 시설을 갖춘 예배당을 짓기로 하였다. 연건평 784평에 3층 건물로 세워지게 될 새 예배당은 한국 고유의 미를 살리면서 미래상을 갖춘 현대식 건물이 될 것이며 한꺼번에 1천 명을 수용할 능력과 예배에 구애받지 않고 성도간의 교제를 할 수 있는 로비(40~訓평)와 탁아실, 24시간 공개기도실 이외에도 다목적의 부속시설을 갖추게 될 예정이다. 총 1억 원의 예산으로 창립 85주년 기념예배를 새 예배당에서 드리기 위해 72년 9월 초 완공을 목표로 공사를 서두르고 있다.
그런데 어느 교회 건축에서나 그러하듯 난관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우선 재정조달이 큰 문제였다 헌금 목표는 1억 원이었는데, 당시의 교세가 총 750가구에 2,000명 교우였으니, 이는 가구당 약 13만 원, 교우당 약 5만 원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교우들의 열성에도 불구하고 헌금 실적은 목표액에 이르지 못하였다. 이에 건축위원회에서는 1억 원 목표의 건축헌금 미달액 2,000만 원을 추가 헌금하기로 하였다. 우선 건축위원들이 그 해 9월 17일까지 1,200만 원을, 나머지 800만원은 남은 제직과 일반 교우들의 헌금으로 충당하기로 하고 제직들은 그 해 10월1일까지, 일반 교우들은 입당예배 드리는 주일까지 헌금하기로 하였다. 한편 성전 건축을 위한 해외 교우들의 열성적인 참여도 있었다 미국·일본·서독·브라질·대만·월남 등지로 이민간 교우들이 어려운 생활 중에서 성전 신축 헌금을 보내왔다. 당시 헌금을 보내온 해외 교우들의 명단과 헌금 내역은 아래와 같다.
이밖에도 성전 신축 헌금에 얽힌 미담(美談)이 많이 있다. 양동찬이라는 주일학교 어린이는 돼지 저금통을 깨뜨려 건축헌금(18,693원)으로 바쳤는데, 이는 해방 직후성전을 증축할 때 홍미현 학생이 무명지(無名指)를 끊어 교우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호소하여 큰 감동을 준 것과 유사한 예라 하겠다. 말하자면 성전 건축이라는 대역사(役事)를 놓고 새문안의 온 교우들, 즉 어른, 어린이, 외국에 나가 있는 교우들까지 하나가 되어 참여하였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많은 액수는 아니지만 건축기금으로 금일봉을 전달해 왔다는 점도 언급할 만하다. 구한말인 1907년에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건물을 신축할 때 국왕이 보조금을 하사한 일이 있었지만, 일개 교회에 그것도 기독교인이 아닌 대통령이 건축헌금을 한 경우는 아마도 한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예일 것이다. 이는 새문안의 교회 신축이 교계는 물론 사회에서도 대단한 관심을 끌었음을 시사하는 예라 하겠다.
그러나 한편으로 현직 대통령으로부터 건축헌금이라는 명목으로 금전을 받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냐에 대한 비판적 여론도 없지 않았다 즉 교인들 중에는 그 저의에 대하여 의심을 품는 사람도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건축위원장 김병옥 장로가 이 문제에 대하여 "오해가 없도록"그 경위를 설명해야 했다. 재정 문제 외에도 난관은 많았다. 계획의 변경이나 설계의 착오, 완공의 지연이나 경계(境界)에 대한 시비 등이 그러한 일이었다. 그러나 온 교우가 하나되어 성전 신축 역사(役事)에 동참함으로써 드디어 새로운 성전 신축의 날이 밝았다. 이상과 같은 어려움과 산고 끝에 1972년 8월 25일 정초(定礎)예배를 드렸는데 이때 신축 성전의 머릿돌 휘호는 우리 교회의 오랜 교인이자, 서예가로 이름 높은 김기승(金基昇) 집사가 썼다. 한편 '비품준비위원'들에 의해 새 성전을 위한 준비와 단장이 마무리되자, 마침내 추수감사주일인 1972년 11월 26일 창립 85주년 기념예배를 겸하여 입당(入堂)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날의 모습을 《새문안 85년사》에서는 아래와 같이 전하고 있다.
아침 열한 시 가끔 첫 겨울의 찬바람과 함박 눈송이가 내리는 고요한 주일, 창립85주년 기념예배가 250여 일 만에 완공된 새 예배당의 입당예배와 함께 성대히 거행되었다. 그날이 마침 추수감사주일이어서 창립의 역사적 회고와 아울러 감사의 찬양이 한층 더 높았다.
새 성전의 특징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새 교회당의 특징 몇을 들면, 지상 일층 예배 처소 1,000석에 자모석이 따로 마련돼있고, 현관에 들어서자 로비가 34.8평 넓이로 마련되었다. 지하 일층에는 당회실, 회의실을 비롯한 방들과 주방, 다과실을 마련하여 예배의 생활 폭을 넓게 하였고, 기도실은 항상 개방하여, 아무 때 와서도 명상의 시간을 보내게 하였다. 냉한방의 에어콘 장치도 현대적 교회당으로서는 우리가 최초일 것이다.
헌당(獻堂)예배는 부활주일인 1973년 4월 22일 오후 3시에 드려졌다. 당회에서는 이를 위하여 「헌당예배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준비에 만전을 기하였으므로, 헌당예배는 별다른 차질 없이 1,500명의 교우들이 참석한 가운데 은혜롭게 진행되었다. 이날의 행사는 기독교방송국(CBS)에서 생방송으로 중계할 계획을 세울 만큼 교계의 관심을 끌었다.
이로써 수많은 교우들의 기도와 헌신으로 시작·진행된 성전 건축이 완성되었으니, 새문안은 한국의 어머니교회로서 더욱 높이 비상(飛上)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다양하교 개방적인 공간 이용
새 성전이 마련됨으로써 우리 교우들이 보다 쾌적한 환경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교육활동과 선교사업도 보다 활발하게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성전 신축 공간의 혜택은 새문안 교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이후 새문안 공간은 기독교와 관계 있는 여러 형태의 집회 장소로 널리 사용되었다. 예배 혹은 행사를 위하여 장소를 필요로 하는 기독교 기관들에게 새문안의 공간을 무상으로 사용하도록 새문안 당회는 허락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새 성전은 보다 많은 기독교 기관에 개방하여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니, 새문안의 연합정신과선교를 위한 개방정신을 이러한 모습에서도 엿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새문안의 개방성과 포용성이 성전 신축 이후에 시작된 것은 아니다. 오래 전부터 새문안 공간은 많은 외부 기관들이 수시로 사용토록 허용되어 왔다. 비록 격증하는 우리 교우들을 수용하기에는 좁은 장소였을지 모르지만 새문안은 당시로서도 손꼽히는 큰 규모의 교회로서 넓은 공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이 교회 신축을 계기로 더욱 빈번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교회의 예배 및 교육 공간에서 이루어진 외부 행사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으나, 이 가운데 성전이 완성된 직후인 1973년 한 해의 경우만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이와 같은 교회 장소 사용 신청의 추세는 이후에 더욱 증가하였으니 매월 당회록에 거의 빠짐없이 몇 건의 교회 건물 사용 신청이 쇄도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새문안 성전은 새문안 교우들만의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를 위한 성전이라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물론 새문안 성전 사용이 신청 요구만 있으면 아무에게나 허락되었던 것은 아니다. 사용 신청이 들어오면 먼저 당회에서 심사한 후 그 목적과 취지가 적합하다고 판단되었을 때만 선별, 허락되었다.
그럼에도 외부 기관의 사용 신청이 날로 급증하자 부득이 "규정에 의한 실비는 징수"키로 하였으며, "정치적 성향의 모임"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성전 사용에 관한 내규를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교회가 종교집회적 성격이 아닌 모임의 장소로 사용되는 것을 당시의 상황에서는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뒤에서 언급하는 바와 같이 이 시기 새문안 대학생회를 중심으로 정치 성향의 집회가 종종 열렸기 때문이다. 당회가 이 시기 교회 건물 사용에 관한 규약을 제정하게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그러나 그 뒤에도 교회의 일치나 신앙의 자유, 또는 구속자석 방 환영예배 등의 모임이 우리 교회에서 자주 열렸다. 예컨대 1975년 2월 9일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의 사회위원회 주관으로 "한국교회의 일치, 신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기도회"가 본당에서 열렸으며, 역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주최로 2월 23일 "구속자석방 감사연합예배", 그리고 연이어 3월 1일에도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 주치로'언더욷기념관'에서 "석방교수 환영예배"를 드렸다. 이처럼 신축 성전은 한국교회 전체의 공유물(共有物)같이 개방적이고도 다양한 목적으로 활용되었으니, 이 또한 교회연합정신의 구현이라 할 것이다.
<새문안 85년사>의 편찬
앞서 살펴본 대로 우리 교회는 1958년 한태동(韓泰東)박사의 집필로 《새문안교회 70년사》라는 한국 개교회사의 선구적 사서(史書)를 편찬한 바 있다. 그 후 다시 《새문안 85년사》를 간행했으니 이는 단지 15년의 세월이 지났다는 점 외에, 1970년대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새로운 도전 앞에 선 한국교회의 모습과 그 속에서의 새문안의 위상과 역사성을 새롭게 정리할 필요성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하여 《새문안 85년사》 편찬위원장 노정현 장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85돌을 맞이한 새문안이 그 동안 걸어온 복음의 아름다운 발자취와 이 민족과 더불어 겪어온 온갖 어려움을 또한 알아보며 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받아 새 역사창조에 올바른 방향 설정을 하는 데 그 취지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새문안 85년사》는 좁은 시야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좀더 넓은 눈으로 교회를 초월하고 교파를 초월해서 85년사를 엮어보자는 방침을 세웠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새문안 85년사》는 비단 새문안 교회사뿐만이 아니라 어머니 새문안이 중심이 된 전 한국 교회사라 해도 과장된 말이 아닐 것이다.
요컨대 과거에 대한 성찰은 물론 향후 선교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 있어 《새문안 85년사》의 발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와 아울러 강신명 목사의 아래와 같은 글은 이후 새문안의 지향 목표를 분명히 하고 있다.
오랜 교회생활과 교회봉사를 통해서 지난날에 다 해 보았다든지 또는 전날 나는 무엇을 하였다든지 그때는 어떠하였다는 등의 말로 추억에 사로잡힐 것이 아니라 오늘 하나님께서 나와 우리 교회에 명하시는 바가 무엇이며 어떠한 것을 기대하시는가를 알아서 응답하는 교회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중략) 지금까지의 전도방식과 선교전략은 일단 지양하고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여야겠다. 공산주의자들의 교두보는 아무래도 가난한 사람들과 근로대중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당면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데 앞장을 서야겠다.
이 글에서 강 목사는 과거의 전통과 업적에만 집착하고 현상 유지에 만족하는 교인들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여 교회가보다 적극적으로 소외된 이웃들에 대한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하는 미래지향적인 비전을 피력하고 있다. 말하자면 《새문안 85년사》의 발간을 계기로 새문안의 역사적 정체성(identity)을 다시 한번 인식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향한 새로운 선교 방향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새문안 85년사》의 발간은 1971년 김대보(金大寶) 장로가 성전 건축과 짝하여'새 문안교회 85년사 편찬안을 발표하면서 추진되었으며, 이어 자료 수집을 요청함으로써 본격화되었다. 이후 편찬위원장을 맡은 노정현 장로를 중심으로 온 교우들이 자료 수집에 협조를 아끼지 않았으며, 특히 대학생회 지도자인 김종렬 전도사가 3개월간 이 일을 위하여 봉사하였다
집필 책임자로는 한국 교회사가(敎會史家)로서 널리 알려진 연세대 신과대학의 민경배(闊庚培) 교수가 선정되어 수고하였다. 그는 새문안이 한국 교회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교회사 편찬의 의의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새문안교회는 조직된 교회로서는 최초의 한국교회로 자처한다. 까닭에 이 교회는 단절되지 아니한, 역사의 목격자로 여기 서 있다. 이 교회의 행적을 더듬어, 한국교회 전체의 행적을 오히려 더듬게 되고, 이 교회의 역사 분석이 한국 기독교회사 전부의 분석을 실험한다 해서 절대 과언이 아니다. 물론 사사건건이 반드시 상관(相關)해서 그 일치점이 느닷없이 명료해지도록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문, 복음의 여명기. 그날부터 이 나라의 교회와 함께 이날까지 동행해 온 모습 속에서, 구체적(具體的)인 신앙 실험의 과정이 그만큼 전형적이라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이처럼 민교수는 단수히 새문안만의 역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로써 대표되는 한국 교회사 전체를 파악하고자 하는 시각에서 집필에 임하였던 것이다. 그는 자료의 부족이 큰 장애라고 아쉬워하였지마, 방대한 국내외의 관련 사료를 수집하고 생존자들의 증언을 채록하여 정리함으로써 역사서로서의 가치를 더욱 높였다.
원고가 거의 탈고될 무렵에는 마지막 손질을 하여 다음과 같이 편찬우원이 선정되었다.
위 원 장 : 노정현
편찬위원 : 장만기 전홍민 김대보 김병옥 주요한 주수원 황진섭 허봉락 김성환 김양제 김정석 이마리아 정남식
그리하여 마침내 1973년 4월 《새문안 85년사》가 발간됨으로써 새문안의 역사가 보다 기이 정리되고 널리 알려졌다. 아울러 개교회사가 매우 드물었던 그 무렵에 우리 교회는 이미 두 권의 역사책을 간행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의 발행으로 교회 창립 85주년 및 성전 건축이 더욱 빛을 발하였음은 물론이다. 이제 이 책에서 지적하고 이쓴 새문안의 특징을 들어보면 아래와 같다.
1, 새문안교회는 총화(總和) 아니며 조화와 일치의 화해적(和解的) 자세로 일관하여 왔다.
2. 새문안교회는 두 극단(極端)을 항상 온건과 미려(美麗)로 상쇄시켜 왔다.
그리고 민 교수는 새문안의 사명과 지표를 시사하는 의미심장한 말로 마무리를 짓고 있다
장연의 솔내교회와 평양의 장대현교회 소식이 끊겨져, 그 소재가 분명하지 못한 오늘, 우리 새문안이 이 나라 최고(最古)의 교회인데 우리들 다 그 영광과 긍지에 마땅한 신앙과 그 유산의 계승에 남보다 뛰어났었는지 다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책임에 또 하나 역사적 교회로서의 의무도 지워준다. 이 소중한 소임의 수행에 총명과 인내, 결단과 의욕끼 없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 다 마지막으로 묻고 그쳐야할 말이 하나 있다. 우리 하나님, 당신의 섭리가 어디메뇨.
창립 90주년 기념사업
교회 창립 85주년을 맞이하여 뜻깊은 기념사업을 벌였던 것처럼 창립 9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 준비를 위해 1976년 3월 「90주년사업추진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위원회는 아래와 같은 당회원 전원과 일부 제직들로 구성되었다.
위 원 장 : 김병옥 / 서 기 : 김정섭 / 회 계 : 이한준 / 재정부장 : 김정제
건축부장 : 방순원 / 음영부장 : 서정한 / 기획위원장 : 석선진
이들은 85주년 행사를 치렀던 경험을 바탕으로 알차고 새로운 계획을 세웠으니, 주요 내용을 보면 ① 교역자 사택 건립 ② 강단 배면(背面) 완성 ③ 종탑 건립 ④ 난방 설비 ⑤ 본당 지하실에 교실 증설 ⑥ 파이프오르간 구입 등이었다. 그리고 새 문안동산 조성 사업도 함께 추진되었다. 말하자면 90주년 기념사업에서는 85주년을 기념하여 건축된 성전을 더욱 보완(補完)·미화(美化)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 같은 원대한 사업을 추진하기 위하여 총 5,100만 원의 예산이 책정되었으며, 그 중 5,000만 원을 헌금으로 충당키로 하였다.
한편 위와 같은 외형적인 사업 외에도 다양한 기념행사를 계획하였다. ① 축하예배 ② 학술강연회 ③ 축하음악회 ④ 축하체육대회 ⑤ 교회역사 필름 제작 등이 그것이다. 특히 교회의 면면을 필름으로 제작하여 보관하려는 것은 '어머니교회'로서의 새문안에 걸맞는 의미 있는 작업들이었다. 그리하여 1977년 7월 18일 주일에 90주년 기념예배를 드리고 아래와 같은 기념행사를 성대히 치렀다.
요컨대 교회 창립 90주년 행사는 지난 1세기 선교의 역사와 함께 한국교회의 미래를 전망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계획되었다. 흔히 기념사업이라는 것이 과시적이고 소모적인 자축 행사로 끝나는 경우가 많은데 비해, 새문안은 한국교회 역사를 회고하고 전망하는 학술강연, 기독교인의 역할과 사명을 강조하는 세미나 등을 개최함으로써 의미있는 90주년 행사를 가졌던 것이다.
아울러 90주년 기념행사에 즈음하여 우리 교회와 강신명 목사가 총회 역사상 처음으로 공로 표창을 받는 경사도 있었다. 새문안의 역사는 곧 한국장로교회의 역사와 마찬가지이므로, 이날은 한국장로교회의 창립 90주년이나 다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장로교회의 발전을 위한 우리 교회 및 강 목사의 공로가 인정되어 총회로부터 표창을 받게 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창립 100주년을 맞이하며 부흥하는 새문안(1981~1987)
김동익 목사의 부임과 목회 방향
새문안교회 제4대 당회장으로 김동익 (金東益) 목사가 정식으로 취임한 것은 1981년 11 월 8일이다. 그러나 김 목사는 그 해 4월 22일 이후 담임목사로 부임함으로써 사실상 이때부터 당회장무로서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니까 강신명 목사를 원로목사로 추대한 지 거의 1년 만에 비로소 새로운 당회장을 모시게 된 것이다. 이 기간 동안 당회장직은 부목사 가운데 수석 목사였던 황인기 목사가 맡아 수고했다. 황목사는 1975년 8월에 부임한 후 6년 동안 새문안 교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의 뜨거운 설교는 교인들에게 많은 감화 감동을 주었으며 교회 부흥에도 크게 기여했다. 뿐만 아니라 원로목사로 추대된 강 목사의 후임이 장기간 결정되지 못하는 어려운 기간에 임시 당회장직을 맡아 l년 동안 수고하였다.
강 목사의 퇴임은 앞 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미 오래 전부터 예고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후임 목사 청빙이 늦어졌던 것은 그만큼 신임 당회장 선정에 신중을 기했기 때문이다. 당회장을 새로 청빙하는 문제는 여간 조심스럽고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더욱이 새문안의 경우 실로 25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여기에 지난 25년 동안 새문안 강단을 지키며 한국 교계의 대표적 지도자 위치에 있던 강신명 목사의 후임 ‘자리라는 점에서 더욱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신임 당회장 청빙문제를 위한 인선위원을 처음 구성한 것은 1978년 1 월 당회에서였다. 이날 당회는 인선위원으로 이병회 장로. 김병옥 장로, 방순원 장로, 노정현 장로‘ 서정한 장로, 5인은 인선위원으로 뽑고 신임 당회장 후보자를 ‘물색’하도록 위임하였다. 이에 따라 인선위원들은 몇 분의 후보자들을 대상으로 교섭에 나섰으나 결정을 보지 못한 채 새로운 인선위원이 구성되었다. 그 해 9월 임시당회는 인선위원을 정충회 장로, 현구택 장로. 이한준 장로, 박대인 장로, 오장은 장로로 교체하고 당회장 후보자 물색에 다시 나섰다. 이 과정에서 역시 여러 후보자들이 거론되었지만 최종적으로는 김동익 목사로 귀착되었다.
1981 년 4월 최종 의결에 앞서 당회는 그 해 3월 8일(주일) 김동익 목사가 시무하고 있던 포항제일교회에 방순원, 서정한, 이한준, 오장은 등 4인의 장로를 파견, 김 목사의 설교를 사전 청취하는 세심함을 보였다. 이러한 절차를 거쳐 신임 당회장에 김동익 목사가 결정되자‘ 당회는 곧 신임 당회장 영접위원회를 구성하였고. 김 목사 또한 부임 인사를 겸한 당회원들과의 첫 인사를 나누기 위해 그 해 4월 26일 당회에 참석하였다. 한편 당회는 당회장 선임이 너무 늦어진 점을 감안하여 속히 위임식을 갖기로 하고 이를 위한 공동의회 투표날짜를 6월 14일(주일 )로 결정하였다
이날 3부 예배 후 개최된 공동의회의 투표 참가자는 571 인이었다. 김 목사의 위임이 통과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선인 381표는 넘어야 했다. 그러나 투표 결과는 예상을 뛰어넘어 무려 투표자 전체 비율 중 98%에 해당하는 떼표가 찬성표였다. 이같은 결과는 전통적으로 투표에 ‘인색’하다는 새문안의 전례를 챈 ‘획기적인 사건’이라 할 만하다. 그만큼 일반 교인들은 신임 당회장에 대해 ‘갈급’해 있었는지 모른다. 또한 25년 만에 맞이하는 신임 당회장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보냄으로써 100주년을 향한 새문안의 새로운 역사 창조를 힘있게 추진할 수 있기를 바라는 전 교인적인 정서의 표현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같은 기대와 희망은 김 목사 부임 후 놀랄만한 교인수의 증가로 부응되어 나타났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후술하기로 하고 우선 김 목사의 이력과 신력 (信歷) 등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김동익 목사는 1941 년 10월 1 일 경남 하동읍에서 김희용(金熙用) 목사의 5남 2녀중 장남i로 태어났다. 김 목사의 조부(祖父)되는 어른은 김선명 (金善明) 전도자로 1005년 경남 창녕에서 호주 선교사의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게 된 후 창녕읍교회를 비롯해 경남지방 여러 곳에 개척교회를 세우는 전도자로서 활동하였다. 한편 부친되는 김희용 목사는 진주, 밀양, 여수 등지 에서 40여 년 간 목회를 하다가 1981 년 정년으로 은퇴하였다. 그러니까 김 목사 가정은 일찍이 개화된 가문으로 3대째 예수를 믿어온 신앙의 뿌리가 깊은 목회자 가문이었다.
이러한 목회자 가정에서 성장한 김 목사는 어려서부터 목사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자랐다. 1~년 진주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사학과에 진학한 것도 신학은 공부하기 위한 준비였다. 신학을 공부하기에 앞서 학부에서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한편 김 목사는 대학 재학시절 4년간 새문안교회에 출석하였는데, 1961 년 5월 어느 날 하숙방에서 강신명 목사의 심방을 받을 만큼 새문안과는 일찍부터 인연을 맺고 있었다. 대학 졸업 후 ROTC 장교로 군복무를 마친 김 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원에 진학하여 본격적인 신학공부를 시작하였다. 1970년 2월 신학대학원을 마치고 1972년 서울서노회에서 목사 안수(救師按手)를 받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김 목사는 피츠버그대학에서 석사과정 (교회사 전공)을 끝내고 이어 밴더빌트신학대학원에 진학하여 그곳에서 박사학위 (목회학 전공)를 취득하였다.
1976년 초 귀국한 김 목사는 바로 연세대학교에서 봄 학기 강의를 맡았는데, 그해 6월 포항제일교회의 청빙을 받아 5년 동안 그 교회에서 시무하며 포항제일교회를 크게 부흥 발전시키던 중 새문안의 청빙을 받게 되었다.
김동익 목사의 신앙은 한국장로교회의 전통적인 보수신앙(保守信때)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현실문제를 도외시하지 않는 말하자면 보수적 신앙에 토대하면서 현실을 조망하는 새문안의 ‘에큐메니칼적 신앙’에 부합한 입장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설교는 매우 복음적이며 대중적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한편 김 목사의 목회철학과 목회방법은 전 교인들을 끌어안는 폭넓은 포용력(抱容力)에 기초하고 있다 할 수 있다. “혼자서 십 리를 가기보다는 둘이서 오 리를 가겠다”는 목회관(收會觀)에서 볼 수 있듯 그는 매사에 서두르지 않으며 공동체의 화합과 일치를 중요시하고 있다. 이러한 목회관으로 그는 동료 교역자는 물론 일반 교인들과도 늘 ‘횡적인 관계’ 속에서 교회 행정 을 처리하는 매 우 민주적인 자세로 목회에 임하고 있다. 다시 말해 김 목사는 ‘군림하는 목회자’가 아닌 ‘평민적 목자상’,‘대중적 목회자’의 성품을 지니고 있다.
이같은 김동익 목사의 신앙과 성품은 새문안에 부임하면서 밝힌 교회관과 목회방향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점은 향후 새문안의 목회방향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김 목사는 교회의 본질과 사명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첫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몸에는 생명이 있어야 한다. 교회의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이다.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는 교회가 될 때 그리스도의 생명력을 갖출 수 있다. 또한 생명력이 있는 곳에는 성장이었다. 성령이 역사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닮아가도록 성장해야한다.
둘째 교회는 선교이다.
불이 붙어 있을 때 불인 것처럼 교회는 선교할 때 교회다워지고 그리스도의 몸다워진다. 선교는 교회의 사업이나 목적이 아니라 교회가 교회되게 하는 본질이다. 교회의 모든 조직과 운영은 선교체계화 되어야 하고 선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야 한다.
셋째. 교회의 역사적 특징을 발전시키고 계승하며 이를 선교의 자원으로 활용하여야 한다. 새문안 교회는 몇 가지 자랑스러운 특징을 갖고 있다.
(1) 역사성이다.
역사적이라는 것은 단순히 역사가 길다는 뭇만이 아니라 역사발전에 책임의식을 갖는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새문안은 오랜 역사에 걸쳐 축적된 신앙과 전통을 이어 받으면서 한편 민족의 염원과 역사발전에 기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2) 도심성이다.
새문안은 수도 서울 심장부에 위치하고 있다. 도심은 전문직업인과 젊은이들의 집결지이다. 도심지가 주거 동공화(洞空化)되고 도심교회가 쇠퇴하는 현상이 세계적인 추세이지만 새문안이 도심지를 삶의 근거지로 삼고 있는 전문직업인과 청년층에 집중선교할 수 있다면 새문안도 부흥할 수 있다. 따라서 새문안은 인재양성에 중점을 두어 한국교회와 사회에 지도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도심은 새로운 문화를 흡입하고 재창출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새문안은 한국에서 기독교문화 창출에 견인차 역할올 해야 한다.
(3) 연합성이다.
새문안은 지난 100년 동안 지역과 세대간의 갈등 그리고 숱한 신앙사조의 소용돌이가 있었지만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연합과 포용 정신을 가지면서 한국교회의 맥락을 지켜줄 중심교회이다. 새문안은 한국교회의 어머니교회로서 앞으로도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운동에 견인차 역할을 하면서 세계 선교의 일익을 담당해야 한다. 이러한 새문안의 아름다운 전통을 더 발전시켜 선교의 자원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 김동익 목사의 교회관과 목회방향은 복음주의에 입각한 선교지향적 입장에 강한 초점을 두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폼이며, 교회의 생명은 성령의 역사, 곧 선교에 본질적인 사명이 있다’는 점을 힘주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이러한 교회관과 목회철학에 기초하여 김 목사는 향후 새문안의 선교적 사명을 다할 것을 다짐했다. 요컨대 신임 당회장 김동익 목사는 새문안의 남다른 역사성과 지역적 특성 그리고 새문안이 100여 년 간 지켜온 교회 연합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이 땅에 제일 먼저 세워진 어머니교회로서의 소임과 사명을 다할 것을 분명히 했던것이다. 이같은 다짐과 결의는 바로 가시화되었으니, 아래에서 보듯 김 목사 부임 후 새문안의 교인수가 놀라운 속도로 급증했던 것이다.
교세의 확장과 교회 지도력 확충
김동익 목사부임 후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은 우선 전에 없이 교인수가 크게 증가했다는 점이다. 과거 새문안은 교회의 장구한 역사에 비해 교인수가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었다. 해방 이전은 말할 것도 없고 해방 이후 1950년대만 해도 교인수가1,000명 선을 크게 넘지 못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한국사회가 급속히 산업사회로 변하고, 특히 1970년대 후반부터 농촌인구의 대도시 집중화 현상이 일어나면서 도시교회가 대형화되는 추세에 따라 새문안의 교인수도 크게 늘기 시작했다. 여기서 지난 100년 동안의 새문안 교인수 증가추세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표 9-1>, <표 9-2>에서 보듯 새문안의 지난 1세기 동안의 교인수는 크게 해방 이전과 이후로 양분된다. 해방 이전까지는 교인수의 증감이 심했으며 교세가 매우 미약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이 시기가 일제(日帝)의 식민지 시대였다는 특수한 상황의 결과라 할 것이다. 해방 이전까지를 10년씩 끊어 교인수의 증감을 알아본 위의 <표 9-1>에 의하면 1887년 14명으로 시작한 새문안은1897년에 149명, 1910년에 300명, 1927년에 850명으로 꾸준히 교인수가 늘어났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 뒤 1937년에 오면 교인수가240명 선으로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 이는 1930년대 일제의 '전쟁놀음'(만주사변, 1931 ; 중일전쟁, 1937)이 자행되면서 한국교회가 받은 심한 박해의 결과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태평양전쟁(1941)이 터진 이후 교인수는 더욱 줄어들어 급기야 1943년에 이르면 57명에 불과하게 된다.
이렇듯 교회 교인수의 증감은 정치 사회적인 요인과 깊은 관련성을 갖고 있다. 정치 사회적 여건과 환경이 교인 증감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침은 해방 이후의 교인증가 추세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앞의 <표 9-1>과 <표 9-2>에서 보듯 해방이후 늘어나기 시작한 교인수는 1957년도부터 1,000명 선을 넘기 시작하여 이후 계속 늘어나고 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해방 이후 미군정과 자유당 정권하에서 해방 이전, 즉 일제시대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전도와 선교의 문이 활짝 열리는 등 정치 사회적 조건이 호전되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위에서 지적한 여러 원인으로 해방 이후 1970년대까지 교인수가 지속적으로 늘어갔으나 역시 교인의 증가가 기하급수적인 팽창을 보인 것은 1980년대 접어들면서였다. 다시 말해 김동익 목사가 부임하면서 교인수가 급격하게 늘어났던 것이다. 1980년까지만 해도 2,880명 선이던 교인이 김 목사 부임 1년도 안 되는 1981년도에는 3,000명 선을 넘었으며, 1982년에는 전해에 비해 36.1%나 늘어나 4,180명에 이르는 놀라운 증가를 보였다. 이같은 교인수의 급증현상은 이후 계속되었으니 김목사 부임 후 교회 창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1987년의 주일예배 참석 교인수가6,000명 선을 넘고 있어 재임 7년(1981~1987) 만에 교인수가 2배로 증가하는 놀라운 교세 신장을 보였던 것이다.
1980년대 접어들어 나타난 교인수의 급증 원인을 앞서 지적한 정치 사회적 요인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그것은 새로 부임한 김동익 목사의 선교 열정과 노력의 결과이기도 했던 것이다. 김 목사는 부임 초부터 신입교인들에 대해 각별한 배려를 했다. 한편 젊은 교인들이 대거 새문안을 찾는 현상이 나타나 주일예배 횟수를 늘리며 젊은이들을 위한 주일예배시간도 특별히 배려하게 되었다. 아무튼 김 목사 부임 후 급신장된 새문안의 교세 확장 요인이 앞서와 같은 정치 사회적 요인만이 아니라는 점은 <표 9-3>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위의 <표 9-3>에서 보듯 1960~1970년대까지 새문안의 교인수 증가비율은 한국 전체 교회의 평균 증가율보다 낮았다. 그러나 김동익 목사 부임(1981) 이후 새문안의 교인증가 추세는 한국교회의 평균 증가율보다 높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1983년과 1985년의 경우 한국교회 교인수는 크게 줄어든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새문안의 경우는 오히려 크게 증가하였다. 요컨대 1980년대 이전까지 새문안의 교인증가 추세는 새 문안만의 현상이 아닌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것이었으나 이후 교인수의 급증현상은 김 목사의 부임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교인수가 크게 늘어나자 자연히 교회의 지도력을 확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일은 교역자(부목사)를 늘리는 일로 시작되었다. 김 목사 부임 때에는 부목사가 이기종 목사와 조성기 목사 두 사람뿐이었다. 따라서 날로 늘어나는 교인수에 비해 교역자 수가 절대 부족했다. 정태일 목사와 이동준 목사를 1981년 8월에 청빙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이후 교역자는 계속 보강되었으니, 1980년대 김동익 목사와 동역(同役)을 이루던 부목사는 20여 명에 달하고 있다. 짧게는 1년간, 길게는 4~5년간 새문안에서 목회활동을 한 교역자들은 교회적으로가장 큰 성장을 보였던 1980년대 새문안의 발전에 기여했던 분들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바는 이들이 새문안에서의 시무경험을 토대로 이임 후 서울의 유수한 교회를 비롯해 지방교회의 당회장으로 부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새문안의 또 하나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말하자면 새문안은 교역자의 실무경험을 쌓는 훈련장으로서의 기능을 다했던 것이다.
이같은 새문안의 모교회다운 역할은 이미 교회 창립 초기부터 있어 왔던 전통의 하나였다. 앞(제2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언더우드 목사 시무시에는 미국에서 갓 건너온 수많은 선교사들이 임지가 결정되기 전까지 새문안에 머물면서 언더우드목사 휘하에서 한국 선교에 대한 기초적인 훈련과 경험을 쌓은 후 임지로 떠났다. 말하자면 새문안은 창림 초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역자 훈련의 장으로서 남다른 역할과 기능을 다했던 것이다. 이러한 아름다운 전통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이 시기는 교역자만 늘어난 것이 아니었다. 교계의 확장에 따라 교회의 지도력이 대거 확장되었다. 즉 시무장로를 비롯한 안수집사와 시무권사 등 항존직이 또한 크게 늘어났으며 일반집사의 숫자도 전에 없이 늘어났다(부록 찬刻. 1981년 이후 새문안 항존직 수가 크게 증가한 것은 교인수의 급증에 따른 자연적인 추세였다. 1981년부터 1987년 사이에 시무장로가 18명, 안수집사와 시무권사가 각각 13명, 23명씩 증원되었다. 한편 이 시기 네 분의 원로장로가 추대되기도 했다. 30여 년이상을 새문안 교인으로서 혹은 집사, 장로로서 몸된 교회를 섬기며 지켜온 새문안의 '증인'이자, 교회의 '기둥' 역할을 해왔던 방순원, 석선진, 김병옥, 김정제 장로네 분이 원로장로에 추대되었던 것이다. 방순원 장로는 법조계에서, 석선진 장로는 교계에서, 김병옥 장로는 금융계에서 그리고 김정제 장로는 한의학계에서 각각 그 명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교회를 섬기는 일에 '충성'을 다했던 새문안의 '원로'였다. 이분들의 시무장로 퇴임과 원로장로 추대는 당회원의 세대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같은 현상은 앞 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미 1770년대 중반부터 점차 시작되었다.
여기서 참고로 새문안 창립 이후1987년까지 주요 연도별 교역자 및 제직수 증가를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위의 <표 9-4>에서 보듯 해방 이전까지 제직수는 교역자를 포함해 30명 선을 넘지 못했다. 1955년 강신명 목사가 부임하면서 늘기 시작한 제직은 1964년을 기점으로 대폭 늘어나기 시작했다. 전년까지 100명 선에 머물고 있던 제직수가 204명으로 크게 증가했던 것이다. 이는 전년도에 40명이었던 여집사를 3배에 해당하는 115명으로 크게 늘렸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늘기 시작한 제직수는 1960년대 200명 선을 유지하다가 1770년대 들어 300명대를 넘고 1980년대 400명 선을 넘으면서 급속한 확장을 보이고 있다. 1980년 432명이던 제직이 1982년에는 614명으로 늘어났으며 급기야 1985년에 그 수가 1,000명 선을 넘어 100주년을 맞이하는 1987년에는 1,216명에 이르는 대규모의 제직으로 확대되었다.
이같은 제직의 증가는 앞서 언급한 교인수의 증가와 비례되어 늘어났음은 물론이다. 특히 김동익 목사가 부임한 1981년 이후 매년 100명 정도의 제직이 늘어난 것은 이 기간에 교인수가 매년 적게는 700명, 많게는 1,000명씩 불어난 것이 주요 원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이 서리집사가 크게 늘어난 것에 비해 항존직 수는 상대적으로 이에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위의 <표 9-4>에서 보듯 시무장로는 1960년대 이후 거의 30년이 된 1987년까지도20명 선을 그대로유지하고 있으며 안수집사와 시무권사의 경우도 이 시기 급증한 교인수에 비하면 크게 늘어났다고 보기는 어려을 것이다.
아무튼 김동익 목사 부임 후 새문안은 한국 모교회로서 의 역사성 외 교세면에서도 한국교회의 모교회다운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이로써 새문안은 명실상부한 한국의 어머니교회로서의 위상을 정립해 나가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 것이다.
'교회 운영 규정'과 각종 규약 제정
김동익 목사 부임 후 위에서 보듯 교인수의 급증현상과 함께 당회원을 비롯한 안수집사, 시무권사 등 항존직이 늘어나고 교회재정도 훨씬 그 규모가 커지게 되었다.이로써 자연히 과거에 없었던 각종 새로운 교회기구와 기관들이 생겨나게 되었다.말하자면 전보다 훨씬 교회가 방만해지고 복잡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과거와 같은 관행과 경험만으로 교회 행정을 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교회의 일체 업무를 관장하고 있는 당회로서는 이 문제를 그대로 방치할 수 없는 처지였다 따라서 1983년 초 당회는 이러한 제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의 하나로 새 문안교회 '교회 운영 규정'을 제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안의 기초를 위해 방순원, 석선진, 노정현 장로와 김정서 목사를 서기로 하는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초안을 만든 후 당회의 수정 보완을 거쳐 1983년 11월 28일 새문안교회'교회 운영 규정'을 제정, 1984년 1월 1일부터 시행하였다. 전체 제10장의 전문 47조와 부칙 1조로 되어 있는 '교회 운영 규정'의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제1장 "총칙"(제1조~제4조)에서는 교회 명칭과 위치 및 본 규정의 제정 목적과 범위 등이 정의되어 있다.
제2장 "공동의회"(제5조~716조)에서는 공동의회의 참석자 자격과 예산·결산 및 직원선거에 대한 권한과 임무 등을 명시하고 있다.
제3장 "당회"(제7조~제13조)에서는 당회의 운영원칙과 교인의 신앙과 행위지도 및 성례식 관장 등 당회원의 14가지 임무와 권한이 제시되어 있으며 이밖에 당회의 구성과 그 산하에 설치할 수 있는 각종 위원회의 명칭과 기능 등이 명시되어있다.
제4장 "제직회"(제14조~제19조)에서는 제직회의 기능, 곧 각 부서의 사업보고 및 심의 등에 관한 임무와 제직회의 구성과 임원 그리고 제직회 산하의 18개에 이르는 각종 부서명을 명시하고 있다.
제5장 "교회학교"(제20조~제23조)에서는 교회학교의 설립 목적과 조직 및 교육협의회 등에 대해서 규정하고 있는데, 교회학교의 부서는 영 아부에서 장년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13개로 세분되어 있다. 한편 교회학교의 자치회 운영은 해당부장의 지도와 교육위원회의 감독을 받으며 회칙 및 주요활동은 당회의 사전 승인을 받도록 했다. 특히 청년부(1,2,3부)의 자치회 임원은 교회 등록 3년, 세례받은 지 1년 이상 된 교인이어야 하며 당회의 인준을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제6장 "성가대"(제24조~7127조)에서는 성가대의 목적과 임원에 대해서 규정하고 하나성가대, 새로핌성가대, 예본성가대, 새온성가대, 한기림성가대, 여성성가대 등6개 성가대를 두고 교회학교에 각 부별 성가대를 둘 수 있도록 했다.
제7장 "선교단체"(제28조~제31조)에서는 새문안 선교단체를 남선교회와 여전도회로 구분하는 한편 남선교회에는 1남선교회(50세 이상), 2남선교회(40~49세), 3남선교회(30~39세)로 세분하고 있다. 여전도회는 1여전도회(60세 이상), 2여전도회(50~59세), 3여전도회(40~49세), 4여전도회(30~39세)로 세분하며 모든 선교단체의 조직과 회칙 및 주요활동은 당회의 승인을 받도록 되어 있다.
제8장 "사무국"(제32조~제38조)에서는 교회 사무국 설치의 목적과 업무 및 사무장과 직원의 업무와 임면 등에 관한 규정을 명시하고 있다.
제9장 "재정 및 재산"(제39조~제45조)에서는 교회의 회계 연도를 1월 1일부터12월 31일까지로 한다는 규정과 예산 및 결산의 시행방법 그리고 재정지출의 절차와'교회의 모든 재산은 반드시 교회 명의로 한다'등에 대해서 상세하게 규정하고 있다.
마지막 제10장 "보칙"(제46조~제47조)에서는 본 규정 시행을 위한 시행세칙 등은 해당기관에서 제정하여 당회의 승인받을 것과 본 규정의 개정은' 재직 당회원 2/3이상의 출석과 출석 당회원 2/3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는 승인과 개정 전칙(典則)을 명시하고 있다.
이상에서 보듯 새문안 '교회 운영 규정'은 교회 운영과 절차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과 원칙을 법적으로 제도화함으로써 흔히 교회 운영상 나타날 수 있는 불필요한 주의 주장을 불식시킨 또 하나의 쾌거였다.
이밖에도 이즈음 '새문안장학회 운영 규약'을 제정하여 보다 합리적인 방법으로 장학생을 선발하여 장학금을 지급하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었다. 새문안에서 장학금을 지급하기 시작한 것은 오래 전부터였으나 일정한 규모를 갖춘 장학기금을 마련, 정기적으로 장학금을 지급한 것은 1977년경부터였다. 1977년 서정한 장로와 이수한 권사가 회갑을 기념하며 교회에 내놓은 장학기금(한한장학금)이 토대가 되어 규모를 갖춘 장학금을 정기적으로 지급하게 되었다. 그 후 이같이 뜻있는 사업에 동참하기를 원하는 교우들이 늘어 장학기금은 상당한 액수에 이르게 되었고 따라서 수혜자도 늘어났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장학금이 특정한 교인의 이름으로 지급되는 것은 다소 문제가 있다는 여론이 생겨났다. 이에 당회는 1982년 2월 기존의 '한한장학회'를 비롯한 개인명의의 장학회를 하나로 통합한 「새문안장학회」를 결성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새문안장학회 운영 규약'을 제정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1981년부터 100주년을 맞이하는 1987년까지의 장학금 지급상황을 수혜자학교별로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다.
이상의 <표 9-5>에서 보듯 장학금 지급은 학기별로 매년 2회씩 지급되었으며 지급 대상자는 신학생이 단연 우위를 점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는 중고등학생들에게 지급되었는데 이는 교인 가운데 경제적 어려움이 있는 자제들에게 수혜의 기회를 우선적으로 주었기 때문이다. 그밖에 일반 대학생의 경우는 가정의 형편과 교회에서의 봉사 정도를 고려하는 등 장학위원회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지급되었다. 대학생 수혜자의 경우는 교회학교 교사와 성가대원 및 대학부, 청년회의 임원들이 주로 장학생으로 선정되었다.
연도에 따라 지급대상자의 편차를 보이고 있는데 가장 많이 지급한 해는 1981년 상반기로 28명에게 지급하였고, 가장 적은 해는 1985년 상반기와 1987년 상반기로각각 20명에게만 지급되었다. 이 시기 새문안에서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 가운데는 현재도 교회학교 교사와 성가대원으로 봉사하는 교인이 적지 않으며 교역자로 혹은 기독교 관련 기관이나 학교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신학생(신학대학원)자격으로 장학금을 받았던 임화식, 전응휘, 박태호, 탁지일, 김재민, 정철, 홍기, 가천호등이 이에 해당하며 일반 대학생 수혜자로서는 유태선, 박윤길, 변창배, 임기상, 이혜숙, 심완희, 장영은, 이귀선 등이 2회 이상씩 장학금을 받았는데 이들은 현재도 새문안에 출석하고 있으며 신학을 공부하거나 기독교 관련 단체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람을 키우는 새문안의 전통은 이렇게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1970년대 후반부터 장학기금이 늘어나면서 전보다 활성화된 새문안장학회는 1982년 '새문안장학회 운영 규약'을 제정하여 매년 50여 명에 이르는 교회 재적학생들에게 일정한 장학금을 지급하는 틀잡힌 제도로 정착 발전하였다. 이밖에 이즈음 '새 문안교회 묘지 규정'에 관한 규약도 제정되었다. 1986년 10월 당회에서 제정, 통과된 이 규정은 새 문안동산의 묘지 사용자 범위와 면적 기준 및 관리 등에 대한 원칙을 정하였다. 즉 묘지를 사용할 수 있는 교인의 자격은 본교회 세례교인과 교회 등록 1년 이상된 교인에게만 허락되며 개인별 묘지 사용 면적은 가로 2m, 세로 3m로 제한하였다. 이로써 날로 심각해지는 묘지문제로 생겨날 불씨를 사전에 제거하는 현명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던 것이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나 할까. 교회 운영을 위한 각종 규약을 제정하는 한편 100주년 기념행사를 힘차게 추진하던 1986년 1월과3월에 예기치 않았던 '사건'이 교회 내에 발생하였다 하나는 교회부지(신문로 1가 52,53번지 ; 현재 본당우편주차장부지) 매입과정에서 가등기 명의변경 절차상의 하자로 인해 교회재정에 적지 않은 손실을 가져오게 된 사건이었다. 위의 부지를 당회장 이름으로 가등기했던 것을 '새 문안교회 명의'로 변경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이 사건은 당시 교회, 특히 당회원들에게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우선 당회는 임창우 장로, 김호용 장로, 남상현집사 3인을 '가압류해제교섭 추진위원'으로 위촉하고 이 문제의 해결방법을 모색토록 위임하였다. 결국 이 사건은 2,600만 원의 거금을 당회원 전원이 공동책임하에 분담하여 마련하는 방법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일이 있은 후 당회는 차제에 "교회부동산에 관한 일체의 미비사항을 재산관리위원회로 하여금 정리하도록" 하는 한편 "교회의 모든 부동산 거래에 수반되는 법률행위는 지정 사법서사로 하여금 대행케 하여 위임계약을 체결토록 한다"는 원칙을 정하였다. 그리고 이 사건과 관련해 김성보 사무장이 사임하고 그 후임으로 이귀남 집사가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채 마무리되기 전에 또 하나의 불미스러운 사건이 터졌다. 당시회계부장을 맡고 있던 송병석 장로가 8,000만 원에 이르는 거액을 임의로 인출하여 개인용도로 사용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당회는 그 해 3월9일 임시당회를 개최하여 송 장로의 재산압류 조치 등을 위한 긴급조치를 취하기로하고 이에 따른 경비를 지출할 것을 결의하였다.l9 이어 당회는 다시 '3인위원회'(임창우 장로, 김호용 장로, 남상현 집사)를 구성하고 송 장로 소유 부산시 소재 건축물(2동)에 대한 보존등기를 신청하는 등 신속한 조치를 취했다. 또한 이에 앞서 당회는 "부정한 교회예금 인출 방지를 위해 모든 은행 거래는 새 문안교회 명의로 하고 거래은행의 지정은 재산관리위원회의 제청과 당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원칙을 세워 이러한 불미스러운 일이 다시는 생기지 않도록 하였다.
송 장로가 이후 인출해 간 원금과 이자를 모두 환입(還入)함으로써 교회의 재정적인 손실은 없었지만 이 사건이 준 여파와 충격은 적지 않았다. 특히 이 사건으로 당회와 당회원이 교회적으로 입은 '권위의 손상'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일로 교회는 흔히 '시험'에 드는 수가 많았다 그러나 과거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새문안이 그러했듯 이 사건도 당회원들과 일반 교인들이 하나되어 수습에 나섬으로써 더 이상 비화되지 않았으니 새문안의 남다른 면모를 이같은 '불미스러운 사건'의 예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강신명 목사의 소천과 그의 공적
1985년 6월 22일 소죽(小竹) 강신명 목사께서 소천(召天)하였다. 이날 오전 10시입원 가료중이던 세브란스병원에서 운명한 것이다. 너무도 뜻밖의 비보에 새문안교인들은 놀라움과 슬픔을 가누지 못했다. 평소 인자한 '아버지' 흑은 '할아버지'처럼 따르며 존경하던 강 목사의 갑작스러운 서거에 새문안 가족들은 더없는 슬픔에 잠기었다.
한 달 전인 5월 26일 오순절 주일 설교가 강 목사의 마지막 설교가 되리라고 누가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러나 돌이켜 보면 이날 강 목사 설교는 여느 때와 달랐다. 복음정신이 그 어느 때 설교보다 짙게 깔려 있었으니, '진리의 말씀으로 변화'될 것과'예수를 닮은 교회', '예수처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을 힘주어 강조했던 것이다. 마치 당신의 마지막 메시지임을 인식이나 하듯 이날의 설교는 새 문안만이 아닌 한국의 전 교회를 향한 외침이었다. 2세기를 맞이하며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이 땅의 진정한 빛과 소금의 사명을 위해 변화될 것을 힘주어 피력한 강 목사의 마지막 설교 요지는 이러했다.
올해는 한국교회가 선교 100주년을 지난해로 보내고 한국선교 2세기를 맞이하는 첫번째 성령강림절입니다. 새로운 세기를 개척해 가는 데 있어 우리가 변화되어야 하겠습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변화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로 변화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닮아가야 하겠습니다. 예수처럼 살아가는 교회가 되고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때에 교회는 세상에 빛이 되고 소금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강목사의 서거는 새문안만의 슬픔이 아니었다. 1936년 평남 서문밖교회 전도사로 목회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후 50년간의 목회활동을 했기에 그가 한국 교계에 남긴 족적(足跡정)은 너무도 깊고 넓었다. 그가 한국 교계의 지도자로 부상한 1960년대 이후 세상을 더나는 날까지 한국 기독교계에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강 목사의 활동은 넓고도 컸던 것이다.
1955년 새문안에 강 목사가 부임한 이후 강목사가 관계한 주요기관과 활동의 면면을 보면 이같은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1959년 제11대 대한기독교교육협회 회장직(14대, 23대 역임)을 비롯해 연세대학교 재단이사(1961~1966), 서울 장로회신학교 교장(1962~1985),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1963~1954)을 역임했으며, 1964년 미국 스털링 대학에서 명예신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그 해 연세대학교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이밖에도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1970)할 만큼 사회적인 활동도 많이 했으니 1977년 주한미군철군반대 한국기독교대책위원회 회장(1977~1978)을 맡아 수고했으며 한국기독교 선교단체협의회(1977~1985)와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1978~1979)의 회장직과 입법회의 의원(1980~1981) 등 이루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기독교계와 교육기관 및 사회단체의 대표로 활동하였다.
이상과 같은 다양한 활동 가운데 강 목사가 20여 년 간 열정을 쏟은 곳은 서울장로회신학교였다. 1962년 교장에 취임하여 1969년 이 신학교를 새문안교회로 옮겨 교회 안에 있는 '언더욷기념관'을 사용하면서 신학교로서의 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으며, 특히 경기도 광주에 신축교사를 마련하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하였다. 한편 그가 말년에 심혈을 기울였던 일은 숭실대학교 총장으로 활동한 일이다. 1982년 1월 총장에 취임한 강 목사는 자신의 모교이자, 대표적인 한국 기독교교육 기관인 숭실대학교를 보다 훌륭한 대학, 좀더 건학이념에 충실한 대학으로 만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던 중 과로로 쓰러진 것이다. 1980년 1월 새문안의 원로목사로 추대된 후 육신적으로 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주위에서 이를 허락지 않았다. 결국 강신명 목사는 숭실대학교 총장으로 재임 중 누적된 과로의 결과로 1985년 6월 22일 오전 10시 소천하였다.
반백년을 목회자로 활동한 강신명 목사가 이 땅에, 특히 새문안과 한국교회에 남긴 정신적인 유산은 너무도 많다
첫째, 강 목사가 한국 교계에 남긴 정신적 유산은 교회연합정신이었다. 1950~1980년대까지 근 30여 년 간 한국교회는 '분열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했는데 이 시기 강 목사는 일관되게 교회의 연합과 일치운동을 외치며 이 일을 추진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경주했다. 이 점은 한국 교회사에 영원히 기록될 만한 역사적 공헌이 아닐 수 없다.
둘째, 교회의 민주적 운영의 본을 보인 점과 이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실천적인 목회활동을 했다는 점도 그가 한국교회와 새문안에 남긴 귀중한 정신적 유산이다. 흔히 새문안 당회는 매우 민주적으로 운영된다는 평을 들어오고 있다. 이같은 평을 받을 수 있는 것은 강 목사의 목회철학, 즉 교회를 민주적으로 운영한 그의 목회철학에서 비롯되었다 할 수 있다. 강목사는 장장24년이라는 긴 세월을 새문안의 당회장으로 시무했지만 결코 교회 운영을 전횡하는 일이 없었다. 말하자면 교회 행정과 운영을 당회와 제직회를 통한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합리적으로 처리하는 입장을 평생 견지했던 것이다
한편 교회의 사회적인 역할과 기능에 대한 남다른 목회관을 갖고 있었다. 즉 교회가 이 사회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현실문제를 외면할 수 없다는 입장에서 늘 정치나 사회가 잘못되어간다고 판단될 때는 목회자로서의 양심에 따라 이를 질타하는 일에 앞장섰던 용기 있는 목자였다. 특히 1970년대 중반 유신 이후정치 사회적으로 매우 경직되었던 상황에서 보인 그의 용기 있는 발언과 행동은 지금도 많은 이들의 기억에 깊게 남아 있다.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 장례식에서 기독교계를 대표한 기도를 맡은 그는 "잘못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닙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자기가 심은 것을 그대로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 두려운 줄을 알아야 하며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심지어 남몰래 한일까지도 사람이 한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심을 명심해야 합니다" 라고 기도하여 이를 지켜보던 모든 이들에게 커다란 놀라움과 교훈을 주었으며 옷깃을 바로잡게 하는 '충격적인 하나의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같이 강 목사는 참으로 용기있는 '큰 목자'였다.
셋째, 목회자로서의 자상함과 인자함 그리고 그의 탁월한 기억력을 새문안의 모든 가족은 잊을 수 없다. 강 목사는 체구가 큰 만큼 가리는 음식이 없었다. 대심방 때면 하루에도 수십 가정을 심방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나오는 커피를 사양하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내놓는 과자며 사탕을 한줌씩 호주머니에 혹은 가방에 넣어 가지고 어려운 가정에 가서 그것을 그 집 아이들에게 나눠주는 자상함을 보였다.
또한 강 목사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그의 남다른 기억력이다. 심방때면 그 가정의 모든 가족의 이름을 하나 하나 떠올리며 기도할 뿐만 아니라 주일예배가 끝나고 교인들과 인사를 나눌 때에 그 많은 교인들의 이름은 물론 그 가족의 어린아이 이름까지 불러주면서 축복의 인사를 보내는 그의 놀라운 기억력에 교인들은 감복하며 한없는 신뢰를 보냈던 것이다. 남달리 크고 따뜻했던 그 손으로 교인들의 손을 잡아주고 어린이들에게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름을 불러주던 강 목사의 그 인자한 모습을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부분에 관해 김정제(金定濟) 장로는 조사(弔辭)에서 이렇게 회고하며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목사님께서는 30년 동안을 하루같이 인자하신 성품으로 전 교인을 친형제 자매와 같이 항상 따뜻한 사랑으로 안아주셨으며 인자하신 아버지와 같이 철모르는 양떼를 기르시는 목자로서 우리 새문안의 권속들을 돌보아주셨습니다. 또한 주님의 교훈과 법도로써 훈육하시며 가가(家家) 호호(戶戶) 심방하 실 때는 그 가정의 가장으로부터 어린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까지 자세히 기억하시며 일일히 호명 기도하시고 심지어 각 가정의 인근 친척들의 이름까지 기억하시며 문안하시던 자상하시고 인자하신 목사님의 모습을 이 지상에서 다시 뵈올 길이 없사오니 어찌 이 애석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사오리까.
이같이 자상하고 인자했던 목자, 그래서 친아버지처럼 따랐는데 그는 이제 우리 곁을 떠났다. 그러나 우리에게 수많은 정신적 유산을 남겨주었다. 따라서 그가 남긴 정신적인 유산을 계승 발전시켜 새문안의 정신으로 승화시키는 일이, 진정 그는 갔지만 그를 영원히 새문안에 살리는 길일 것이다. 1979년 여름 포항에서 김동익 목사에게 들려주었다는 아래와 같은 내용, 즉 목회자가 지켜야 할 네 가지 조건은 그가 우리에게 남긴 또 하나의 정신적 유산이라는 점에서 기억되어 마땅할 것이다.
훌륭한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첫째, 신앙은 복음적 이어야 하며 목회는 포용적이어야 한다. 둘째,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열심히 사랑해야 한다. 셋째, 목사는 자기 교회하나만을 생각치 말고 모든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생각하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 넷째, 목사와 교회는 사회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강 목사가 지적한 이상과 같은 목회자의 덕목은 그를 이은 김동익 목사에 의해 계승, 발전되어 새문안 목회의 영원한 덕목으로 이어져 갈 것이다. 여기서 강 목사가 한국교회에 남긴 빼놓을 수 없는 공적 한 가지를 더 들 수 있으니, 한국교회 음악에 미친 공헌이 바로 그것이다. 강 목사는 1936년 《아동가요곡선삼백곡》(兒童歌謠曲選三百曲)이라는 아동가요집을 편찬한 바 있다. 강 목사가 평양 장로회신학교 재학시절에 펴낸 이 아동가요곡 모음집에는 총 345곡이 수록되어 있다. '주일학교노래', '봄노래', '여름노래', '가을노래', '겨울노래' 그리고 '기타'로 나누어 편집된 이노래 모음집에는 1730년대 교회학교에서 애창되던 각종 동요와 어린이 찬송 200여곡과 강 목사 자신이 작사, 작곡한 50여 곡도 함께 실려 있다. 이 노래들은 당시 어두웠던 시절 어린이들의 잠든 정서를 깨우치고 민족혼을 불어 넣어주는 한편 신앙의 눈을 뜨게 하는 데 적지 않게 공헌했던 것이다.
이 가운데 강 목사의 대표적인 작품 "새서방 새색시"는 당시 서북지방에서 널리 불려졌을 만큼 유명했다. 강 목사가 직접 부르던 이 동요의 노래말과 곡을 지금까지 기억하는 새문안 교우들도 있을 것이다. 이 아동가요집은 발간된 지 50여 년이 지나 한국교회 음악사의 귀중한 사료가 되었다. 요컨대 강신명 목사는 한국교회와 기독교계의 여러 분야에 지울 수 없는 궤적을 남긴 '큰 별'이었던 것이다. 이같은 '큰별' 강신명 목사 서거 2주기를 기념하며 그의 동료와 후학들에 의해 1987년 6월 《강신명 신앙 저작집》이 발간되었으며 한편 새 문안에서는 그를 기념하는 '100주년기념 강신명 목사 석좌제(項座制)'를 정해 매년 장로회신학대학교에 일정한 지원금을 보내고 있다. 이 석좌제는 태국 선교사 파송사업과 함께 교회 창립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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